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
1. 가야사 연구 성과 …3
본론
1. 가야의 성립시기 …5
2. 가야의 명칭 …8
3. 가야사 연구가 미진한 이유 …10
4. 임나일본부설 …10
5. 가야사 연구의 필요성…11
6. 가야의 기반 …
·경제…11
·정치…13
· 설화…13
7. 가야의 흥망 …14
결론 …16
1. 가야사 연구 성과 …3
본론
1. 가야의 성립시기 …5
2. 가야의 명칭 …8
3. 가야사 연구가 미진한 이유 …10
4. 임나일본부설 …10
5. 가야사 연구의 필요성…11
6. 가야의 기반 …
·경제…11
·정치…13
· 설화…13
7. 가야의 흥망 …14
결론 …16
본문내용
사용 빈도표 金秦植 『伽倻聯盟史』1993, 大正文化社 p17
● 가야의 연구가 미진한 이유
고대 한일관계의 실상을 밝히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가야문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가야사연구는 한국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미진한 부분의 하나이다. 한국고대사 연구에서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의 연구는 고고학적 자료에 의한 추론위주가 된 구성이 허용되기도 하지만 고대국가의 형성기부터는 문제가 달라진다. 안춘배 『加耶文化硏究 創刊號』1990, 신라대학교 p45~46
가야사는 백제사신라사에 비하여 그 내용이 매우 모호하여, 그 줄거리조차 세우지 못해 온 형편이다. 그것은 물론 사료의 절대적인 부족에서 온 것으로서, 가야 사료라면,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삼국사기에 보이는 몇 개의 연대기가 거의 전부요, 그 밖에 약간의 단편적 기록들이 있기는 하지만 가야사의 전과정을 살피기에는 너무도 소략하다. 천관우 『가야사 연구』1997, 일조각 p3
● 任那日本府說
가야연맹은 그 후 전반적으로 약화된 상태에서 백제 및 신라의 침략을 외교적으로 견제하여 나가면서 독립성을 유지코자 하였는데,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료는 일본서기 흠명기(欽命紀)에 임나일본부 관계 기사밖에 없다. 그러므로 가야연맹의 역사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일단 사료상에 나타나는 임나일본부의 문제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는 일본서기 흠명기(欽命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나, 6세기 중엽에는 아직 일본이라는 국명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당시의 명칭일 수는 없다. (金秦植『加耶聯盟史)-이병도논문이름은 김태식 책 참조하자 1993, 일조각 p221
가야에 관해 일본에서는 4세기 후반에 ‘임나일본부’라는 관청을 두고 직접 지배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 당시는 일본역사에서 신화시대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 없고 일본이라는 국호마저 8세기 이후에야 사용되는 것이므로, 이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억지 논리로 이해하면 된다.
● 가야사 연구의 필요성
종래의 가야 제국에 관한 연구들은 흔히 가야를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사회로 인정하여 부족국가 혹은 부족연맹사회로 보거나 아니면 한정된 소국으로 낮추어 보고 있다. 또한 연구대상을 삼는 데 있어서도 가야 제국 자체의 역사를 기본으로 하지 않고, 이를 일본열도에다 붙여서 그 정치적 세력이라든가 도는 가야 내지 임나 제국과의 관계분석에 역점을 두는 둥 빗나간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이제는 가야 제국 자체의 역사적 발전에 관한 사실적 검토가 있는데 이제는 가야 제국 자체의 역사적 발전에 관한 사실적 검토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즉 가야에 대한 발전적 인식이 전제된 뒤에 일본열도의 문헌적 사료와 고고학적 자료들과의 올바른 비교연구가 가능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고대 한일관계에 대한 참된 인식과 실체의 규명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윤석효 『신편가야사』 1997, 혜안 p25
● 가야의 기반
1.경제적 기반
전기가야연맹을 이루는 소국들의 성장기반을 살펴볼 때, 그 들의 경제기반은 도작(稻作)을 비롯한 농경문화와 조개채취를 비롯한 어로문화를 저변으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보다 특징적인 것은 그 저변을 통괄하면서 철산업을 일으키고 있던 토광묘 계통 지배집단의 해운을 이용한 중개무역이었다고 하겠다. 특히 김해 가야국은 낙랑으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입하여 지속적인 문화축적을 이루기도 하고, 그중 일부를 경상내륙지방이나 왜지(倭紙)등에 공급하여 중개무역이익을 보면서 그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증가시켜 나가기도 하였을 것이다. 즉, 낙랑과의 원격지교역이라는 요소가 가야국을 비롯한 전기가야연맹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인다. 김태식 『한국고대사론』 p95
오늘날 우리가 김해지역을 찾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영남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넓은 들이다. 그래서 어떤이는 가야의 성장기반을 낙동강하류의 충적평야에서 이루어진 농산물생산에서 찾기도 한다. 安春培 외 金元經/潘夫『加耶文化硏究 創刊號』1990, 신라대학교 p61
볍씨 자국이 남아 있는 무문토기 조각은 이때에 이르러 다양한 도작(稻作)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주거지가 강변 저지대인 점도 도작농경과 관계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경상도지역의 철자원이 독자적으로 광범위하게 개발됨에 따라 각 토착집단들에게는 철광석의 채굴과 제련을 통한 제철기술의 발달, 그리고 이들의 판매 등에서 얻어지는 이익이 엄청났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 지역 국가발전의 원동력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문헌의 기록에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정리해 온 고고학적 자료에 이해서고 뒷받침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철 생산은 당연히 외부세력과의 교역을 의미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가야의 여러 소국의 성격 변화를 초래하는 절대적인 요인들이었다. 그 예로서 낙랑문물의 남한 전파는 변진지역과의 철 무역을 통해서 활발하게 실시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진해에서의 낙랑식 등잔, 김해에서의 유리화천(貨泉)의 발견 등은 모두 그러한 결과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교역은 정치적, 문화적, 활동이나 발전의 바탕이 되었고, 여기서 제철사업의 중심지였던 김해에 부력을 축적한 집단이 지배적 존재로 등장하여 정치적 통합의 단서가 되었을 것이다. 윤석효 『신편가야사』 1997, 혜안 p44~50
철은 고대국가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는데, 과거의 변진시대 가운데서도 낙동강하류지역의 김해지역은 초기철기유적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이고 오늘날에도 낙동강하류권(경주 및 김해)의 자철광상 17개소 가운데 13개가 김해일대에,분포하고 있고 김해부근에는 노두철광상 만도 9개소가 있는 것으로 나차나고 있어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의 철은 바로 김해일원의 철을 가프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재비있는 사실은 현지조사시에 김해지역에서 가장 철의 매장량이 많은 것으로 확인된 곳은 무척산인 것으로 전문하였는데, 지리지에 나타나는 무척산의 명칭이 근세까지도 “식산”이라는 것이다. “먹을 것이 나는 산”이라는 뜻에서
● 가야의 연구가 미진한 이유
고대 한일관계의 실상을 밝히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가야문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가야사연구는 한국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미진한 부분의 하나이다. 한국고대사 연구에서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의 연구는 고고학적 자료에 의한 추론위주가 된 구성이 허용되기도 하지만 고대국가의 형성기부터는 문제가 달라진다. 안춘배 『加耶文化硏究 創刊號』1990, 신라대학교 p45~46
가야사는 백제사신라사에 비하여 그 내용이 매우 모호하여, 그 줄거리조차 세우지 못해 온 형편이다. 그것은 물론 사료의 절대적인 부족에서 온 것으로서, 가야 사료라면, 삼국유사의 가락국기, 삼국사기에 보이는 몇 개의 연대기가 거의 전부요, 그 밖에 약간의 단편적 기록들이 있기는 하지만 가야사의 전과정을 살피기에는 너무도 소략하다. 천관우 『가야사 연구』1997, 일조각 p3
● 任那日本府說
가야연맹은 그 후 전반적으로 약화된 상태에서 백제 및 신라의 침략을 외교적으로 견제하여 나가면서 독립성을 유지코자 하였는데,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료는 일본서기 흠명기(欽命紀)에 임나일본부 관계 기사밖에 없다. 그러므로 가야연맹의 역사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일단 사료상에 나타나는 임나일본부의 문제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는 일본서기 흠명기(欽命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나, 6세기 중엽에는 아직 일본이라는 국명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당시의 명칭일 수는 없다. (金秦植『加耶聯盟史)-이병도논문이름은 김태식 책 참조하자 1993, 일조각 p221
가야에 관해 일본에서는 4세기 후반에 ‘임나일본부’라는 관청을 두고 직접 지배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 당시는 일본역사에서 신화시대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 없고 일본이라는 국호마저 8세기 이후에야 사용되는 것이므로, 이는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억지 논리로 이해하면 된다.
● 가야사 연구의 필요성
종래의 가야 제국에 관한 연구들은 흔히 가야를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사회로 인정하여 부족국가 혹은 부족연맹사회로 보거나 아니면 한정된 소국으로 낮추어 보고 있다. 또한 연구대상을 삼는 데 있어서도 가야 제국 자체의 역사를 기본으로 하지 않고, 이를 일본열도에다 붙여서 그 정치적 세력이라든가 도는 가야 내지 임나 제국과의 관계분석에 역점을 두는 둥 빗나간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이제는 가야 제국 자체의 역사적 발전에 관한 사실적 검토가 있는데 이제는 가야 제국 자체의 역사적 발전에 관한 사실적 검토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즉 가야에 대한 발전적 인식이 전제된 뒤에 일본열도의 문헌적 사료와 고고학적 자료들과의 올바른 비교연구가 가능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고대 한일관계에 대한 참된 인식과 실체의 규명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윤석효 『신편가야사』 1997, 혜안 p25
● 가야의 기반
1.경제적 기반
전기가야연맹을 이루는 소국들의 성장기반을 살펴볼 때, 그 들의 경제기반은 도작(稻作)을 비롯한 농경문화와 조개채취를 비롯한 어로문화를 저변으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보다 특징적인 것은 그 저변을 통괄하면서 철산업을 일으키고 있던 토광묘 계통 지배집단의 해운을 이용한 중개무역이었다고 하겠다. 특히 김해 가야국은 낙랑으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입하여 지속적인 문화축적을 이루기도 하고, 그중 일부를 경상내륙지방이나 왜지(倭紙)등에 공급하여 중개무역이익을 보면서 그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증가시켜 나가기도 하였을 것이다. 즉, 낙랑과의 원격지교역이라는 요소가 가야국을 비롯한 전기가야연맹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인다. 김태식 『한국고대사론』 p95
오늘날 우리가 김해지역을 찾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영남지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넓은 들이다. 그래서 어떤이는 가야의 성장기반을 낙동강하류의 충적평야에서 이루어진 농산물생산에서 찾기도 한다. 安春培 외 金元經/潘夫『加耶文化硏究 創刊號』1990, 신라대학교 p61
볍씨 자국이 남아 있는 무문토기 조각은 이때에 이르러 다양한 도작(稻作)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주거지가 강변 저지대인 점도 도작농경과 관계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경상도지역의 철자원이 독자적으로 광범위하게 개발됨에 따라 각 토착집단들에게는 철광석의 채굴과 제련을 통한 제철기술의 발달, 그리고 이들의 판매 등에서 얻어지는 이익이 엄청났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 지역 국가발전의 원동력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문헌의 기록에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정리해 온 고고학적 자료에 이해서고 뒷받침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철 생산은 당연히 외부세력과의 교역을 의미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가야의 여러 소국의 성격 변화를 초래하는 절대적인 요인들이었다. 그 예로서 낙랑문물의 남한 전파는 변진지역과의 철 무역을 통해서 활발하게 실시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진해에서의 낙랑식 등잔, 김해에서의 유리화천(貨泉)의 발견 등은 모두 그러한 결과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교역은 정치적, 문화적, 활동이나 발전의 바탕이 되었고, 여기서 제철사업의 중심지였던 김해에 부력을 축적한 집단이 지배적 존재로 등장하여 정치적 통합의 단서가 되었을 것이다. 윤석효 『신편가야사』 1997, 혜안 p44~50
철은 고대국가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는데, 과거의 변진시대 가운데서도 낙동강하류지역의 김해지역은 초기철기유적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이고 오늘날에도 낙동강하류권(경주 및 김해)의 자철광상 17개소 가운데 13개가 김해일대에,분포하고 있고 김해부근에는 노두철광상 만도 9개소가 있는 것으로 나차나고 있어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의 철은 바로 김해일원의 철을 가프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재비있는 사실은 현지조사시에 김해지역에서 가장 철의 매장량이 많은 것으로 확인된 곳은 무척산인 것으로 전문하였는데, 지리지에 나타나는 무척산의 명칭이 근세까지도 “식산”이라는 것이다. “먹을 것이 나는 산”이라는 뜻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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