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사상과 한성순보에 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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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개화사상과 한성순보에 관한 소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언

Ⅱ. 개화사상
1. 역사적 상황과 사상적 배경
2. 한성순보의 개화사상
3. 개화파에 대한 역사적 평가

Ⅲ. 한성순보
1. 창간배경
2. 창간과정 및 종간
3. 체재(體裁)와 내용
4. 사회경제사적 특징과 한계

Ⅳ. 결언

본문내용

적 역량을 평가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19]119
Ⅲ. 한성순보
1. 창간배경
<한성순보>는 1883년 10월 1일 (양력 10월 31일) 서울에서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이다. 이 신문은 대체로 열흘에 한 번씩 제 41호까지 발행되다가 갑신정변(1884년 10월 17일;양력 12월 4일)과 더불어 발행이 중단되었다.
<한성순보>의 창간은 당시의 지배체제인 봉건왕조의 변혁과 사회문화의 개혁을 열망하는 시대적 요청에 의한 필연적 귀결이었다.
<한성순보>를 단순히 \'근대언론의 출현\'이라고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그 역사적 의의를 충분히 평가할 수 없다. 이 신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이 신문의 창간 배경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한성순보>의 창간을 가능하게 했던 주객관적 요인들을 살펴보면, 첫째, 1882년 임오군란의 실패 후 민씨 일파의 득세 속에서 정부가 대외개국의 수단으로서 신문발간의 필요성에 주목한 점이다.
강화도 조약의 체결(1876년) 이후 급속히 진행된 조선왕조의 대외개국은 관리들의 해외방문을 빈번하게 했다. 그 중 1883년 1월 6일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을 다녀온 박영효(朴泳孝:1861~1939)는 신문 발간을 위해 필요한 시설, 조직 및 인력충원의 필요성을 왕에게 보고하고 신문발행 업무추진의 하교(下敎)를 받았다.
둘째 김옥균(金玉均:1851~1894)을 비롯한 많은 개화파 인사들이 여러 계층 사람들을 사회 문화적으로 계몽시키고 국내외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신속하게 소개하여 견문을 넓혀주기 위해서 신문의 발간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점이다. 김옥균 등은 부패하고 허물어져 가는 봉건주의를 반대하고 정치경제문화의 모든 면에서 나라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역사를 발전시키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조류를 \'개화사상\'이라고 하는 바, 그 핵심적 내용을 보급하는 데 있어서 신문의 필요성이 절실하였다.
셋째, 이 두 가지 주체적인 요인 외에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라는 외무기관의 하부조직 가운데 하나인 동문학(同文學) 산하에 박문국(博文局)이라는 인쇄시설이 조직되었던 점이다. 박문국의 운영경비는 특별세에 의해 충당되었는바, <한성순보>의 창간 이전부터 경주인(京主人)들이 전국 각지에서 토색질에 가까운 징세를 행하였던 것으로 보아 박문국의 조직은 백성들의 땀과 눈물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정진석 교수는 『한국현대언론사론』<전예원, 1985, 99~103쪽>에서 행정관서나 일반인 상당수가 신문을 읽었을 것이나 구독료는 잘 걷히지 않았으며, 신문발행 이전부터도 경주인들이 나서서 박문국 운영경비를 세금으로 걷어들였다고 고증하고 있다.)
넷째, 부차적인 요인으로서 일본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43~1901)가 신문제작 기술과 관련된 인력지원을 거든 점이다. 후쿠자와는 게이오 대학(慶應義塾)의 창설자일 뿐만 아니라 직접 『시사신보』(時事新報:1882년 3월 福澤諭吉이 창간한 이 신문은 그 당시 일본신문의 정당기관지 시대에 막을 내리게 하였다. 이 신문은 정당 바깥에서 사회를 제도하고 관민조회를 표명하면서 정당신문의 몰락을 촉진시키고 상업 본위의 신문을 출현시키는 등 일본 사화언론의 근대황에 큰 영향을 끼쳤다. 小野秀雄『일본신문발달사』, 大阪 日日新聞社1922)를 창간하여 운영했기 때문에 신문 제작과 운영에 관련된 기능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는 신문간행의 실무를 책임진 유길준(兪吉濬:1856~1914)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 친교를 맺은 우시바(牛場卓造), 다카하시(高稿正信), 이노우에(井上角五郞)에게 신문제작에 관련된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 이들 3인은 유길준 등의 관직사퇴와 더불어 일본으로 돌아갔고, 이노우에만 남아 <한성순보>의 제작에 직접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20]220
2. 창간과정 및 종간
1) 창간과정
(1) 개화파의 세력확장
<한성순보>창간의 주역은 개화파 계열의 인물들이다. 개화파의 사상은 과거의 봉건사상과는 질적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바, 그들은 정치운동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 새로운 운동방법과 형식을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김옥균을 핵심으로 한 개화파 인사들은 새로운 운동방법으로서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서구열강)의 정치, 경제, 문화 제도를 소개하는 출판물을 발간하고 발전된 과학지식의 보급에 관한 서적들을 열심히 연구하여 자기혁신을 도모하고 동지들을 교양하는 동시에 개화사상의 대중적 전파를 모색했다. 그들이 채택한 운동형식의 하나로서 <한성순보>의 발간은 개화운동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개화사상가의 출현은 실학사상가들의 사회개혁론에 일정한 영향을 받아 해외문물을 먼저 접촉한 유대치, 오경석 등 譯官출신 중인들의 왕성한 지적 욕구와 사회발전에의 의지에 힘입은 바 크다. 유대치와 오경석은 친구 사이로 사귀면서 역관의 직업적 경험으로부터 배우게 된 발전된 사회로의 꿈을 이룩하기 위해 사회 각 부문의 혁신을 도모하였으며 실학의 거두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도 때때로 정권에 참여하면서 나라의 부강을 위한 혁신지향적 사조의 큰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이들의 문하에 자주 출입하던 청년 김옥균 등 양반계급 젊은이들은 마침내 근대적 개혁운동을 수행하는 정치조직을 만들고 그 세력을 국민 각계각층 심지어는 양반집의 가노(家奴), 궁녀와 보부상에 이르는 각 분야에 침투시키기에 이른다.[21]221
(2) 박영효와 유길준의 신문창간 준비작업
개화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다녀온 이후로 볼 수 있다. 박영효 일행은 이때 약 3개월 간 일본에 머물면서 각계 지도자들과 접촉하던 중 대중계몽의 수단으로서 신문발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듯하다.
귀국 후 박영효는 한성부 판윤(判尹)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고종으로부터 한성부에서 신문발간을 맡으라는 하교(下敎)를 받았고 실무책임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약 1년6개월 간 일본에서 견문을 넓힌 유길준에게 맡겼다. 유길준은 당시 외무 업무를 맡아 통리아문에서 관리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박영효와 동행한 일본인들과의 협력하여 개인 자격으로 신문 창간작업에 정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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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0.19
  • 저작시기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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