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무신정권기의 사회변동의 원인과 배경
3. 무신정권기에 발생한 민란
1) 망이·망소이 등 남적의 봉기
2) 김사미·효심 등의 봉기
3) 사노 만적의 항거
4. 사회변동의 의의와 결과
5. 최충헌 정권의 성립 배경
6. 최충헌 집권 이전의 행적
7. 최충헌 정권 성립
8. 최충헌 정권의 성격
9. 최충헌 정권의 한계
10. 맺음말
2. 무신정권기의 사회변동의 원인과 배경
3. 무신정권기에 발생한 민란
1) 망이·망소이 등 남적의 봉기
2) 김사미·효심 등의 봉기
3) 사노 만적의 항거
4. 사회변동의 의의와 결과
5. 최충헌 정권의 성립 배경
6. 최충헌 집권 이전의 행적
7. 최충헌 정권 성립
8. 최충헌 정권의 성격
9. 최충헌 정권의 한계
10. 맺음말
본문내용
것이다. 춘주는 예전에는 안변에 속해 있었는데 주인들이 충헌에게 뇌물을 바쳐 안양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충헌이 뇌물에 의해 지방제도의 기본단위까지 마음대로 했던 것이다. 충헌과의 친분관계로 탐학의 죄를 면한 양광도안찰사 곽공의의 일 등은 봉사 10조에서 안찰사의 횡자를 경계한 것과 좋은 대조가 된다. 이렇게 되자 충헌의 명을 사칭하여 백성들을 침해하는 자도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그가 봉사 10조에서 양부 및 여러 관위가 초과되게 되어 설하여져 녹이 부족하니 감하여 줄이고 적당하게 제수할 것을 말했지만 충헌이 오부녹사를 8품으로 승격시켜 뇌물을 받고 제수하였다.
충헌이 집권초기에 내걸었던 정책들을 시행하지 못했던 것은 최충헌 정권 자체가 1인 및 그의 거사의 소수 참여자를 위한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지방관의 공정한 지방통치와 일정한 원칙에 의한 전주권의 행사들은 국가권력이 통치의 정당성을 갖고 체계적인 명령계통을 통해 시행될 때 비로서 시행효과와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최충헌 정권의 성립 자체의 목적과 이를 얻기 위한 수단이 정권 장악을 위한 것이라는 데는 전대와 별반 다른 것이 없었으므로 발전적인 요소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최충헌 정권이 그 이전의 다른 무인 정권에 비해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요인은 독자적인 정권기구의 운영과 문신이 참여할 기회가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는 최충헌이 그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지, 그 당시 사회적인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이로 인해 고려사회는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초기의 문벌귀족이 후기의 권문세족으로 재등장하는 요인을 제공하게 된다.
10. 맺음말
지금까지 무신정권기의 민난에 대해서 몇 가지 대표적인 사례들를 통해서 알아보았다. 무신정권기는 고려사회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고려의 귀족제 사회안에서 문신들 위주의 정권을 유지해 나가면서 무신들의 위치가 약해지자 이들은 무신난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권을 만들고, 무신들끼리의 정권쟁탈을 통해서 여러 번의 무신정권을 만든다. 이런 사회적 상황속에서 농민과 천민들은 자신들의 지위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면서 많은 봉기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무신집단의 신분이 그동안의 특권집단이 아니라 새로이 소외된 집단이 정권을 잡은 상황이 농민 및 천민 집단을 자극하여 민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 그동안 경제적인 수탈로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유민이 되었는데 이것이 무신정권기에 더욱 커졌다. 그리고 중앙의 통제력이 많은 정권 쟁탈로 인하여 많이 약해져서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런 일련의 원인이 많은 민란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이것들은 가능성은 크게 보였으나 성공으로 가지는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최충헌은 무신정권 최초로 장기집권에 성공했음은 물론이고 그의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하는데 성공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것이 무신정권의 한계를 극복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정적의 제거와 단독 정치기구를 이용한 장기집권에는 성공했지만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參 考 文 獻-
《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3
《고려시대사 (下)》, 박용운, 일지사, 1987
〈高麗 武臣政權期 賤民의 亂에 對한 考察〉, 姜益株, 1984
韓國史編纂委員會《韓國史》20-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1994
《韓國史》6-중세사회의 성립, 한길사, 1994
《韓國史》7-무신정권과 대몽항쟁, 한길사, 1994
이정신《高麗 武臣政權期 農民, 賤民抗爭의 硏究》고려대 민족문화 연구소, 1991
임윤란《최충헌정권의 성립과 그 성격》이대사원, 1983
김윤곤외「고려무신정권」,《한국사》18, 국사편찬위원회, 1993.
또한 그가 봉사 10조에서 양부 및 여러 관위가 초과되게 되어 설하여져 녹이 부족하니 감하여 줄이고 적당하게 제수할 것을 말했지만 충헌이 오부녹사를 8품으로 승격시켜 뇌물을 받고 제수하였다.
충헌이 집권초기에 내걸었던 정책들을 시행하지 못했던 것은 최충헌 정권 자체가 1인 및 그의 거사의 소수 참여자를 위한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지방관의 공정한 지방통치와 일정한 원칙에 의한 전주권의 행사들은 국가권력이 통치의 정당성을 갖고 체계적인 명령계통을 통해 시행될 때 비로서 시행효과와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최충헌 정권의 성립 자체의 목적과 이를 얻기 위한 수단이 정권 장악을 위한 것이라는 데는 전대와 별반 다른 것이 없었으므로 발전적인 요소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최충헌 정권이 그 이전의 다른 무인 정권에 비해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요인은 독자적인 정권기구의 운영과 문신이 참여할 기회가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는 최충헌이 그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지, 그 당시 사회적인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이로 인해 고려사회는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초기의 문벌귀족이 후기의 권문세족으로 재등장하는 요인을 제공하게 된다.
10. 맺음말
지금까지 무신정권기의 민난에 대해서 몇 가지 대표적인 사례들를 통해서 알아보았다. 무신정권기는 고려사회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고려의 귀족제 사회안에서 문신들 위주의 정권을 유지해 나가면서 무신들의 위치가 약해지자 이들은 무신난을 통해서 자신들의 정권을 만들고, 무신들끼리의 정권쟁탈을 통해서 여러 번의 무신정권을 만든다. 이런 사회적 상황속에서 농민과 천민들은 자신들의 지위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면서 많은 봉기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무신집단의 신분이 그동안의 특권집단이 아니라 새로이 소외된 집단이 정권을 잡은 상황이 농민 및 천민 집단을 자극하여 민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 그동안 경제적인 수탈로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유민이 되었는데 이것이 무신정권기에 더욱 커졌다. 그리고 중앙의 통제력이 많은 정권 쟁탈로 인하여 많이 약해져서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런 일련의 원인이 많은 민란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이것들은 가능성은 크게 보였으나 성공으로 가지는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최충헌은 무신정권 최초로 장기집권에 성공했음은 물론이고 그의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하는데 성공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것이 무신정권의 한계를 극복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정적의 제거와 단독 정치기구를 이용한 장기집권에는 성공했지만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參 考 文 獻-
《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3
《고려시대사 (下)》, 박용운, 일지사, 1987
〈高麗 武臣政權期 賤民의 亂에 對한 考察〉, 姜益株, 1984
韓國史編纂委員會《韓國史》20-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1994
《韓國史》6-중세사회의 성립, 한길사, 1994
《韓國史》7-무신정권과 대몽항쟁, 한길사, 1994
이정신《高麗 武臣政權期 農民, 賤民抗爭의 硏究》고려대 민족문화 연구소, 1991
임윤란《최충헌정권의 성립과 그 성격》이대사원, 1983
김윤곤외「고려무신정권」,《한국사》18, 국사편찬위원회,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