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기∼6.25무렵의 부산의 역사와 생활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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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미군정기∼6.25무렵의 부산의 역사와 생활에 대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일본인의 철수와 귀환동포
■해방과 미군정기
■구포 시랑골의 돌산
■1950년대의 교육시설

본문내용

의 피를 빨아 축재한 일본인 거부들이 그동안 모은 재산을 일본으로 빼돌리느라 허둥대는 꼴도 이 시기의 한 단면이었다. 일본인의 철수와 동포의 귀환에서 부산은 관문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귀환 동포 가운데 상당수가 부산에 잔류하였기 때문에 해방 후 부산지역 사회에서 귀환 동포문제는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
일본 군인과 민간인의 철수는 미군정의 지원 아래 일본인 민간기구인 세화회가 담당하였는데, 원칙적으로 부관연락선에 한정하고 밀항선의 이용은 일절 금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일 뿐 실제로 많은 일본인들이 밀항선으로 철수하였다. 왜냐하면 미군정은 일본인이 철수하면서 가져갈 수 있는 물품으로 개인 소지품과 약간의 식량 및 의료품만 허락하였고 일반 물자의 반출을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부관연락선에는 조선인 치안대가 일일이 검문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치부한 재물을 싣고 가지 위해서는 밀항선을 이용해야 했던 것이다.
일제의 패망이 전해지자 일본인들은 닥치는 대로 물건을 내다 팔아 현금을 만들기에 동분 서주하였다. 특히 조선 사람의 피와 땀을 쥐어짜 엄청난 재부를 축적한 거부들의 경우 그동안 모았던 주택, 토지, 어장과 같은 부동산을 처분하느라 더욱 혈안이 되었다. 팔 수 있는 것은 팔고, 그러지 못한 것은 연고자에게 관리권을 넘겼는데 기가 막힌 것은 이들에게 “다시 돌아 오겠다. 그때까지 잘 지켜 달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각서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안될 때는 집 아래에 돈 항아리를 파묻어둔 경우도 있었다.
러일전쟁의 포화 속에서 일개 상점의 점원으로 한국에 와서 김해등지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여 부산 최대의 갑부가 된 하자마 보타로는 일본으로 돌아갈 때 10여 척의 배에 귀중품과 곡물을 가득 실어 날랐다고 한다. 거제도를 거점으로 전국의 선박과 어장을 손에 거머쥐고 있던 가쓰이 겐타로가 야음을 틈타 밀선을 동원하여 일본으로 실어 나르던 상자에는 엄청난 양의 골동품과 문화재가 수두룩하였다. 고리대금업자 오이케 다다스케, 삼화고무 사장 요네쿠라 쇼타처럼 현금을 가마니떼기로 싣고 가기도 하였다. 이도 저도 할 수 없게 된 때에는 식량과 중요 물자를 바다에 내던지는 만행을 저질렀고 마산에서는 역전에서 일본군이 시민이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조선은행권 지폐를 불사르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이 싣고간 재물과 곡물은 모두 조선인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고스란히 해방 조국의 건설에 바쳐져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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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2.20
  • 저작시기2005.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28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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