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머리말
1.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관심
2.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관심
3. 소련의 참전
4. 소련의 북한 점령
5. 미국의 국가체제 조직
6. 소련의 국가체제 조직
맺음말
1.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관심
2.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관심
3. 소련의 참전
4. 소련의 북한 점령
5. 미국의 국가체제 조직
6. 소련의 국가체제 조직
맺음말
본문내용
그들에게는 당을 분열시키는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공산당의 최고지도자인 박헌영이 직접 북으로 올라가 상의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북한의 힘은 소련에 있었고 김일성은 소련을 업고 있었다. 결국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군은 창당되었고 명목상 조선공산당 산하에 있었지만, 이는 명백한 독자적 공산당의 창당이었다. 이후 10월 13일의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대중 앞에 극적으로 등장한 김일성은 당권 장악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방직후 북한의 최고 정치지도자는 조만식이었다. 따라서 소련측도 조만식을 포용하기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으나 조만식은 소련에 그리 협조적이지 않았다. 소련은 일찍부터 북한의 한국인 행정조직을 구성하려 했으나 조만식의 반대로 무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조공 북조선분국을 창설하여 북한의 힘이 소련에 있다는 것이 보다 확연해졌고 조만식은 그것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결국 조만식이 연금된 채로 11월 19일에 결성된 행정 10국은 실질적으로 북한을 통치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경찰력의 확보인데 일단 소련이 사설 무장집단을 해산시킨 다음 김일성그룹이 장악한 보안대가 생겼다. 또 사법국에서는 몇몇 악법을 제외하고는 일제 때의 법률이 계속 효력을 지닌다고 공표했다. 이는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갔는 가를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외압 세력의 존재, 정치권력 장악을 위한 타 정당간, 계파간의 추쟁, 해방정국 인민들의 폭발적인 요구와 지원 등 북한 역시 안정된 상황이 아니라 혁명적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소련의 정책 중 다시 한번 미군과 유사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다른 정치세력의 배제였다. 미군이 중경임시정부의 입국을 막은 것처럼 소련도 무정 휘하 조선의용군의 입국을 막았다. 김일성의 정치기반이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세력이 들어오는 것은 노선에 혼선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랜 기간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중국에 가까운 세력이었으므로 소련은 자신들에게 결코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소련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점령정책을 취했을 뿐 결코 한국인의 열망에 부응하는 노력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들의 이해와 한국 민중의 이해가 미국의 이해와 조금 더 가까웠던 것뿐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미군보다 일관된 방침을 관철해 나갔다고도 볼 수 있다. 이들이 내건 동시철군이나 즉시독립과 같은 외교적인 모습들도 자신들에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리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한 것들이었고 이미 삼상회의 전에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상당하게 수립해 놓았던 것이다.
맺음말
지금까지 해방 후 미군과 소련군이 대한민국에 주둔한 목적과 당시 미국과 소련이 가지고 있던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당시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국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당사국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유럽에서 각축을 벌이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대립의 모습이 아시아에서도 그 모습을 같이 했다. 그리고 이들은 실제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일제의 압박 속에서 대한민국의 해방의 목적이 아닌 단지 적국의 영토를 점령하는 점령군으로서의 입장과 서로의 체제 수호를 위한 방패막이로 우리나라를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처럼 미군과 소련은 애초에 독일과 일본처럼 군국주의로부터 국민을 해방시키려는 해방군의 모습이 아닌 우리나라에서는 군사적인 면에서의 전략적 요충지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의 방패막이로 대한민국을 점령한 점령군으로써의 입장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해방직후 북한의 최고 정치지도자는 조만식이었다. 따라서 소련측도 조만식을 포용하기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으나 조만식은 소련에 그리 협조적이지 않았다. 소련은 일찍부터 북한의 한국인 행정조직을 구성하려 했으나 조만식의 반대로 무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조공 북조선분국을 창설하여 북한의 힘이 소련에 있다는 것이 보다 확연해졌고 조만식은 그것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결국 조만식이 연금된 채로 11월 19일에 결성된 행정 10국은 실질적으로 북한을 통치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경찰력의 확보인데 일단 소련이 사설 무장집단을 해산시킨 다음 김일성그룹이 장악한 보안대가 생겼다. 또 사법국에서는 몇몇 악법을 제외하고는 일제 때의 법률이 계속 효력을 지닌다고 공표했다. 이는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갔는 가를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외압 세력의 존재, 정치권력 장악을 위한 타 정당간, 계파간의 추쟁, 해방정국 인민들의 폭발적인 요구와 지원 등 북한 역시 안정된 상황이 아니라 혁명적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소련의 정책 중 다시 한번 미군과 유사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다른 정치세력의 배제였다. 미군이 중경임시정부의 입국을 막은 것처럼 소련도 무정 휘하 조선의용군의 입국을 막았다. 김일성의 정치기반이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세력이 들어오는 것은 노선에 혼선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랜 기간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중국에 가까운 세력이었으므로 소련은 자신들에게 결코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소련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점령정책을 취했을 뿐 결코 한국인의 열망에 부응하는 노력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들의 이해와 한국 민중의 이해가 미국의 이해와 조금 더 가까웠던 것뿐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미군보다 일관된 방침을 관철해 나갔다고도 볼 수 있다. 이들이 내건 동시철군이나 즉시독립과 같은 외교적인 모습들도 자신들에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리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한 것들이었고 이미 삼상회의 전에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상당하게 수립해 놓았던 것이다.
맺음말
지금까지 해방 후 미군과 소련군이 대한민국에 주둔한 목적과 당시 미국과 소련이 가지고 있던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당시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국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당사국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유럽에서 각축을 벌이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대립의 모습이 아시아에서도 그 모습을 같이 했다. 그리고 이들은 실제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일제의 압박 속에서 대한민국의 해방의 목적이 아닌 단지 적국의 영토를 점령하는 점령군으로서의 입장과 서로의 체제 수호를 위한 방패막이로 우리나라를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처럼 미군과 소련은 애초에 독일과 일본처럼 군국주의로부터 국민을 해방시키려는 해방군의 모습이 아닌 우리나라에서는 군사적인 면에서의 전략적 요충지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의 방패막이로 대한민국을 점령한 점령군으로써의 입장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