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 - 한국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인민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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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모택동 - 한국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인민의 영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NDEX♦

1.들어가며

2.인간 모택동
1) 어린시절의 모택동
2) 청.장년시절의 모택동

3.나가며

<참고 정리>

1. 신문화운동과 모택동사상
2. 모택동의 호남농촌운동 시찰보고
3. 정강산에서 연안까지
4. 인민민주전정시대의 모택동사상
5. 대약진운동과 모택동사상
6. 문화혁명과 모택동사상
7. 모택동사상에 대한 평가
*모택동의 저서*
8. 한국전쟁에서 숨진 모택동의 큰아들


♦참고 문헌 및 논문,각주,사진♦

본문내용

어집해》를 고주(古註), 《논어집주》를 신주라 한다. 고주를 부연해석한 것이 송나라 형병(邢昺)의 소(疏)인데, 《십삼경주소(十三經註疏)》에 수록되었다. 양(梁)나라의 황간(皇侃)에 의한 《논어의소(論語義疏)》는 본국에서 일찍 없어지고, 후한 정현의 《논어》 주석은 당나라 말기에 없어졌으나, 20세기초 둔황[敦煌]에서 발견된 고사본(古寫本)과 1969년 투루판[吐魯蕃]에서 발견된 당(唐)사본에 의해서 7편 정도가 판명되었다. 청(淸)나라의 유보남(劉寶楠)이 지은 《논어정의(論語正義)》는 훈고고증이 가장 자세하다.
4 영향
《논어》는 한(漢)나라 때에 이미 <오경(五經)>과 필적할 만한 지위에 있었다. 송(宋)나라 이후 《맹자》 《대학》 《중용》과 함께 <사서(四書)>라 불린다. 한국에 유교가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인데 《논어》도 이 무렵에 전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통일신라시대인 682년(신문왕 2) 국학이 체계를 갖추었을 때 《논어》를 가르쳤으며, 그 뒤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로 인재를 선발할 때도 논어는 필수과목이었다. 조선시대는 오경보다 사서를 중요시하는 주자학이 등장하여 사서의 중심인 《논어》는 벽촌의 학동들까지 배우게 되었다. 이황(李滉)의 《논어석의(論語釋義)》와 그의 문인 이덕홍(李德弘)의 《사서질의(四書質疑)》가 그 면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또한 정약용(丁若鏞)의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는 한(漢)·당(唐)나라의 훈고와 송(宋)·명(明)나라의 의리에 매이지 않고 문헌비판적·해석학적 방법론에 따라 《논어》를 해석하였다.
와 사서(四書) 유교의 4경전. 즉 중국의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대학(大學)》을 가리킨다. 주자(朱子;朱熹)가 하나의 학문적 체계하에서 찬정(撰定)한 것으로, 유교의 필독서이다. 《대학》과 《중용》은 본래 《예기(禮記)》 중의 2편이다. 주자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순으로 학습하고 그 후에 5경(五經)을 배우라고 하였다. 주자학의 보급에 따라서 원(元)나라 중기에는 과거(科擧)에 4서와 5경 중의 한 책에서 주자학적 해석을 위주로 하는 문제가 출제되었고, 명(明)나라·청(淸)나라 때에는 오로지 주자학적 해석에 따른다고 규정하였다. 명나라 때에는 《사서대전(四書大全)》이 편찬, 반포되어, 마치 국정교과서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원·명대의 사상·학설은 4서에 바탕을 둔 것이 많고 명나라 학자 왕양명(王陽明)의 독창적 학설도 4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서 나왔다. 명나라 중기 이후에는 양명학이나 불교사상을 도입한 4서의 신해석이 나타나서 이전에 나온 책의 권위가 떨어지기도 하였다. 청나라 때에는 다시 5경을 중요시하는 학풍이 나타나서 4서의 지위는 저하되었지만, 과거에는 여전히 사서의 장구(章句)·집주(集註)가 중시되었다.
를 읽었다고 한다. 당시의 서당 훈장은 몹시 무섭게 애들을 다루어서 학생들을 때리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이에 13살 때 모택동은 서당을 뛰쳐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또다른 고민이 생기게 되었다. 막상 집에들어가면 이제는 아버지께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다소나마 인정스러워졌으며, 훈장 선생님도 그 뒤로 온화해지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이 모택동의 행위는 그야말로 많은 이들을 움직인 것이다. 모택동이 글씨를 알게 되자 아버지는 이제 장부를 정리하라고 요구했고, 주판을 배우게 되었다. 이제 모택동은 아침에 농사를 돕고, 낮에는 공부를 하고 밤에는 장부를 정리하는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된다. 아버지는 모택동 형제들에게 용돈을 주는 일은 절대 없었고, 거기다 화를 잘내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매를 들기 일쑤였다고 한다. 거기다 매달 15일에 농장의 노동자들에게 쌀과 계란을 주어 선심을 쓰는 것처럼 그랬지만 절대 고기를 주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어머니는 관대하고 동정심이 많았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언제나 불쌍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있을 때에는 그러 한 일을 하지 못했고, 모택동의 집은 이러 일들로 하여금 언제나 집안에서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고 한다. 싸움은 아버지대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식구였다. 가끔은 거기에 농장 노동자들도 합세를 하고 말이다. 모텍동은 13살쯤되자 이제는 아버지와 논쟁을 하기에 이른다. 특히 유교의 고전을 인용해서 주장을 폈는데, 아버지가 게으르고 불효막심한 놈이라고 하면, 모택동은 어른이 친절하고 사랑이 많아야 된다고 하였으며, 또 게으르다는 구절에서는 나이 든 사람이 나이 어린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예기하였다고 한다. 또 언제나 논쟁 뒤에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어른이 되면 아버지보다 훨씬 더 원기 왕성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실질적으로 집안에서 글을 알고 공부를 제대로 한 이는 모택동 하나였기 때문에 아버지도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학교에서는 공부 외에 악비전(岳飛傳), 수호전(水滸傳), 수당연의(隋唐演義), 삼국지(三國志)등의 법에 어긋나는 마쁜 책이라고 말하는 늙은 선생님의 눈을 피해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13살이 되었을 때 모택동은 서당에서 나와 농장에서 오랫동안 일하게 되었다. 낮에는 노동자들과 일을 했고, 밤에는 아버지와 장부를 정리하게 된 것이다. 이런 힘든일이 지속되어도 모택동은 독서를 계속했고, 그 많은 소설을 읽던 중에 나중에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대개의 주인공들은 관료이거나 무사 아니면 학자였던 것이다. 농부 출신은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농부들은 밭에 나가 일하지 않아도 되는자 즉, 지배자들을 찬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배자들은 땅을 가꾸게 하고 있기 때문에 지배자들이 직접 농사를 짓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에 호남에서는 모택동의 일생에 영행을 미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다. 모택동이 공부하던 작은 중국학교 주변에서 학생들은 콩상인들이 장사(長沙)에서 돌아오는 긴 행렬을 보았다. 그들에게 왜 장사에서 돌아오는 것이내 물었더니 그 도시에 커다란 폭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 폭동인 즉, 그해 심각한 기근이 일어나 장사에서 수천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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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9.29
  • 저작시기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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