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록파 시인 박목월(朴木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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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록파 시인 박목월(朴木月)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작가소개
-작품감상

본문내용

먼 훗날 목월은 자기의 고향을 이렇게 썼다.
『산』
건천은 고향
역에 내리자
눈길이 산으로 먼저 간다.
아버님과 아우님이 잠드는 先山.
거리에는 아는 집보다 모르는 집이 더 많고
간혹 낯익은 얼굴은 너무 늙었다.
우리집 감나무는 몰라보게 컸고
친구의 손자가 할아버지의 심부름을 전한다.
눈에 익은 것은 아버님이 거처하시던 방.
아우님이 걸터앉던 마루.
내일은 어머니를 모시고 성묘를 가야겠다.
종일 눈길이 그 쪽으로만 가는 山
누구의 얼굴보다 친한 그 산에 구름.
그 산을 적시는 구름 그림자.
『사투리』
우리 고장에서는 오빠를 오라베라 했다.
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러운 악센트로
오라베 부르면
나는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
나는 머루처럼 투명한 밤하늘을 사랑했다.
그리고 오디가 샛까만 뽕나무를 사랑했다.
혹은 울타리 섶에 피는 이슬마꽃 같은 것을 그런 것은
너무나 하늘이나 꽃이기보다
내 고장의 그 사투리라 싶었다.
참말로 경상도 사투리에는
약간 풀냄새가 난다.
그리고 입 안이 마르는 황토흙 타는 냄새가 난다.
한편 목월은 다정다감했던 어린날의 추억을 <달과 고무신>에서 다음과 같이 엮어놓고 있다.
나는 소년시절을 달빛 속에서 잘랐다면 지나치게 시적인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여도 나의 소년 시절의 회상은 거의 달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일종의 축복이리 수도 있고 어느 면에서는 서러운 일이기도 했다.
내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곳은 경주다. 지금처럼 개화된 경주는 물론 아니다. 그 당시만 해도 신라의 고도로서의 폐허다운 애수를 짙게 간직하고 있었다. 40여 년 전, 경주는 달빛이 하얗게 비치는 골목길이 어린이들의 놀이터요, 풀이 우거진 봉황대나 잔디가 아름다운 왕릉이 어린이들의 생활 무대였다.
달이 밝은 보름밤이면 어린 우리들은 지칠 줄 모르고 놀음에 미쳐 버리게 되었다. 달리 놀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어린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자연 뿐이요, 달이 가까운 벗이었다. 나의 어린날의 추억 가운데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의 하나가 달빛 속에 하얗게 떠 오르는 탑이다. 그 청신하고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은 형언할 수 없었다.
우리 집에서 동쪽으로 1킬로미터쯤 나가면 분황사의 탑이 있었다. 1킬로미터나 되는 거리가 이 어린 소년에게는 가까운 것이 못 되지만 분황사가 있는 숲머리 마을에 친척이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집안 심부름이나 혹은 친척 아이들을 만나러 가기 위하여 하루가 멀다 하고 분황사 옆을 드나들게 되었다.
친척집에 가면 으례 저녁 대접을 받기 마련이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면 땅거미가 질 무렵이 된다. 분황사 옆을 지날 때는 주위의 산들이 어둠 속에 가라앉아 버린다. 그 어둑한 산을 배경으로 돋아나는 달빛 속에 속아 오르는 탑신의 아름다움은 어린 눈에도 황홀하였다. 물에서 갓 건져낸 것처럼 말고 청초했다.
만일 늦게 어머니 심부름으로 숲머리 마을로 가게 되면 크고도 둥그런 보름달이탑 꼭지 위에서 떠 오를 때도 있었다. 내가 달려가는 동안에 달은 서서히 떠 올라 탑 꼭지에 덩그렇게 얹혀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여신이 두 손을 치켜들고 광일을 받쳐 든 형상이다. 그것을 바라보며 달빛 속에 은빛과 금빛으로 모래가 빛나는 길을 달려 가게 되는 것이다.
혹은 달이 구름 속에 숨게 되면 일곱 빛으로 물들인, 안으로 환하게 밝은 그 신비로운 채운을 이마에 얹고 탑은 깊은 물 속에서 잠기듯 수상한 푸른빛을 띠는 것이다. 이 분황사 탑에 얽힌 서러운 추억을 나는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일곱 살 아니면 여덟 살 무렵이라 기억한다.
부친이 대구에 출장 가셨다가 오시는 길에 고무신을 사 오신 것이다. 당시만 해도 고무신은 구경도 못 하던 시절이다 무척 귀했다. 명절날이면 할아버지가 삼아 주시는 꽃신을 신는 것이 고작이었다. 꽃신은 왕골 속으로 단청물감을 들여 할아버지가 손자를 위하여 재주껏 삼아 주셨다. 그러던 차에 부친이 고무신을 사 오신 것이다.
팔월 한가위를 한 달이나 앞두고 사 오신 고무신을 신고 나가자 동무들이 신기한 신발을 구경하려고 나를 에워샀다. 그리고 코가 널찍하고 물렁한 신발을 서로 신어 보자고 나를 졸라대었다. 나는 껑충거리며 자랑하였다. 그러나 평생에 처음 신어 보는 자랑스러운 신발을 하루도 못 신었다.
그날 밤이었다. 보름달이 밝았다. 아이들이 마을 앞 신작로에 모여 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분황사 탑까지 갔다 되돌아 오는 마라톤을 하게 되었다. 나도 참가하였다. 하지만 신발이 문제였다. 아무리 고무신이 간편한 신발이라지만 처음 신은 것이라 불편했다. 닳을까 봐 아깝기도 했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달빛이 환한 신작로 한편 가에 나란히 벗어 놓고 뛰었다.
어수룩한 소년이기도 하였지만 누가 집어 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한길 가에 벗어 놓은 신발이 1킬로미터나 달려 갖다오는 동안에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리가 없었다.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신발을 찾아 헤메는 나의 눈에 비친 달빛은 조금 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비록 한 컬레의 고무신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가장 귀한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바로 잃어버린 것을 찾아 헤매는 원망스럽고 허전하고 안타깝고 서러운 눈에 비치는 달빛은 밝고 푸른 것만이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고, 구석마다 서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무리 찾아 보아도 있을 리 없는 고무신을 찾기에 지쳐 절망적인 눈을 들어 쳐다본 달 어린 소년의 조그만 이마 위에는 그날 밤 처음으로 허전하게 푸른 달빛의 서러운 손길이 닿게 되었을 것이다. 그 후로도 분황상에 드나들게 되고 탑신을 씻어 내리는 달빛에는 형언할 수 없는 설움이 깃들고 탑의 표정도 전과는 다르게 애수를 머금고 있었다. 참으로 한 컬레의 평생 처음 신어 보는 신기한 신발을 잃어 버림으로써 달과 달빛과 깊은 애수에 잠긴 탑의 서러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럴수록 탑은 더욱 아름답고 달빛도 한결 아름다왔다. 내가 자란 경주 지방에 전기가 들어오게 된 것은 내 나이가 7-8살 될 무렵이었다 . 어린날의 기억 속에는 멀리 무논 바닥에 어리는 비오는 해질 무렵의 불그레한 전기불의 서러운 정경이 떠 오를 뿐이었다. 혹은 어머니에게 꾸중을 듣고 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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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15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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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20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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