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불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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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주 불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리포트를 시작하며...

■ 경주 불국사 (상)

■ 경주 불국사 (하)

■ 리포트를 마감하며...

본문내용

보탑의 돌사자 나머지 한쌍중 비교적 상태가 좋은 것이 또 도난당하고 마는데 이것 역시 언제 누구에 의해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그나마 남아있는 돌사자는 얼굴에 상처가 난 덕에 제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1924년 일제는 불국사에 대한 대대적인 개수 공사를 실시하였다. 공사내역은 석축과 석교의 복원, 법당의 중수 그리고 다보탑의 전면 해체작업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공사관계 기록이나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 이로인해 1970년 복원공사때 1924년 변형시켜놓은 원상을 바로 잡느라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1924년 개수공사로 폐허는 면하였지만 결정적으로 다보탑 해체 수리에서 피해를 보았다. 다보탑에 분명히 들어있어야 할 사리장치가 사라진 것이다.
1924년 불국사 개수공사 때의 일화로는 석축을 보수하면서 장대석으로 엮은 네모칸에 자연석을 끼운다는 것이 역시 일본인의 솜씨답게 반듯반듯한 돌로 짜 넣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꾀한 석축이 인공적인 맛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개수공사로 왜색이 짙어졌다는 악평이 일어나자 할수없이 끼운돌의 모퉁이를 망치로 깨뜨려 자연석 느낌이 나도록 한 것이다. 원래 우리나라는 자연미를 강조하였고 일본은 인공미를 강조한다고 한다. 무위의 사물들만 보아도 우리나라의 물건은 나무의 결이 있으면 이것을 사리는데 반해 일보의 경우는 여기다가 페인트칠을 하든지 가공을 해서 인공적으로 바꾸었다.
한동안 큰일없이 보내던 불국사가 1966년 9월 석가탑이 지진으로 흔들렸다는 신문보도가 나오면서 이것이 곧 불국사가 세인의 큰 주목을 받는 연이은 사건의 시발점이 되었다.
1966년 9월의 도굴훼손
1966년 9월 단시 중앙일보의 기사를 보면 ‘불국사 대웅전 앞에 있는 국보 제 21호 석가탑이 지난 8월 29일 밤 동해남부 일대에 있었던 미진으로 흔들려 탑이 6도가량 남쪽으로 기울어 졌으며 탑신 4개처가 떨어지고 2층 갑석 하단부가 균열됐음이 8일 현지조사에서 돌아온 도교육위원회에 의해 밝혀졌다’ 그리고 5일뒤인 9월 13일자 신문에는‘ 석가탑 훼손 원인을 둘러싸고 문화재관리위측의 조사단과 현지, 불국사측의 견해가 엇갈려 주목을 끌고 있다. 문화재보존위원회 황수영 교수와 문교부 임봉식 문화재과장 등 일행은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의 현지조사끝에 훼손원인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사리를 탐낸 도둑의 소행이라고 하여 치안국은 13일 상오 불국사 석가탑을 파손한 도둑이 있다는 정보에 따라 치안국 수사지도 과장을 경주에 급파, 수사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9월 19일에 도굴범을 잡았다는 경찰의 검거 발표가 있었는데 이튿날 시문에는 ‘국보 도둑의 시말’이라는 제목과 함RP 수사의 진행과정과 도굴행각을 상세한 해설 기사로 싣고 있다. 그 내용인즉 범인들은 9월3일 밤 석가탑하층을 들어올리려다 잭의 힘이약해서 실패하자 이튿날 다시 10톤짜리 공기압축 잭을 대구에서 날라다 1층탑을 들어 올렸고 9월5일에 2층탑을 들어올려 손으로 더듬어 보았는데 사리가 없어 실패했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나 어느 곳을 가도 도굴꾼들은 항상 있었고 그들로 인해 지리를 지키지 못한 소중한 문화재들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에만 급급하여 공동의 이익을 무시해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있음으로 우리불국사도 많은 유물들을 잃었다는게 원통하다.
1966년 10월의 파손
이후 문화재 관리국은 석가탑을 원상태로 복원하기위해 정문가로 문화재 보수단을 편성했고 10월 13일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13일 석가탑 복원공사중 들어올렸던 2층 옥개석이 떨어져 미리 밑에 내려놓았던 3층 탑신마저 부서뜨린 것이다. 이날 사고광경을 바라보던 불국사 노승들은 흐느끼며 비통한 심정을 누르지 못하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날 석가탑을 해체하는 데 쓴 연장이 고작 전봇대와 장대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기사는 다음과 같다. ‘7.5톤짜리 2층 옥개를 간신히 들어올린 도르레는 중량을 지탱못해 부서져 버렸다 이때 2층 옥개가 20센티 들렸다가 주저 않았다. 공사는 이런상황에서 강행이 두 번, 2층 옥개가 두 번째 들려졌을 때 이미 휘어졌던 전봇대(당시 전봇대는 나무로 되어있었다)가 부러지면서 바윗덩이 같은 2층 옥개석이 공중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땅에 이미 내려놓았던 3층 옥개석 위에 그것은 비스듬히 떨어지며 상처를 냈다.’
참으로 어이없게도 도굴당할 당시 사용한 장비가 10톤짜리 잭인데 어떻게 문화재 수북에 필요한 특수 장비가 고작 전신주와 장대란 말인가. 우리가 우리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데 정작 복원공사에는 특수 장비하나 사용하지 않았다는데 어이가 없고 과연 그들이 진심으로 우리 문화제를 사랑하는지 의심이 간다.
천하의 보물-석가탑 사리장치
탑이 깨지기 2시간 전에 2층 탑신부에서 발견한 사리장치는 국보급안 정도가 아니라 세계적인 보물로, 세기의 대 발견이었다. 이와 관련기사로 ‘최근 탑 도굴단의 도량으로 일반의 관심을 모았던 불국사 석가탑의 사리 장치가 온전히 간직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석가탑의 해체결과 신라예술의 정수요 동양미술사상의 한 극치인 석가탑 사리장치의 발견으로 신라문화제에 모인 군중은 석가탑 손괴의 충격과 새 국보 발견의 환희로 착잡한 감동에 사로잡혔다’
여기서 사리장치의 구조를 한번 들어보자 ‘탑신 복판 사방 41cm, 길이 18cm의 사리공에는 파란 녹으로 덮인 금동제 사리함이 둘리고 그 둘레에는 목제소탑, 동경, 비단, 향목, 구술 등이 가득한 채 둘레에 천년 유황이 번졌다. 네모반듯한 청동외합은 석가탑의 그것처럼 장중한 균형미를 갖춰 국내외에서 발견된 사리장치중 최고의 예술품임이 확인되었다. 제 3사리병은 비단으로 겹겹이 싼 높이4cm의 은 항아리 속에 순금종이로 감싼 콩알만한 은제합 속에 진신사리를 간직한 보기드문 희귀한 것이었다. 위의 세 사리함에서 나온 사리는 모두 48과였다. 이밖에 비단으로 싼 목판용 불경은 폭 8cm, 길이 5cm의 다라니경으로서 한지에 한문이 총총히 박힌 것을 볼 수 있어 이는 우리나가 최고의 인쇄 문화를 말하는 귀중한 유물임이 분명하다. 이와 함께 발견된 칠기는 삭아서 기형을 알 수가 없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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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1.01
  • 저작시기2005.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0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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