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서원의 폐해
Ⅲ.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1) 만동묘의 철폐
2) 미사액서원의 철폐
3) 사액서원의 철폐와 신미존치 47개 서원
Ⅳ. 양반유림의 대응
1)서원 철폐시 상소활동 17
2)서원철폐후 복설운동 19
V. 맺음말.
Ⅱ. 서원의 폐해
Ⅲ.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1) 만동묘의 철폐
2) 미사액서원의 철폐
3) 사액서원의 철폐와 신미존치 47개 서원
Ⅳ. 양반유림의 대응
1)서원 철폐시 상소활동 17
2)서원철폐후 복설운동 19
V. 맺음말.
본문내용
렀는데 끝내 어찌했는지 모르겠다.
丁巳年 4월 20일. 맑음. 仁山書院을 배알했다. 서원은 宋時烈을 독향하는 곳이다. 좀이 얼굴을 범하고 건물은 퇴락하였다. 자못 서원 재산이 있다고 하는데 이 같으니 원유들이 존경하고 받들지 않는 마음은 곳곳이 같아 祈文의 운수가 어찌 될까. 宋達洙, 1857 《 守宗齋集 》 권8 雜著 南遊日記
이는 송시열의 후손인 宋達洙가 1857년 경상도에 있는 송시열을 모신 서원을 둘러보고 쓴 기록이다. 원임이나 유생들이 서원에 대한 관리와 운영을 소흘히 하고 있음을 낱낱이 지적하고 있다. 경상도에서 유생들이 노론의 힘을 빌려 송시열의 서원을 세우기는 하였지만 서원이 흔해지고 또 사회적 영향력이 위축되어 가는 상황에서 운영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서원권위의 추락과 여러 폐단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이어졌고, 이것이 강제적이고 물리적인 조치였지만 그 시기를 앞당긴 것에 불과했다. 대원군 下野 후 일부 서원이 복설되기도 하였지만 이전 수준으로 경제력을 회복하고 양반들의 향촌기구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Ⅲ. 興宣大院君의 書院撤廢
1) 萬東廟의 撤廢
高宗代 서원의 철폐논의는 원년 4월에 大王大妃의 전교로 시작되었다.
대왕대비가 각 고을의 서원, 향현사, 생사당 및 원사 소속의 결총과 보액을 소상히 기록하여 일일이 보고할 것을 명령하였다. 《 日省錄 》, 編 65 고종 원년 4월 22일.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서원이 면세 결수와 원보의 정액을 준수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으나 서원의 실상을 파악하고 정리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이러한 명령은 의정부 관문으로 작성되어 팔도의 감사와 각 유수관에게 하달되었다. 속히 보고하라는 재촉 속에 3개월 뒤에 보고가 완료되었다. 그러나 보고 내용에 상세함의 차이가 있으니 예조에 있는 서원명단을 참고하고, 해당 도에서 다시 보고토록 한 것을 근거로 의정부에서 첩설을 줄이고, 私設은 철폐하도록 결정하라고 명령했다.
禁令 이후에 疊設되고 사설된 서원을 가려서 철폐 여부를 결정지으라는 대왕대비의 명령을 받은 의정부에서는 20여일 뒤에 서원신설의 금지와 원보의 군정 수괄이라는 고식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대신들의 의견이 그러하니 우선 이에 따를 수밖에 없었으나 서원을 어떤 형태로나마 정리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운 대원군은 대비마마의 전교를 빌어 서원 정리의 빌미를 마련해 놓았다. 그 내용은 서원을 빙자하여 평민들을 침학하는 사류들의 고발, 賜額書院의 자비전 3결 면세, 원생과 원보의 정액 준수, 관봉하는 제수의 금지, 福酒村의 폐지, 그리고 서원 첩설과 사설의 금지 등이었다. 그런 다음 서원의 사회적 폐단과 경제적 폐단을 겨냥하면서 금지 조치를 곧바로 적용하였다. 그것이 바로 萬東廟의 철폐였다.
고종 2년 3월 29일에 대왕대비는 만동묘를 없앤다는 전교를 내렸다. 宋時烈의 유명으로 만동묘를 세웠지만 肅宗 때에 이미 大報壇을 세웠으니 만동묘는 바로 첩설에 해당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만동묘의 지방위와 편액을 대보단 敬奉閣으로 옮겨 대보단의 제향으로 합쳐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승지를 예관으로 만동묘에 보내 祭禮를 올리게 하고 대신을 보내 지방과 편액을 가져오도록 하여 끝까지 예우를 다하는 모습을 보이도록 하였다. 하지만 철폐는 대보단에서 계속 제례를 이어갈 것임을 내보인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만동묘를 첩설이라는 구실을 붙여 철폐한다는 것은 선왕의 유지와는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도 첩설된 서원과 사회적으로 폐해를 일으키는 서원들은 경중을 가리지 않고자 하는 의지를 분명히 들어낸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원군의 만동묘 철폐이유는 무엇일까? 노론에 대한 대원군의 공격 이였다는 견해가 있다. 또는 대원군이 만동묘에서 당한 모욕 때문일 수도 있다. 김윤곤, 2000 < 흥선대원군의 행정사상 연구 >,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p.105
흥선군 시절에 화양서원을 찾아 萬東廟의 광경을 참관하던 중 무심코 부채를 손에 든 채 정면석계를 올라갔다가 유생과 원복들에게 질책·봉욕을 받은 적이 있다.
또는 남인을 등용하고, 노론의 세력을 억제하려는 하나의 실례로 송시열의 유명으로 건립된 만동묘를 철폐한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김세윤, 1990 <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 관한 일고찰 >, 서강대학교 석사학위논문, p.22
그러나 정치적 의도 여부를 떠나 만동묘의 철폐는 서원을 없애 민생의 회복을 도모하겠다는 대원군의 구상이 단계적으로 실행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림들은 만동묘는 명에 대한 再造之恩의 보답인데 이를 없앤다는 것은 춘추의리의 포기이고 국가기강의 훼손이라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나서 워낙 커다란 유림의 문제이었기에 집단 상소키로 결정을 하였다. 고을 단위가 아닌 도 단위로 儒會를 열고 대응을 논의하였다. 그해 6월에 華陽書院이 주동이 되어 7월 20일에 도회소에 모여 의제를 정하고 상소를 완성하자는 내용의 통문을 각 서원과 향교에 돌렸다.
호남과 영남에서도 유생들이 통문을 돌리고 유회를 열 것을 결정하였다. 호남에서는 錦山 從容祠에서 각 서원에 통문을 발송하였다. 8월 그믐에 礪山에 있는 竹林書院에 모여서 의견을 모아 상소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를 위해서 큰 고을에 5명, 작은 고을은 3명, 그리고 향교에서는 1명의 유생을 보내오되, 올 때 고을 유생들의 이름을 함께 가지고 오게 하였다.
각 지역에서 유회를 열고, 상소를 작성한 유생들은 상경하였다. 고종 2년 7월에는 충청도 유생 833인이, 11월에는 경상도 유생 1,468명이, 같은 11월에는 전라도 유생들이 각각 상소하였다. 윤희면, 2004 《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 집문당, p.152
경상도 유생들은 고종 2년 9월 5일에 興巖書院이 주동하여 문경향교에서 영남도회를 열었다. 만동묘 철폐에 항의하는 내용의 상소를 작성한 영남의 유림들은 100여 명이 10월 6일 서울에 들어와 소청을 열고 궁궐의 분위기를 탐지하였다. 대원군이 사화를 바라지 않으며 영남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말을 전하고, 사람들을 문경에 보내 유생들이 도회를 하는데 作弊를 하였는지 탐지케 하고 이를 빌미로
丁巳年 4월 20일. 맑음. 仁山書院을 배알했다. 서원은 宋時烈을 독향하는 곳이다. 좀이 얼굴을 범하고 건물은 퇴락하였다. 자못 서원 재산이 있다고 하는데 이 같으니 원유들이 존경하고 받들지 않는 마음은 곳곳이 같아 祈文의 운수가 어찌 될까. 宋達洙, 1857 《 守宗齋集 》 권8 雜著 南遊日記
이는 송시열의 후손인 宋達洙가 1857년 경상도에 있는 송시열을 모신 서원을 둘러보고 쓴 기록이다. 원임이나 유생들이 서원에 대한 관리와 운영을 소흘히 하고 있음을 낱낱이 지적하고 있다. 경상도에서 유생들이 노론의 힘을 빌려 송시열의 서원을 세우기는 하였지만 서원이 흔해지고 또 사회적 영향력이 위축되어 가는 상황에서 운영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서원권위의 추락과 여러 폐단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이어졌고, 이것이 강제적이고 물리적인 조치였지만 그 시기를 앞당긴 것에 불과했다. 대원군 下野 후 일부 서원이 복설되기도 하였지만 이전 수준으로 경제력을 회복하고 양반들의 향촌기구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Ⅲ. 興宣大院君의 書院撤廢
1) 萬東廟의 撤廢
高宗代 서원의 철폐논의는 원년 4월에 大王大妃의 전교로 시작되었다.
대왕대비가 각 고을의 서원, 향현사, 생사당 및 원사 소속의 결총과 보액을 소상히 기록하여 일일이 보고할 것을 명령하였다. 《 日省錄 》, 編 65 고종 원년 4월 22일.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서원이 면세 결수와 원보의 정액을 준수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으나 서원의 실상을 파악하고 정리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이러한 명령은 의정부 관문으로 작성되어 팔도의 감사와 각 유수관에게 하달되었다. 속히 보고하라는 재촉 속에 3개월 뒤에 보고가 완료되었다. 그러나 보고 내용에 상세함의 차이가 있으니 예조에 있는 서원명단을 참고하고, 해당 도에서 다시 보고토록 한 것을 근거로 의정부에서 첩설을 줄이고, 私設은 철폐하도록 결정하라고 명령했다.
禁令 이후에 疊設되고 사설된 서원을 가려서 철폐 여부를 결정지으라는 대왕대비의 명령을 받은 의정부에서는 20여일 뒤에 서원신설의 금지와 원보의 군정 수괄이라는 고식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대신들의 의견이 그러하니 우선 이에 따를 수밖에 없었으나 서원을 어떤 형태로나마 정리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운 대원군은 대비마마의 전교를 빌어 서원 정리의 빌미를 마련해 놓았다. 그 내용은 서원을 빙자하여 평민들을 침학하는 사류들의 고발, 賜額書院의 자비전 3결 면세, 원생과 원보의 정액 준수, 관봉하는 제수의 금지, 福酒村의 폐지, 그리고 서원 첩설과 사설의 금지 등이었다. 그런 다음 서원의 사회적 폐단과 경제적 폐단을 겨냥하면서 금지 조치를 곧바로 적용하였다. 그것이 바로 萬東廟의 철폐였다.
고종 2년 3월 29일에 대왕대비는 만동묘를 없앤다는 전교를 내렸다. 宋時烈의 유명으로 만동묘를 세웠지만 肅宗 때에 이미 大報壇을 세웠으니 만동묘는 바로 첩설에 해당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만동묘의 지방위와 편액을 대보단 敬奉閣으로 옮겨 대보단의 제향으로 합쳐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승지를 예관으로 만동묘에 보내 祭禮를 올리게 하고 대신을 보내 지방과 편액을 가져오도록 하여 끝까지 예우를 다하는 모습을 보이도록 하였다. 하지만 철폐는 대보단에서 계속 제례를 이어갈 것임을 내보인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만동묘를 첩설이라는 구실을 붙여 철폐한다는 것은 선왕의 유지와는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도 첩설된 서원과 사회적으로 폐해를 일으키는 서원들은 경중을 가리지 않고자 하는 의지를 분명히 들어낸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원군의 만동묘 철폐이유는 무엇일까? 노론에 대한 대원군의 공격 이였다는 견해가 있다. 또는 대원군이 만동묘에서 당한 모욕 때문일 수도 있다. 김윤곤, 2000 < 흥선대원군의 행정사상 연구 >,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p.105
흥선군 시절에 화양서원을 찾아 萬東廟의 광경을 참관하던 중 무심코 부채를 손에 든 채 정면석계를 올라갔다가 유생과 원복들에게 질책·봉욕을 받은 적이 있다.
또는 남인을 등용하고, 노론의 세력을 억제하려는 하나의 실례로 송시열의 유명으로 건립된 만동묘를 철폐한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김세윤, 1990 <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 관한 일고찰 >, 서강대학교 석사학위논문, p.22
그러나 정치적 의도 여부를 떠나 만동묘의 철폐는 서원을 없애 민생의 회복을 도모하겠다는 대원군의 구상이 단계적으로 실행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림들은 만동묘는 명에 대한 再造之恩의 보답인데 이를 없앤다는 것은 춘추의리의 포기이고 국가기강의 훼손이라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나서 워낙 커다란 유림의 문제이었기에 집단 상소키로 결정을 하였다. 고을 단위가 아닌 도 단위로 儒會를 열고 대응을 논의하였다. 그해 6월에 華陽書院이 주동이 되어 7월 20일에 도회소에 모여 의제를 정하고 상소를 완성하자는 내용의 통문을 각 서원과 향교에 돌렸다.
호남과 영남에서도 유생들이 통문을 돌리고 유회를 열 것을 결정하였다. 호남에서는 錦山 從容祠에서 각 서원에 통문을 발송하였다. 8월 그믐에 礪山에 있는 竹林書院에 모여서 의견을 모아 상소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를 위해서 큰 고을에 5명, 작은 고을은 3명, 그리고 향교에서는 1명의 유생을 보내오되, 올 때 고을 유생들의 이름을 함께 가지고 오게 하였다.
각 지역에서 유회를 열고, 상소를 작성한 유생들은 상경하였다. 고종 2년 7월에는 충청도 유생 833인이, 11월에는 경상도 유생 1,468명이, 같은 11월에는 전라도 유생들이 각각 상소하였다. 윤희면, 2004 《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 집문당, p.152
경상도 유생들은 고종 2년 9월 5일에 興巖書院이 주동하여 문경향교에서 영남도회를 열었다. 만동묘 철폐에 항의하는 내용의 상소를 작성한 영남의 유림들은 100여 명이 10월 6일 서울에 들어와 소청을 열고 궁궐의 분위기를 탐지하였다. 대원군이 사화를 바라지 않으며 영남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말을 전하고, 사람들을 문경에 보내 유생들이 도회를 하는데 作弊를 하였는지 탐지케 하고 이를 빌미로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