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후기 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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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후기 유학사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조선후기 유학개관

Ⅱ.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형성과 전개
1. 율곡학파의 형성과 퇴계설 비판
2. 퇴계학파의 형성과 율곡비판

Ⅲ. 퇴·율절충론과 탈주자학적 유학사상의 등장
1. 퇴·율절충파의 사상
2. 탈주자학적 유학사상

Ⅳ. 조선의 양명학파

Ⅴ. 호락론쟁과 조선성리학의 재정립
1. 호락론쟁의 전개
2. 호락론쟁이후의 조선 성리학

Ⅵ. 조선후기 성리학의 성격

본문내용

고 하니 결국에는 이기를 둘로 나누는 의심을 면키 어렵다.”동상.
녹문의 율곡에 대한 비판의 요지는 이통기국론을 논리적으로 계속 밀고 나가면 이와 기를 병열적인 두개의 존재로 파악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면 기발만 인정하는 율곡의 사단칠정론과 괴리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녹문은 장재의 일기장존설을 다시 끌어들여 이러한 모순을 제거하려고 했다. 녹문은 존재의 유일한 근원은 기인데 분수화 되기 이전의 본래적인 기의 모습을 담일지기라고 하고 이 담일의 기가 분열하여 음양이 되고 오행이 되어 만물을 발생시키고 이는 그 기의 운동법칙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서 장재 화담의 기론을 부활시켰다.
이러한 녹문의 유기론에 대해서 조선후기의 주리적 성리학자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녹문의 기론을 비판한 학자로는 낙론을 계승한 노주 오희상과 매산 홍직필이 있고 또 퇴계학파의 맥을 잇고 있는 한주 이진상도 녹문의 유기론을 비판하고 있다. 위에서 든 노주와 매산부터 율곡학파의 학통을 이으면서도 퇴계의 주리론에 가까운 성리설을 제창하기 시작하는데 조선조말의 주리삼대가에 드는 화서 이항로와 노사 기정진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율곡의 주기적 성향을 비판하고 퇴계학파의 학자들보다도 더 주리적인 성리설을 전개하게 된다.이들은 이기불상리 보다 이기불상잡을 더 중시할 뿐 아니라 이선기후, 이존기비, 이존기망의 학설을 펼치고 더 나아가서는 퇴계학파의 대산에게서 주장된 바 있는 氣生於理,理活.理動의 說을 주장하고 있어 녹문의 유기론에 대한 유리론이라고 까지 말해지고 있다. 이들이 율곡의 학통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퇴계적인 학설로 귀착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들 수 있겠으나, 위정척사운동에 가담한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주리론과 관계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조선중기 주자학적 명분의 강조가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요구되어 퇴계의 성리설로 이론화 되었듯이 봉건적 질서의 해체라는 위기의식이 조선말의 성리학자들로 하여금 다시 리를 절대시하고 실체화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Ⅵ. 조선후기 성리학의 성격
이상에서 조선조 후반기 유학파의 성립과 그 학설의 변천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조선후기의 유학은 퇴계와 율곡의 학설을 계승하여 전개되어 가는데 퇴계의 이기불상잡의 강조, 사단칠정의 이기호발이라는 입장과 율곡의 이기혼륜무간 사단칠정의 기발이승일도의 입장이 각각 그들의 문도로 이어져 크게 보면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라는 두개의 학파가 양립하면서 조선후기의 유학을 이끌어간다고 볼 수도 있다.퇴계학파와 율곡학파가 남인과 서인이라는 당색과 결부됨으로 해서 이 두 학파간의 논쟁은 단순히 상대방의 학설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는데 머물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되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부터 조선성리학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주자학에 집착하게 되고 주자학이 아닌 다른 모든 학문적 경향은 이단사설로 배척된다. 교조적 주자학자들의 완강한 배척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중세사회 해체의 조짐과 함께 새로운 학문경향이 싹트게 되는데 한학적 경향과 양명학이 그것이다. 양명학은 명대의 중국사회를 반영한 자유주의적 사유로 주자학적 명분론을 비판하고 나온 근대적 사유의 맹아라는 성격을 지녔고 한학풍의 유학은 얼핏 복고주의 같지만 사실은 고식화된 주자학의 공소성을 비판하고 유학의 실천적 기풍을 되살리기 위하여 주자보다 더 큰 권위를 빌어온 것으로 실증주의적 경전해석이라는 근대적 사유의 싹을 보이고 있다. 이들 사상이 중세사회 붕괴의 조짐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후에 근대적 사유로 향한 성호학파와 북학파의 사상이 이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로도 어느 정도는 증명된다고 생각한다.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정통을 이어받은 유학자들은 사설을 굳건히 지키면서 주자학이 자신들의 학설과 일치함을 논증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는데 퇴계와 율곡의 주장을 각자 확대적용하다 보니 극단적인데로 사상이 경도되는 경향이 있었다. 퇴계학파의 학봉계와 서애계의 학자들은 율곡의 주기적 경향을 비판하다보니 이선기후의 주리설이 극단화되어 이활론,이동론으로 까지 주장하게 되었다. 미수 허목으로 부터 시작되는 기호남인은 퇴계학파 내에서 조금 색다른 성향를 띠게 되는데 이는 후에 성호학파로 연결되고 다시 다산의 수사학으로 연결된다. 율곡학파는 우암 때 노론계와 소론계로 나뉘는데 소론계는 율곡학파의 정통성과 멀어지면서 퇴율절충론으로 기울기도하고 양명학과 연결되기도 한다.
조선후기 유학의 전개에서 가장 큰 전환점의 계기가 되는 사건은 율곡학파 내부에서 일어난 호락논쟁이다. 중세사회를 온존하려는 당시의 유학자일반의 의식은 주자학적 명분론 봉건적 윤리규범의 절대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론적으로는 성즉리라는 성리학적 대전제를 모든 이론체계에 관철시키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율곡학파에서는 이러한 이념적 요청과 율곡학의 주기적 성격사이에 괴리가 생기게 되고 이 때문에 율곡 우암의 사설을 굳게 지키려는 수암 남당과 성리학의 이념적 당위성을 실현하려는 외암사이에 인물성동이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논쟁에는 율곡학파에 속한 대부분의 학자들이 참여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성리학을 다시 정리하게 되었다. 호락논쟁은 조선후기의 성리학이 재정립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하겠다. 호락논쟁이후 율곡학파의 유학자들도 호론을 계승한 유학자와 낙론을 계승한 유학자로 나뉘게 된다. 이 중 녹문 임성주는 호락논쟁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율곡의 이통기국론을 비판하고 장재, 서경덕류의 유기론적 사상을 재천명하게 된다. 낙론을 계승한 유학자들은 녹문의 유기론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발전할 소지가 있는 율곡의 이기심성론을 비판하고 퇴계적인 성리설을 전개하게 된다. 그것이 화서나 노사에서는 퇴계학파의 한주와 거의 차이가 없는 극단적인 이존설로까지 이르게 된다.
이상에서 조선후기 유학의 변천을 간단하게 요약해보았다. 조선후기 유학의 흐름을 이렇게 보면 유학파간의 갈등은 퇴계학파와 율곡학파간의 사단칠정론 해석을 둘러싼 논변부터 시작해서 순정주자학고수와 탈주자학적 학문경향간의 갈등,도학과 실학의 갈등-이 논문에서는 실학은 전혀 언급하지 못했다.- 보다 세부적으로는 호론과 낙론의 갈등,유기론과 유리론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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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1.17
  • 저작시기20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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