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서론 위기의 동아시아 정세와 양계초
Ⅱ.본론
1)양계초는 누구인가
2)양계초,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가)무술유신과 양계초의 자유론
나)입헌군주론
다)양계초의 교육 주장
라)양계초의 민주사상
3)격동의 구한 말, 양계초, 조선을 논하다
가) 양계초의 조선 인식 문제
나)양계초 사상의 조선 지식인 수용 과정
Ⅲ.결론 지성인의 교사 양계초, 그리고 우리
Ⅱ.본론
1)양계초는 누구인가
2)양계초,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가)무술유신과 양계초의 자유론
나)입헌군주론
다)양계초의 교육 주장
라)양계초의 민주사상
3)격동의 구한 말, 양계초, 조선을 논하다
가) 양계초의 조선 인식 문제
나)양계초 사상의 조선 지식인 수용 과정
Ⅲ.결론 지성인의 교사 양계초, 그리고 우리
본문내용
집단 사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여서 집단의 발전은 그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개인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계초는 개인의 인격발달에 중점을 두고 사덕(개인의 도덕)발전을 강조하게 된다.
양계초는 더 나아가서 정치의 자유에 대해서는 논하면서 정치참여에 대한 자유를 강조했다. 또 참정권에 대해서도 강조했는데 특히 선거권과 피선거권에 대해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경제활동 면에 있어서도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며 개인의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래서 그는 인에 기초한 사회복지정책에 반대하였고, 자립적으로 재산을 늘리는 것을 ‘의정신’이라고 생각했다. 양계초는 또 사상의 자유를 강조했는데 “고인(전통권위)의 노예가 되지 말며, 세속의 노예가 되지 말고, 어떠한 틀의 노예가 되지 말고, 정욕의 노예가 되지 말 것”을 강조했다. 다시 말해 개인은 당연히 전통과 현실권위의 속박을 돌파하고 모두가 승인하는 공리로써 행위나 일의 준칙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양계초는 중국이 발전하지 못하고 낙후된 것은 국민의 사상이 속박받아 왔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이 같은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양계초는 개인 자유에 대한 중요성을 밝혔지만 자유의 남용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입장을 견지하기도 하여 균형있는 자유에의 민중적 발현을 꾀했다고 할 수 있겠다. 즉, 법의 복종하는 자유를 꾀한 것이었다.
양계초는 이와 더불어 중국에서 개인의 권리에 대한 것들이 발달하기 어려웠던 것은 개인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신장시키려는 노력을 안했다고 주장하면서 양계초는 그 이유로 개인에게 권리가 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점과 개인의 권리가 침탈당하고 있는 것을 몰랐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국민들에게 권리를 일깨워 주어야 민주정치를 실행할 수 있다고 여겼고 국민의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는데 이러한 민주정신의 국민 자각은 앞서 밝힌 교육론이 타개책이 될 수 있어 그는 문제점과 해결책을 그의 사상을 통해 폭넓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a)양계초 민주사상의 특징
양계초 민주사상의 특징을 다시 요약해보자면, 그의 민주사상의 뿌리는 18, 19세기 서양의 민주학설에 있지만 이것 외에 중국 전통사상에도 뿌리를 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계초의 사상은 중국의 유가전통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도 서양문화와의 조화를 추구했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개인의 인격발달과 자유를 중시했다. 그는 또 모든 사회활동뿐만 아니라 집단(국가)도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며 개인의 인격 발달이 집단(국가)의 발전을 가져온다고 여겼다. 따라서 개인의 인격의 근본적인 존중과 발달을 강조하며 사회의 내적 성장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양계초는 이상적 민주정치의 틀로서 영국의 정치제도를 모델로 생각했는데 영국의 정치형태는 혁명적 전환보다 점진적 개혁을 통한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 그가 이 같은 영국의 점진적 개혁을 중국에서도 적용해 보고자 했다. 결국 양계초의 민주사상은 점진적으로 개혁을 추구하고자 했다는 것을 짙게 느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 사상가의 사상을 이렇게 분류하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형식적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한 사상은 여러 가지 생각과 관념, 그리고 그 시대가 종합적이고 전체적으로 결합되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미력한 지식으로 분류해 보면서 양계초는 무척 다양한 측면으로 자신의 세계를 바라보고 또 어떻게 변화시킬까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것을 잘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양계초의 사상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국 내부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바로 우리 민족, 20세기 초, 격동의 구한말 양계초는 근대의 교사로서 한국의 지식인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제 그 양상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3.격동의 구한 말, 양계초, 조선을 논하다
가) 양계초의 조선 인식 문제
\'나는 중일전쟁 직전의 조선과 중일전쟁 직후의 조선을 비교해 볼 때, 더욱이 중일전쟁 직후의 조선과 러일전쟁 직후의 조선과 비교해볼 때, 눈물을 금하지 못하겠다. 이제 조선이 없어졌다. 지금부터 세상에 조선이 역사가 다시 있을 수 없고 일본의 일부분의 역사로 남아있을 뿐이다. 삼천년의 고국이 멸망하는데 그와 신속의 관계를 가진 이로서 어찌 이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로써 비애를 생각하면 그 비애를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윗글은 양계초의 \'조선망국사략\'의 일부이다. 대한 제국 기 양계초는 당시 대한 제국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서 그의 식견과 문장에 대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양계초의 사상이 어떻게 한국에 유입되었고 또 어떻게 변용되었는지 알아보기 전에 과연 양계초는 자신의 조국, 즉 청나라와 오랜 역사를 함께 해온 한반도의 작은 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는 것이 먼저 일듯하여 양계초의 조선을 논한 \'조선망국사략\'으로 글을 시작하였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20세기로 전환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는 가히 풍전등화에 거센 풍랑앞에 조각배였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전이 날로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약소국들에게 있어서 \"자강\"과 \"망국\"은 단순한 과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였다. 논의의 범위를 중국과 한국으로만 한정해놓고 이야기해보자면 당시 모든 지식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었다. 문제는 문제의식에 대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사대보로서의 교육배경을 지니고 새로운 서구 문명을 습득하였거나 또는 서구문명을 학습하여 그것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고 했다. 양계초 역시, \"정학의 본원을 알고 사회의 이치를 고찰하여 나라를 부강하여 만들고 인종을 진화시켜 국권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방도를 구하는 자\"라고 지식인을 정의하였듯이 당시 중국과 한국의 지식인들은 더 이상 지식인 노릇을 할 수 없었다. 이미 국가는 국권을 상실하였기 때문이었다. 대한 제국, 즉 조선과 청의 관계는 \"독립국은 아니나 자주권을 갖는\" 완전하지 않은 종속관계였다. 양계초로서는 이러한 관계의 조선이 점차 망국으로 이르고 열강들이 야금야금 침탈하는 상황에서 중국과 조선의 상황을 인식할 때,
양계초는 더 나아가서 정치의 자유에 대해서는 논하면서 정치참여에 대한 자유를 강조했다. 또 참정권에 대해서도 강조했는데 특히 선거권과 피선거권에 대해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경제활동 면에 있어서도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며 개인의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래서 그는 인에 기초한 사회복지정책에 반대하였고, 자립적으로 재산을 늘리는 것을 ‘의정신’이라고 생각했다. 양계초는 또 사상의 자유를 강조했는데 “고인(전통권위)의 노예가 되지 말며, 세속의 노예가 되지 말고, 어떠한 틀의 노예가 되지 말고, 정욕의 노예가 되지 말 것”을 강조했다. 다시 말해 개인은 당연히 전통과 현실권위의 속박을 돌파하고 모두가 승인하는 공리로써 행위나 일의 준칙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양계초는 중국이 발전하지 못하고 낙후된 것은 국민의 사상이 속박받아 왔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이 같은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양계초는 개인 자유에 대한 중요성을 밝혔지만 자유의 남용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입장을 견지하기도 하여 균형있는 자유에의 민중적 발현을 꾀했다고 할 수 있겠다. 즉, 법의 복종하는 자유를 꾀한 것이었다.
양계초는 이와 더불어 중국에서 개인의 권리에 대한 것들이 발달하기 어려웠던 것은 개인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신장시키려는 노력을 안했다고 주장하면서 양계초는 그 이유로 개인에게 권리가 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점과 개인의 권리가 침탈당하고 있는 것을 몰랐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국민들에게 권리를 일깨워 주어야 민주정치를 실행할 수 있다고 여겼고 국민의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는데 이러한 민주정신의 국민 자각은 앞서 밝힌 교육론이 타개책이 될 수 있어 그는 문제점과 해결책을 그의 사상을 통해 폭넓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a)양계초 민주사상의 특징
양계초 민주사상의 특징을 다시 요약해보자면, 그의 민주사상의 뿌리는 18, 19세기 서양의 민주학설에 있지만 이것 외에 중국 전통사상에도 뿌리를 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계초의 사상은 중국의 유가전통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도 서양문화와의 조화를 추구했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개인의 인격발달과 자유를 중시했다. 그는 또 모든 사회활동뿐만 아니라 집단(국가)도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며 개인의 인격 발달이 집단(국가)의 발전을 가져온다고 여겼다. 따라서 개인의 인격의 근본적인 존중과 발달을 강조하며 사회의 내적 성장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양계초는 이상적 민주정치의 틀로서 영국의 정치제도를 모델로 생각했는데 영국의 정치형태는 혁명적 전환보다 점진적 개혁을 통한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 그가 이 같은 영국의 점진적 개혁을 중국에서도 적용해 보고자 했다. 결국 양계초의 민주사상은 점진적으로 개혁을 추구하고자 했다는 것을 짙게 느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 사상가의 사상을 이렇게 분류하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형식적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한 사상은 여러 가지 생각과 관념, 그리고 그 시대가 종합적이고 전체적으로 결합되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미력한 지식으로 분류해 보면서 양계초는 무척 다양한 측면으로 자신의 세계를 바라보고 또 어떻게 변화시킬까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것을 잘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양계초의 사상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국 내부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바로 우리 민족, 20세기 초, 격동의 구한말 양계초는 근대의 교사로서 한국의 지식인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제 그 양상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3.격동의 구한 말, 양계초, 조선을 논하다
가) 양계초의 조선 인식 문제
\'나는 중일전쟁 직전의 조선과 중일전쟁 직후의 조선을 비교해 볼 때, 더욱이 중일전쟁 직후의 조선과 러일전쟁 직후의 조선과 비교해볼 때, 눈물을 금하지 못하겠다. 이제 조선이 없어졌다. 지금부터 세상에 조선이 역사가 다시 있을 수 없고 일본의 일부분의 역사로 남아있을 뿐이다. 삼천년의 고국이 멸망하는데 그와 신속의 관계를 가진 이로서 어찌 이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로써 비애를 생각하면 그 비애를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윗글은 양계초의 \'조선망국사략\'의 일부이다. 대한 제국 기 양계초는 당시 대한 제국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서 그의 식견과 문장에 대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양계초의 사상이 어떻게 한국에 유입되었고 또 어떻게 변용되었는지 알아보기 전에 과연 양계초는 자신의 조국, 즉 청나라와 오랜 역사를 함께 해온 한반도의 작은 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는 것이 먼저 일듯하여 양계초의 조선을 논한 \'조선망국사략\'으로 글을 시작하였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20세기로 전환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는 가히 풍전등화에 거센 풍랑앞에 조각배였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전이 날로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약소국들에게 있어서 \"자강\"과 \"망국\"은 단순한 과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였다. 논의의 범위를 중국과 한국으로만 한정해놓고 이야기해보자면 당시 모든 지식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었다. 문제는 문제의식에 대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사대보로서의 교육배경을 지니고 새로운 서구 문명을 습득하였거나 또는 서구문명을 학습하여 그것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고 했다. 양계초 역시, \"정학의 본원을 알고 사회의 이치를 고찰하여 나라를 부강하여 만들고 인종을 진화시켜 국권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방도를 구하는 자\"라고 지식인을 정의하였듯이 당시 중국과 한국의 지식인들은 더 이상 지식인 노릇을 할 수 없었다. 이미 국가는 국권을 상실하였기 때문이었다. 대한 제국, 즉 조선과 청의 관계는 \"독립국은 아니나 자주권을 갖는\" 완전하지 않은 종속관계였다. 양계초로서는 이러한 관계의 조선이 점차 망국으로 이르고 열강들이 야금야금 침탈하는 상황에서 중국과 조선의 상황을 인식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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