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지청천(池靑天)
김좌진(金佐鎭)
곽재우(郭再祐)
권 율 (權 慄)
김종서(金宗瑞)
양헌수(梁憲洙)
이순신(李舜臣)
전봉준(全琫準)
최윤덕(崔潤德)
강감찬(姜邯贊)
김좌진(金佐鎭)
곽재우(郭再祐)
권 율 (權 慄)
김종서(金宗瑞)
양헌수(梁憲洙)
이순신(李舜臣)
전봉준(全琫準)
최윤덕(崔潤德)
강감찬(姜邯贊)
본문내용
의 선무에 일단 응하기로 하고, 폐정개혁안을 내놓았는데 이를 홍계훈이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사이에는 5월 7일 이른바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전라도 각 지방에는 집강소(를 두어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청일전쟁이 일어나 사태는 또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마침내 9월 중순을 전후하여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아래 다시 봉기하였다. 여기에 그의 휘하의 10만여명의 남접농민군과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휘하의 10만명의 북접농민군이 합세하여 논산에 집결하였다. 자신의 주력부대 1만여명을 이끌고 공주를 공격하였으나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11월초 우금치싸움에서 대패하였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뒤 전라도 순천 및 황해·강원도에서 일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자 후퇴하여 금구·원평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최윤덕(崔潤德)
■ 1376(우왕 2)∼1445(세종 27)
■ 조선초기의 무신
■ 본관은 통천(通川)
■ 자는 여화(汝和)·백수(伯修), 호는 임곡(霖谷)
◎ 성장 과정(유년기, 청소년기, 대학)
지중추부사 운해의 아들이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국경의 수비에 나가 있어 한마을에 사는 양수척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어느날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쏘아죽였다.
그는 성품이 자애롭고 근검하여서 공무의 여가를 이용하여 묵은 땅에 농사를 지었고,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남편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여인의 호소를 듣고 그 호랑이를 잡아서 배를 갈라 남편의 뼈를 찾아 장사를 지내게 해 준 일도 있다.
◎ 군생활 및 업적
음관으로 기용되어 아버지를 따라 여러 번 전공을 세우고 부사직이 되었다. 1402년(태종 2)에 낭장이 되고, 곧 호군을 거쳐 이듬해 대호군이 되었다. 1406년 지태안군사가 되었다가 1410년 무과에 급제하여 상호군이 되고, 동북면조전병마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우군동지총제에 올랐다. 1413년 경성등처절제사가 되어 동맹가첩목아를 복속시켜서 야인들의 준동을 막았으며, 영길도도순문찰리사都巡問·우군총제·중군도총제 등을 역임하였다. 1419년(세종 1)에 의정부참찬으로 삼군도통사가 되어 체찰사 이종무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1421년에는 공조판서가 되어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곧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었다. 1426년 좌군도총제부사, 1428년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1433년 파저강의 야인인 이만주가 함길도 여연에 침입하였을 때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어 이만주를 대파하였고, 이 공으로 우의정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적이 또 변방을 침입하자 평안도도안무찰리사로 나가 이를 진압하였으며, 돌아와서는 무관으로서 재상의 직에 있을 수 없다는 소를 올려 무관직에 전임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1435년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영중추원사에 전임된 뒤 1445년에 궤장을 하사 받았다.
◎ 말년 노후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통천의 상렬사와 안주의 청천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렬이다.
강감찬(姜邯贊)
■ 948(정종 3)∼1031(현종 22)
■ 고려의 명신
■ 본관은 금주(지금의 여흥)
■ 어려서 은천(殷川)이라 불림
◎ 성장 과정(유년기, 청소년기, 대학)
경주로부터 금주에 이주 해 호족으로 성장한 여청의 5대손이며, 왕건을 도운 공으로 삼한벽상공신 이 된 궁진의 아들이다.
983년(성종 3) 과거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서경을 침공하자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나주로 피난하여 사직을 보호하였다.
이듬해에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승지· 좌산기상시중추원사 이부상서 등을 지내고, 1018년에는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와 외관직인 서경유수를 겸하였다.
서경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그해에 거란의 소배압이 10만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였다. 이에 그는 서북면행영도통사 로 총사령관격인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 등과 함께 도처에서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 군생활 및 업적
구주에서의 대첩은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고려의 20만대군은 안주에서 대기하다가 적의 접근을 기다려 흥화진의 義으로 나가 정예기병 1만2000명을 산기슭에 잠복 배치한 뒤 큰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두었다가 때를 맞추어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 전투에서 패전한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을 침공하려 했으나, 자주 신은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였으며, 구주에서는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어 침입군 10만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 말년 노후
그 전공으로 현종은 친히 영파역까지 마중을 나와 극진한 환영을 하였다. 강감찬으로 인해 거란은 침략야욕을 버리게 되고 고려와는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에 봉해진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 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에 봉해졌다.
그는 비단 거란과의 항전장으로서뿐만 아니라 개경에 나성을 쌓을 것을 주장하여 국방에 대해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현재 그의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현종묘정에 배향되고 문종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이다. 그의 저서로는 《낙도교거집》과 《구선집》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전라도 각 지방에는 집강소(를 두어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청일전쟁이 일어나 사태는 또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마침내 9월 중순을 전후하여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아래 다시 봉기하였다. 여기에 그의 휘하의 10만여명의 남접농민군과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휘하의 10만명의 북접농민군이 합세하여 논산에 집결하였다. 자신의 주력부대 1만여명을 이끌고 공주를 공격하였으나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11월초 우금치싸움에서 대패하였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뒤 전라도 순천 및 황해·강원도에서 일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자 후퇴하여 금구·원평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최윤덕(崔潤德)
■ 1376(우왕 2)∼1445(세종 27)
■ 조선초기의 무신
■ 본관은 통천(通川)
■ 자는 여화(汝和)·백수(伯修), 호는 임곡(霖谷)
◎ 성장 과정(유년기, 청소년기, 대학)
지중추부사 운해의 아들이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국경의 수비에 나가 있어 한마을에 사는 양수척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어느날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쏘아죽였다.
그는 성품이 자애롭고 근검하여서 공무의 여가를 이용하여 묵은 땅에 농사를 지었고,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남편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여인의 호소를 듣고 그 호랑이를 잡아서 배를 갈라 남편의 뼈를 찾아 장사를 지내게 해 준 일도 있다.
◎ 군생활 및 업적
음관으로 기용되어 아버지를 따라 여러 번 전공을 세우고 부사직이 되었다. 1402년(태종 2)에 낭장이 되고, 곧 호군을 거쳐 이듬해 대호군이 되었다. 1406년 지태안군사가 되었다가 1410년 무과에 급제하여 상호군이 되고, 동북면조전병마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우군동지총제에 올랐다. 1413년 경성등처절제사가 되어 동맹가첩목아를 복속시켜서 야인들의 준동을 막았으며, 영길도도순문찰리사都巡問·우군총제·중군도총제 등을 역임하였다. 1419년(세종 1)에 의정부참찬으로 삼군도통사가 되어 체찰사 이종무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1421년에는 공조판서가 되어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곧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었다. 1426년 좌군도총제부사, 1428년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1433년 파저강의 야인인 이만주가 함길도 여연에 침입하였을 때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어 이만주를 대파하였고, 이 공으로 우의정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적이 또 변방을 침입하자 평안도도안무찰리사로 나가 이를 진압하였으며, 돌아와서는 무관으로서 재상의 직에 있을 수 없다는 소를 올려 무관직에 전임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1435년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영중추원사에 전임된 뒤 1445년에 궤장을 하사 받았다.
◎ 말년 노후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통천의 상렬사와 안주의 청천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렬이다.
강감찬(姜邯贊)
■ 948(정종 3)∼1031(현종 22)
■ 고려의 명신
■ 본관은 금주(지금의 여흥)
■ 어려서 은천(殷川)이라 불림
◎ 성장 과정(유년기, 청소년기, 대학)
경주로부터 금주에 이주 해 호족으로 성장한 여청의 5대손이며, 왕건을 도운 공으로 삼한벽상공신 이 된 궁진의 아들이다.
983년(성종 3) 과거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서경을 침공하자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나주로 피난하여 사직을 보호하였다.
이듬해에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승지· 좌산기상시중추원사 이부상서 등을 지내고, 1018년에는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와 외관직인 서경유수를 겸하였다.
서경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그해에 거란의 소배압이 10만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였다. 이에 그는 서북면행영도통사 로 총사령관격인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 등과 함께 도처에서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 군생활 및 업적
구주에서의 대첩은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고려의 20만대군은 안주에서 대기하다가 적의 접근을 기다려 흥화진의 義으로 나가 정예기병 1만2000명을 산기슭에 잠복 배치한 뒤 큰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두었다가 때를 맞추어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 전투에서 패전한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을 침공하려 했으나, 자주 신은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였으며, 구주에서는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어 침입군 10만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 말년 노후
그 전공으로 현종은 친히 영파역까지 마중을 나와 극진한 환영을 하였다. 강감찬으로 인해 거란은 침략야욕을 버리게 되고 고려와는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에 봉해진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03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 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에 봉해졌다.
그는 비단 거란과의 항전장으로서뿐만 아니라 개경에 나성을 쌓을 것을 주장하여 국방에 대해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현재 그의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현종묘정에 배향되고 문종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이다. 그의 저서로는 《낙도교거집》과 《구선집》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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