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가에 대해 조사하고 토지반환소송과 재산환수특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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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완용가에 대해 조사하고 토지반환소송과 재산환수특별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이완용의 조상
1. 이완용의 친부 이호석 집안
2. 이완용의 양부 이호준 집안
3. 이호준의 처세술,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이완용
4. 매국노 이완용의 시작점
Ⅱ. 이완용
1. 출생부터 정계입문까지
2. 육영공원 입학부터 아관파천에 이르기까지
3. 독립협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4. 이완용의 재산형성
Ⅲ. 이완용 家의 친일행적
1. 이완용 家 관련 친일인물
Ⅳ. 후손들의 ‘재산반환소송’ 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 특별법'
1. 이완용 家 후손들의 ‘재산반환소송’
2. 친일파 후손 토지반환소송의 현주소 및 친일반민족 행위자 재산환수 특별법
※ 참고문헌

본문내용

다 이호준은 고종의 등극에도 무시못할 공을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배경으로 이호준은 1863년 고종 등극과 함께 벼락 출세를 하게 된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전 그의 경력은 평안남도 강서와 임천의 군수를 지낸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고종 등극 다음해에 44세라는 늦은 나이로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하면서 일약 중앙 정계의 샛별로 떠오른다. 홍문과 수찬을 시작으로 동부승지, 이조참판, 전라도 관찰사, 규장각 직제학을 거쳐 과거 급제 10년여만에 형조판서에 이르게 된다. 이후 그는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민씨 척족이 권력을 독점하던 시기에도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정1품 중추원 의장에 오른다.
3. 이호준의 처세술,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이완용
고종 재위기간은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경장, 민비시혜, 아관파천과 같은 정치적 사변이 끊이지 않던 격동의 시기였다. 이런 격동의 시기를 살면서 이호준만은 이와 같은 정치적 사건에 단 한 번도 휘말리지 않았으며, 무려 30년 이상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평탄한 벼슬살이를 했다. 이로 미루어 그는 처세의 달인 중에서도 가히 입신의 경지에 이른 달인이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완용 역시 20여년 동안 조선왕조에서 벼슬살이를 했지만 단 한 차례도 감옥에 가거나 귀양살이를 한 적이 없다. 이것은 이호준의 7대조 이상과 6대조 이만성이 연달아 당쟁에 휘말려 옥사한 것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조상들의 이런 참화가 그들 부자를 보다 기회주의적인 처신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이호준은 본래 대원군 계열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대원군과 민비의 20여년에 걸친 극한 권력투쟁의 와중에서도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처가가 민비와 같은 집안인 여흥 민씨였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4. 매국노 이완용의 시작점
1926년 2월 13일, 이완용이 사망한지 사흘째 되던 날 당시 <동아일보>는 그의 죽음과 관련해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 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애당초 대가의 양자로 들어가지 않고 시골에서 땅이나 파다가 말았더라면 매국노 소리는 듣지 않게 되었을 것” 이라고 썼다. 그가 매국노의 오명을 남기게 된 인생의 전기는 명문가로의 입양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Ⅱ. 이완용
1. 출생부터 정계입문까지
이완용은 1858년 6월 7일 오후 1시쯤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우봉 이씨 집안의 가난한 선비 이호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완용은 동족으로부터 매국노라고 욕은 얻어먹었지만 생전에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온갖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걸친 ‘행운아(?)’ 였다. 이완용은 6살 때 아버지 이호석에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워낙 초명해서 몇 달만에 다 마치고 이어 동몽선습을 배웠다. 7살에 효경, 8살에 소학을 끝내 주위에서 모두 놀랍게 여겼다. 총명한데다 배우기를 좋아해서 밤에 곤하게 잠을 자다가도 아버지가 일으켜 세워 어느 구절 을 외워보라고 하면 입에서 줄줄 흘러나왔다고 한다.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의 가난한 시골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이완용은 10살 되던 1867년 4월 20일 같은 집안의 먼 친척인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이날 이완용은 서울에서도 양반 벼슬아치 동네로 소문난 안국동의 이호준 집에 들어가 양부모에게 인사를 드린다.
이완용을 양자로 들일 때 이호준의 나이는 47세였다. 그때 이호준에게는 평양 기생에게서 낳은 14살짜리 아들 윤용이 있었으나 서자에게는 집안의 대를 잇게 하지 않는 당시의 관례에 따라 양자를 들인 것이다. 그 당시 이호준은 예방승지로서 고종을 측근에서 모시고 있었다.
이완용은 입양 직후 시골 출신인 그가 서울의 명문대가 자제들에 비해 촌스럽게 굴고 또한 멸시를 받았었다. 이완용은 말수가 대단히 적고 목소리는 낮았으며 말은 반드시 생각한 후에 아주 천천히 신중하게 했다. 그가 이처럼 말이 없었던 것은 원래 성격 탓도 있겠지만 어린 나이에 양자로 들어가게 된 환경변화가 더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완용은 입양 다음해부터 본격적인 과거 준비에 들어간다. 이호준은 그의 재주에 크게 기대를 걸었음인지 이완용의 교육에 대단한 정성을 쏟고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의 교육에 대한 투자는 훗날 이완용이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날리는 밑바탕이 되었다.
13세 되던 3월에 그보다 한 살 위인 양주 조씨 조병익의 딸과 혼인했다. 21세부터는 평안북도 태천군의 유명한 선비 박세익을 초빙해서 수년간에 걸쳐 시경 서경 주역 등 3경을 반복해서 강습 받았다. 이 사이 그의 생부 이호석과 양모 민씨가 차례로 사망했다.
이완용은 마침내 25세 되던 1882년 10월 24일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한다. 이완용이 과거에 급제했을 당시 이호준의 벼슬은 이조판서였다. 이완용이 합격한 증광별시는 민씨 척족이 청나라 군대를 등에 업고 권력을 다시 장악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실시한 과거였다.
과거급제 증서를 수여하던 11월 2일, 고종은 경복궁 인정전에 나와 친히 수여식을 거행하고 특별히 이완용의 집에 궁중의 악공을 보내서 급제를 축하하는 음악을 연주해주도록 지시한다. 문무과 급제자 십수명 가운데 국왕으로부터 이런 은혜를 입은 행운아는 몇 명 되지 않았다. 이호준과 그 아들 이완용에 대한 왕실의 각별한 총애와 관심을 반영하는 특별배려였던 것이다.
든든한 집안 배경에다 과거까지 합격했으니 이제 이완용의 출세는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고종 등극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고 실권을 쥐고 있는 민씨 척족은 그의 외가나 다름없다. 거기에다 그는 민비의 생환을 축하하기 위해 실시된 과거에 합격했으니 민비의 각별한 총애를 받을 조건을 다 갖추게 된 셈이다.
이완용은 과거에 합격한 지 4년만인 1886년 3월 24일 규장각대교로 임명되어 관직의 길에 들어선다. 이 시기는 원세개가 조선 정계를 호령하고 있던 때였다. 관직에서 나온 지 두 달도 안되는 4월 12일, 이완용은 홍문관 관리 10명과 함께 연명으로 갑신정변의 잔당인 신기선 등을 엄하게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완용은 그보다 8일전에 규장각 대교에서 홍문과 수찬으로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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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2.21
  • 저작시기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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