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작가소개 - 최인호
2. 작품 분석
(1) 7,80년대 소설
(2) 87년 가톨릭 귀의 이후 소설(문학적 영역의 확대)
(3) 90년대 이후 대중소설
3.작가와의 인터뷰
4.결론
2. 작품 분석
(1) 7,80년대 소설
(2) 87년 가톨릭 귀의 이후 소설(문학적 영역의 확대)
(3) 90년대 이후 대중소설
3.작가와의 인터뷰
4.결론
본문내용
으로 괄시받던 그가 당나라의 일개 병사에서 통일신라 최고의 권력을 지니게 되기까지, 그리고 부하 장수의 칼날에 목을 빼앗겨버린 장보고의 일대기는 \'잃어버린 역사\'를 보는 씁쓸함과 역사의 물줄기 한복판에 버티고 선 영웅의 비장감을 동시에 보여준다.
작가는 장보고를 \'패자부활전을 통해 이긴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한ㆍ중ㆍ일 삼국을 넘나들며 일본에서는 \'해신\'이라고 불렸고 중국에서도 극찬을 받았지만 우리 나라 역사에는 지금까지 반역자로 알려져 있다가 최근 그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지금 장보고냐\"는 질문에 \"장보고는 세계인이고 미래인\"이라며 \"장보고가 없었다면 고려자기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고 선종불교도 들어오기 힘들었을 것\"이라 고 강조했다
3.작가와의 인터뷰
발표를 준비하면서 최인호에 대해 많이 알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뚜렷한 문학적 경향을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작가 자신이 평론가들의 평가를 극도로 싫어한 뿐더러(칭찬조차 싫다고 말했었다) 어떤 경향이나 문단을 만드는 것 또한 기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면서 다방면에 쏟아낸 그의 수많은 작품들에 우리는 감탄을 금치 못했고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언급하셨던 ‘타고난 글쟁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더군다나 작가 최인호는 아직도 실존하고 있는 작가이고 현재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 성향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변화 가능하고 어떻게 변화할지는 작가 자신도 확실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우리는 인터뷰를 통한 작가의 답변에서 그의 생각들을 대부분 알아 볼 수 있었다.
①자신의 문학인생을 정리한다면.
지금까지 3단계를 거쳐왔다. 79년까지는 중단편에 전념했고, 정권이 바뀐 뒤 정신적 충격과 슬럼프가 겹쳐 미국으로 건너가 낭인생활을 하다가 「깊고 푸른 밤」을 쓰면서 영화작업에 몰두했다. 87년 가톨릭에 귀의한 뒤 성대수술을 한 것처럼 목소리가 바뀌었다. 「상도」까지를 3기로 본다. 이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것이다
②4기 문학의 특징은.
독자들이 좋아하는 장편소설, 청탁에 의한 주문소설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문학을 하겠다. 문학성·문제작·상업성 등의 화두, 재미있고 좋은 글을 쓰겠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고 싶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한줄짜리 잠언이건, 콩트이건 형식을 가리지 않겠다. 건전한 의미의 자기낙서라고 할까. 피카소는 노년시절 장난삼아 춘화를 그렸다지 않은가
③그런 단계로 넘어가는 원동력은.
젊을 때는 남대문시장의 전선처럼 욕망의 회로가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사람도 만나야 하고 술도 먹어야 하고. 수량은 일정한데 뽑아쓰는 데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생활이 어린애의 일기처럼 단순해졌다. \'산에 갔다. 글을 썼다. 재미있었다, 끝\'. 그만큼 수압은 강해졌다. 작가에게는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을 유폐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글쓰는 고통과 더불어 작가에게 가장 큰 행복이기도 하다
④그동안 달려온 길이 힘들거나 벅차지는 않았는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내가 \'제2의 전성기\'라고들 하는데,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다. 나는 한 번도 전성기가 아닌 적이 없었다. 살다보면 쉴 때도 있는 것이다. 글 쓰는 일은 항상 행복했다.
⑤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의 \"최인호가 소설 본래의 영역에 되돌아오기를 희망한다\"는 평문을 계기로 72년 이른바 \'대중소설\'과 \'본격소설\'의 갈림길에 선 것으로 안다. 이후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가.
전혀! 처음부터 지금까지 마찬가지 입장이다. 문학이라는 것은 조직의 영역이 아니다. 파워를 생각한다면 정치를 하지, 왜 문학을 하는가. 선후배 따지려면 육사에 가는 게 낫다. 문학에는 선배라는 게 의미가 없다. 이 점이야말로 문학의 즐거운 장점이기도 하다. 초창기에는 나도 문학의 방향을 놓고 고민을 했지만, 그건 체질의 문제이지 문학의 정도를 따지는 성질은 아니었다. 이후 나는 내 마음대로 10년 정도는 운수행각(雲水行脚)을 했다. 행복한 선택이었고, 그게 내 문학의 자양분이 되었다. 그렇지만 늘 머릿속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가 떠나지 않았다.
⑥모름지기 작가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문자 그대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지 해답을 마련하는 사람은 아니다. \'말의 동냥꾼\'인 시대의 거지일 따름이다. 작가는 남에게 칭찬을 받는 순간부터 곤란해진다. 진정한 의미의 작가는 오히려 그 시대와 불화를 일으켜 비난받는 게 낫다.
⑦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귀의한 것으로 안다. 종교와 문학이 행복하게 결합할 수 있는가?
처음 종교에 귀의했을 때, 주위에서 굉장히 우려했다. 그러나 나는 문학의 길을 종교를 통해 더 확실히 발견할 수 있었다. 문학이 구도의 길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을 쓰는 것보다 거짓 없는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다. 자신이 거짓말투성이면서 어떻게 좋은 문학을 할 수 있는가.
4.결론
최인호 문학은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새로운 감수성을 드러낸 90년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대단히 현대적이며 젊은 감각의, 조용하면서도 슬프고 정열적인 소설을 읽다가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두고자 책 맨 앞장을 펼쳤다. 그것은 최인호 선생이 이미 25년 전 쓴 소설들이었다\'(조경란), \'내가 좀 앞질러 태어나거나 선생이 좀 참았다 태어나서 같은 레이스를 뛸 수 있었으면… 이런 생각을 한 젊은작가가 어디 나혼자뿐이겠는가\'(하성란)란 찬사를 쏟아냈다.
그럼에도 정작 대중소설이란 딱지 때문에, 상업성 시비에 휘말려, 역사소설을 논외로 치는 분위기로 말미암아 평단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장편소설, 시나리오 등 후기로 갈수록 상업주의에 편승한 현실도피적인 모습이 최인호의 작가적 위치를 긍정적으로 정립시키는데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작가 최인호는 항상 노력하는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건국대 교수 신복룡씨은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소설 쓰는 최인호만큼도 역사 공부를 안 한다\"고 학계를 질타한 적이 있다. 경허 스님의 흔적을 찾아 청계사를 헤메며「길 없는 길」을 쓰고, 북경 유리창에서 임상옥의 행적을 더듬어「상도」를 쓰고, 산동성 적산촌에서 장보고의 숨결을 찾아「해신」을 쓰고, 나라의 신궁에서 백제의 유적을 뒤져「잃어버린 왕국」을
작가는 장보고를 \'패자부활전을 통해 이긴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한ㆍ중ㆍ일 삼국을 넘나들며 일본에서는 \'해신\'이라고 불렸고 중국에서도 극찬을 받았지만 우리 나라 역사에는 지금까지 반역자로 알려져 있다가 최근 그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지금 장보고냐\"는 질문에 \"장보고는 세계인이고 미래인\"이라며 \"장보고가 없었다면 고려자기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고 선종불교도 들어오기 힘들었을 것\"이라 고 강조했다
3.작가와의 인터뷰
발표를 준비하면서 최인호에 대해 많이 알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뚜렷한 문학적 경향을 찾아내기가 힘들었다. 작가 자신이 평론가들의 평가를 극도로 싫어한 뿐더러(칭찬조차 싫다고 말했었다) 어떤 경향이나 문단을 만드는 것 또한 기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면서 다방면에 쏟아낸 그의 수많은 작품들에 우리는 감탄을 금치 못했고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언급하셨던 ‘타고난 글쟁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더군다나 작가 최인호는 아직도 실존하고 있는 작가이고 현재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 성향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변화 가능하고 어떻게 변화할지는 작가 자신도 확실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우리는 인터뷰를 통한 작가의 답변에서 그의 생각들을 대부분 알아 볼 수 있었다.
①자신의 문학인생을 정리한다면.
지금까지 3단계를 거쳐왔다. 79년까지는 중단편에 전념했고, 정권이 바뀐 뒤 정신적 충격과 슬럼프가 겹쳐 미국으로 건너가 낭인생활을 하다가 「깊고 푸른 밤」을 쓰면서 영화작업에 몰두했다. 87년 가톨릭에 귀의한 뒤 성대수술을 한 것처럼 목소리가 바뀌었다. 「상도」까지를 3기로 본다. 이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것이다
②4기 문학의 특징은.
독자들이 좋아하는 장편소설, 청탁에 의한 주문소설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문학을 하겠다. 문학성·문제작·상업성 등의 화두, 재미있고 좋은 글을 쓰겠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고 싶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한줄짜리 잠언이건, 콩트이건 형식을 가리지 않겠다. 건전한 의미의 자기낙서라고 할까. 피카소는 노년시절 장난삼아 춘화를 그렸다지 않은가
③그런 단계로 넘어가는 원동력은.
젊을 때는 남대문시장의 전선처럼 욕망의 회로가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사람도 만나야 하고 술도 먹어야 하고. 수량은 일정한데 뽑아쓰는 데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생활이 어린애의 일기처럼 단순해졌다. \'산에 갔다. 글을 썼다. 재미있었다, 끝\'. 그만큼 수압은 강해졌다. 작가에게는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을 유폐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글쓰는 고통과 더불어 작가에게 가장 큰 행복이기도 하다
④그동안 달려온 길이 힘들거나 벅차지는 않았는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내가 \'제2의 전성기\'라고들 하는데,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다. 나는 한 번도 전성기가 아닌 적이 없었다. 살다보면 쉴 때도 있는 것이다. 글 쓰는 일은 항상 행복했다.
⑤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의 \"최인호가 소설 본래의 영역에 되돌아오기를 희망한다\"는 평문을 계기로 72년 이른바 \'대중소설\'과 \'본격소설\'의 갈림길에 선 것으로 안다. 이후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가.
전혀! 처음부터 지금까지 마찬가지 입장이다. 문학이라는 것은 조직의 영역이 아니다. 파워를 생각한다면 정치를 하지, 왜 문학을 하는가. 선후배 따지려면 육사에 가는 게 낫다. 문학에는 선배라는 게 의미가 없다. 이 점이야말로 문학의 즐거운 장점이기도 하다. 초창기에는 나도 문학의 방향을 놓고 고민을 했지만, 그건 체질의 문제이지 문학의 정도를 따지는 성질은 아니었다. 이후 나는 내 마음대로 10년 정도는 운수행각(雲水行脚)을 했다. 행복한 선택이었고, 그게 내 문학의 자양분이 되었다. 그렇지만 늘 머릿속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가 떠나지 않았다.
⑥모름지기 작가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문자 그대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지 해답을 마련하는 사람은 아니다. \'말의 동냥꾼\'인 시대의 거지일 따름이다. 작가는 남에게 칭찬을 받는 순간부터 곤란해진다. 진정한 의미의 작가는 오히려 그 시대와 불화를 일으켜 비난받는 게 낫다.
⑦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귀의한 것으로 안다. 종교와 문학이 행복하게 결합할 수 있는가?
처음 종교에 귀의했을 때, 주위에서 굉장히 우려했다. 그러나 나는 문학의 길을 종교를 통해 더 확실히 발견할 수 있었다. 문학이 구도의 길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을 쓰는 것보다 거짓 없는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다. 자신이 거짓말투성이면서 어떻게 좋은 문학을 할 수 있는가.
4.결론
최인호 문학은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새로운 감수성을 드러낸 90년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대단히 현대적이며 젊은 감각의, 조용하면서도 슬프고 정열적인 소설을 읽다가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두고자 책 맨 앞장을 펼쳤다. 그것은 최인호 선생이 이미 25년 전 쓴 소설들이었다\'(조경란), \'내가 좀 앞질러 태어나거나 선생이 좀 참았다 태어나서 같은 레이스를 뛸 수 있었으면… 이런 생각을 한 젊은작가가 어디 나혼자뿐이겠는가\'(하성란)란 찬사를 쏟아냈다.
그럼에도 정작 대중소설이란 딱지 때문에, 상업성 시비에 휘말려, 역사소설을 논외로 치는 분위기로 말미암아 평단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장편소설, 시나리오 등 후기로 갈수록 상업주의에 편승한 현실도피적인 모습이 최인호의 작가적 위치를 긍정적으로 정립시키는데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작가 최인호는 항상 노력하는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건국대 교수 신복룡씨은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소설 쓰는 최인호만큼도 역사 공부를 안 한다\"고 학계를 질타한 적이 있다. 경허 스님의 흔적을 찾아 청계사를 헤메며「길 없는 길」을 쓰고, 북경 유리창에서 임상옥의 행적을 더듬어「상도」를 쓰고, 산동성 적산촌에서 장보고의 숨결을 찾아「해신」을 쓰고, 나라의 신궁에서 백제의 유적을 뒤져「잃어버린 왕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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