목차
*이순신의 집안배경
*임진왜란과 해전의 의의
*이순신의 리더쉽
*역사적교훈
*임진왜란과 해전의 의의
*이순신의 리더쉽
*역사적교훈
본문내용
것이다.
셋째 계명은 '스스로 정결하라'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 모두가 Politician이지 결코 Statesman일 수 없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암담할 뿐이다. 미국의 서부 활극이 아니라 한국의 사극에서 보여주는 등뒤에서 총 쏘는 식인 권모술수와 이합집산의 패거리 정치는 이제 청산해야 한다. 더 이상 정치가 법을 무력화하고, 경제를 마비시키고, 사회를 혼탁시키고, 문화를 오염시키는 한국의 전근대적 저질정치 풍토를 용납해서는 안될 것이다. 정치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국가지도자가 스스로 정결해지면 이런 추잡한 정치는 사라지게 된다.
역사적교훈
충무공의 일생은 임진왜란과 따로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다. 100여 년간의 전쟁을 통해 드디어 전국을 통일한 왜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여세를 몰아 조선을 침략하였다. 명나라를 치는데 길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 침략의 이유라 했으나 실상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봉건 제후들의 힘을 밖으로 돌려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 조정에 자리잡은 양반들은 당파 싸움과 무사안일에 빠져 주변국의 정세 변화에 무지하였고 국방을 소홀히 하였다. 이율곡이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로 유비무환을 역설할 때 조선의 지배층은 오히려 이를 배척하고 더욱더 당쟁에 몰두한 결과로 임진왜란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늦게나마 왜국에 사신을 보내어 침략의 동태를 살펴보았지만 동인과 서인의 당쟁 논리에 밀려 사신들의 보고는 묻혀 버렸다. 오직 충무공만이 준비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겨 놓았다. 7년간의 처참했던 전란은 끝났으나 전쟁터였던 조선 땅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말았다. 인명의 손상과 경제적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 탈취되고 사회질서의 붕괴와 도덕의 해이를 가져왔다. 한편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판도를 크게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었다. 왜국은 임진왜란으로 국내 봉건제후들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신흥 상업세력의 진출에 힘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등장으로 19세기 중엽까지 막부(幕府)시대가 이어졌다. 조선에서 잡아간 기술자와 탈취한 문화재가 그들의 농업기술과 문화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한편 명나라는 군사를 조선에 파병하여 국력을 소모한 결과 당시 만주에서 급속하게 세력을 팽창해 가던 여진족(淸나라)에게 정복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통해 많은 희생이 있었으나 궁극적으로 조선이 전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보다도 민족의 잠재적 역량 때문이었다. 무력했던 관군을 대신하여 신분의 귀천을 넘어서 전 민중이 궐기하여 왜적과 싸운 의병활동이 바로 이것이었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왜군의 조총에 밀려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차츰 총포 (비격진천뢰, 천.지.현.황 총통) 의 위력과 새로운 전술개발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고 또한 거북선과 판옥선 등 함선의 성능은 왜군을 훨씬 능가하였다. 여기서 충무공이 남긴 발자취를 통해 역사의 교훈을 찾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충무공은 정신무장과 훈련을 중요시하였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굳은 애국심과 전투에 앞서 필승의 신념을 고취하였고 엄한 훈련을 반복하여 병사들의 전투능력을 높이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지리적 조건과 함선의 기능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전술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전투 이외의 요소인 병참, 보급과 후방 공작, 그리고 백성들을 보호하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빈틈없는 전략과 전술, 필승의 신념과 유비무환의 정신, 이 모든 것이 충무공을 동서양에서 제일로 꼽는 명장으로 만든 이유라 할 것이다.
셋째 계명은 '스스로 정결하라'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 모두가 Politician이지 결코 Statesman일 수 없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암담할 뿐이다. 미국의 서부 활극이 아니라 한국의 사극에서 보여주는 등뒤에서 총 쏘는 식인 권모술수와 이합집산의 패거리 정치는 이제 청산해야 한다. 더 이상 정치가 법을 무력화하고, 경제를 마비시키고, 사회를 혼탁시키고, 문화를 오염시키는 한국의 전근대적 저질정치 풍토를 용납해서는 안될 것이다. 정치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국가지도자가 스스로 정결해지면 이런 추잡한 정치는 사라지게 된다.
역사적교훈
충무공의 일생은 임진왜란과 따로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다. 100여 년간의 전쟁을 통해 드디어 전국을 통일한 왜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여세를 몰아 조선을 침략하였다. 명나라를 치는데 길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 침략의 이유라 했으나 실상은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봉건 제후들의 힘을 밖으로 돌려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 조정에 자리잡은 양반들은 당파 싸움과 무사안일에 빠져 주변국의 정세 변화에 무지하였고 국방을 소홀히 하였다. 이율곡이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로 유비무환을 역설할 때 조선의 지배층은 오히려 이를 배척하고 더욱더 당쟁에 몰두한 결과로 임진왜란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늦게나마 왜국에 사신을 보내어 침략의 동태를 살펴보았지만 동인과 서인의 당쟁 논리에 밀려 사신들의 보고는 묻혀 버렸다. 오직 충무공만이 준비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겨 놓았다. 7년간의 처참했던 전란은 끝났으나 전쟁터였던 조선 땅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말았다. 인명의 손상과 경제적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 탈취되고 사회질서의 붕괴와 도덕의 해이를 가져왔다. 한편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판도를 크게 뒤흔들어 놓은 사건이었다. 왜국은 임진왜란으로 국내 봉건제후들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신흥 상업세력의 진출에 힘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등장으로 19세기 중엽까지 막부(幕府)시대가 이어졌다. 조선에서 잡아간 기술자와 탈취한 문화재가 그들의 농업기술과 문화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한편 명나라는 군사를 조선에 파병하여 국력을 소모한 결과 당시 만주에서 급속하게 세력을 팽창해 가던 여진족(淸나라)에게 정복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통해 많은 희생이 있었으나 궁극적으로 조선이 전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보다도 민족의 잠재적 역량 때문이었다. 무력했던 관군을 대신하여 신분의 귀천을 넘어서 전 민중이 궐기하여 왜적과 싸운 의병활동이 바로 이것이었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왜군의 조총에 밀려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차츰 총포 (비격진천뢰, 천.지.현.황 총통) 의 위력과 새로운 전술개발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고 또한 거북선과 판옥선 등 함선의 성능은 왜군을 훨씬 능가하였다. 여기서 충무공이 남긴 발자취를 통해 역사의 교훈을 찾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충무공은 정신무장과 훈련을 중요시하였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굳은 애국심과 전투에 앞서 필승의 신념을 고취하였고 엄한 훈련을 반복하여 병사들의 전투능력을 높이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지리적 조건과 함선의 기능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전술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전투 이외의 요소인 병참, 보급과 후방 공작, 그리고 백성들을 보호하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빈틈없는 전략과 전술, 필승의 신념과 유비무환의 정신, 이 모든 것이 충무공을 동서양에서 제일로 꼽는 명장으로 만든 이유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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