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구 설화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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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랑구 설화 조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중랑구 설화의 특징
2. 중랑구 설화 수록
3. 설화 조사를 마치며...

본문내용

그 자라는 한탄강에다가 갖다 버렸어요.
제보자 : 정정순 (1933년생, 여) 신내동 신내구립노인정, 2001. 11. 12
<면목동의 느티나무>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 주변(1272번지에 있는)이 꽤나 넓어요. 옛날 조선시대 때만해도 그 느티나무를 위했는데, 일년에 한 두 번씩 떡을 해놓고 제사를 지내고 했는데, 명절 때는 동네사람들이 느티나무 주변에서 윷놀이도 하고, 그 주변에 소나무들이 이~따만 한게 여러 개가 있었는데, 거기다가 그네를 매고 여자들이 그네를 타기도 하고, 그러던 데여 거기가. 그 땅은 말이지 면목동에서 제일 부지네 땅이었어. 그래서 일년에 두 세 차례씩 남사당패들이 동네로 찾아들면 그 느티나무 주변에서 농악놀이두 하며, 신기한 재주도 부리고 그랬던 데여 거게가. 옛날에는 토박이들이 그래서 나무를 위했던 거여.
그 땅주인도 나에게 땅을 팔면서 나무는 파는 게아니여. 나무는 건드리지 마라, 위하는 나무니께... 그리고 3. 1 만세 때에는 인근 마을 사람들이 거기 모여서 만세를 부르던 데여. 그 유명한 손병희 오른팔이었던 최성환 등 대 여섯 사람이 잡혀갔어. 여기가 아주 유명하던 만세 장소여. 거 폭탄 제조기술자였던 안흥기씨는 붙잡혀가서 손목이 잘라나간 뒤 얼마 있다가 죽었어요. 죽었어.
3.1 만세와 독립운동 진원지여. 거기 표셕이라도 느티나무 아래에 세워야 하는 곳이지요. 거기가 지금은 뭐- 정자 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지? 거기가 양지말(그래서 면목동을 양지말이라고도 함)이라는 데여.
양지말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애깨산 [아차산]을 바라보게 되지. 햇살이 환하게 비추니께. 그 동네 사람들은 얼굴색이 훠~원 허고, 그 저쪽 응달말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검억산 [용마산]을 쳐다보게 되어. 그래서 항상 얼굴이 그늘져 보여 옛날에는 용마산을 검역산이라고 했거든. 이 동네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어요.
지금도 동네 사람들이 그 느티나무를 위해서 그런지, 아~무도 손을 못대어. 위하는 나무거든.
* 음악 선생. 기억력이 대단히 좋은 편이며, 자신이 보았던 이야기
<도당>
봉화산 올라가는 길에 도당이 있어요. 저 꼭대기에. 일년에 한번씩 꼭 제사를 지내요. 도당제. 그 도당을 지키는 집 할머니가 있어요. 그래서 거기를 항시에 도당제를 해서 ( 음력 3월 30일날) 몇월 몇일에 합니다 라고 써 놓으면 신내동 왠만한 사람들은 다 올라가지.
봉화산이 그렇게 좋은 산이에요. 봉화산이 신내동 사람만 올라가는게 아니라, 이 봉화산이 가운데 있으면 저기 저 상봉동, 면목동, 중화동, 신내동 각각 그 길이 산을 하나 놓고 다 있어서 한 길로 가는게 아니라 각각 자기 동에서 올라가는 거야. 지금은 나는 안 올라가서 모르는데 지금 운동기구를 만들어 놨다고 하더라구. 그런 숙제를 하면서 돌아다니는 사람이면, 노인정만 다닐게 아니라 봉화산 올라가봐.
- 신내 9단지 노인정 할머니방에서 채록
12. 효행 충성담
a. 부모에 대한 효행
<중랑이야기>
← 현재 중랑천 모습
조선시대에는 중랑천 근방에 국립여관인 송계원이 있었기 때문에 중랑천을 송계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송계교를 석교로 개축할 때 인근 마을의 장정은 모두 부역으로 동원되었는데 열여섯살 되는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홀아비 장님 중이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를 안 딸은 아버지 대신 부역을 하겠노라고 관아를 찾아가 여러날을 지내며 대신 부역시켜줄 것을 간청하자 부역허가가 떨어졌는데 반드시 남장 을 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관아에서 시키는대로 남장을 하고 참여했으나 문제는 생리현상이 었습니다. 전전긍긍하던 그녀는 대나무를 잘라서 옷속에 넣어 관을 통해 서서 배뇨를 할 수 있게하고 가능한한 수분섭취를 줄여서 배뇨 횟수를 줄이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이런 눈물겨운 사연을 전해들은 관아에서는 마침내 중이의 부역을 해제함 으로써 부역을 대신하던 그녀의 딸도 눈먼 아버지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 습니다.
남자인줄로만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 그를 중낭자(仲郎子)라고 불렀으나 그가 사실은 남장여인이라는 것을 알고난 다음부터는 그녀를 중랑(仲狼)이라 불렀고 다시 중랑(中浪)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중랑구청 홈페이지에서..
<태조 이성계 무덤에 쓴 떼를 함흥에서 옮겨왔다는 전설>
이성계가 둘째 아들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고 죽잖아요. 그 무서운 임금 말이에요. (태조 이방원을 말하는 것 같음.) 그런데 이성계가 고향에 가서 죽었는데, 거기다가 임시로 묘를 만들어 묻었다가 이리로 옮겨 왔다나 봐요.
그때 그 무서운 아들이 임금이 되어서 효도한답시고 함흥에서 떼를 한 사람에 두 장씩 주어서 이곳까지 날라 와서 그걸로 무덤을 만들었대나 봐.
그때 함흥에서 여기까지 사람들이 나래비로 서서 두 손으로 이렇게 떼를 전달해 와서 동구릉까지 옮겼다니 참 대단한 권력이지요. 아, 그때는 죽으라면 죽어야지 뭐 별 수 있나요?
이 얘기는 우리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이 동네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것이여.
무덤에 쓸라치면 떼 장을 옮겨오면 자연히 흙도 붙어 오게 마련이지. 그렇게 생각해보면 떼 장을 옮겨온 것이 정확할 거에요.
『중랑구의 설화』
b. 烈女 (열녀)
c. 나라에 대한 충성담
<양원리(養源里)의 유래>
양원리(養源里)는 양원리(良源里)라고도 한다.
태조 이성계가 건원릉을 정하고 돌아오다가 갈증이 심하게 났으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물 마실만한 곳이 없었는데 지금의 송곡여자중고등학교 뒤편에 돌로 쌓는 샘물이 있어 신하들이 그 물을 떠다 바쳤다. 물맛이 얼마나 좋았던지 태조는 몇 번이나 그 물을 떠오게 하여 마신 후
“참 좋은 물이구나.”
하면서 양원수(良源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좋을 양(良)’자가 기를 양(養)으로 글자가 바뀌어졌다.
태조가 이름 지은 양원수에 따라 마을이름도 양원리가 되었다.
양원수 샘물은 그 뒤 우물의 형태를 갖추었고 양원리 뿐만 아니라 입암리증으로 그토록 마시고 싶어했던 물 한 그릇도 국법에 어긋난다 하여 올리지 모했던 그는 이른 봄 바람결에 흩날리는 배꽃에 단종의 넋이 깃들어 있다 여기고 해마다 단종이 승하한 날이 되면 자신이 가꾼 배나무에서 수확한 배를 한 바구니 가득 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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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2.24
  • 저작시기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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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29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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