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전쟁의 배경
Ⅱ. 전쟁의 원인
Ⅲ. 전쟁의 순서
Ⅳ. 전쟁의 경과
Ⅴ. 전쟁의 대내적 영향
Ⅵ. 전쟁의 대외적 영향
Ⅶ. 정 리
Ⅱ. 전쟁의 원인
Ⅲ. 전쟁의 순서
Ⅳ. 전쟁의 경과
Ⅴ. 전쟁의 대내적 영향
Ⅵ. 전쟁의 대외적 영향
Ⅶ. 정 리
본문내용
지막 제3단계로 한국 해병 2개 대대, 미국 제1해병사단은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고 20일 주력부대가 한강을 건너 26일 정오에는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작전을 끝냈다.
8. 1950년 10월 1일 38도선 - 북으로 북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워커는 인천에 상륙한 군대가 서울에 진입할 무렵 낙동강 전선을 뚫고 북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북한군은 서울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사기가 떨어졌고 재빨리 북쪽으로 후퇴를 시작했다. 특히, 미군은 777부대라는 특수 임무부대를 만들어 다른 부대보다 먼저 서울로 진격하게 하였고 26일에는 인천에 상륙 했던 부대의 일부와 서울 아래쪽의 오산에서 만났다. 오산은 한국 전쟁 초기에 스미스 부대가 북한군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다. 29일 오늘 약 10일 동안 격렬한 전투 끝에 서울을 되찾았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행사가 열렸고 한국 정부도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감격하여 말문을 쉽게 열지조차 못했지만 서울을 되찾도록 열심히 싸운 유엔군과 한국군 모두를 치하하였다. 모든 국민도 다시 서울에 돌아온 이승만 대통령을 환영해 주었다. 하지만, 서울의 모습은 이전과 달랐다. 폐허가 된 서울, 사람들이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의 비참함 뿐이었다.
9. 1950년 10월 26일 낮 2시 압록강 - 중공군 26만 매복 모른 채 전속진격
한국군이 가장 먼저 한반도 꼭대기에 있는 압록강에 도착하였다. 곧이어 11월, 동부전선의 미군도 압록강에 도착하였다. 압록강은 한반도의 북쪽 끝에 있는 강으로 그들은 이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압록강에 그리 힘을 들이지 않고 올 수 있었다. 38도선을 넘은지 보름만에 북한의 수도인 평양을 점령했고 곧이어 항구 도시인 원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비록 어제(25일) 미군이 중공군으로 보이는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0. 1950년 11월 2일 - 중국의 한국전 참전과 인해술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뛰어난 화력과 많은 폭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엄청난 수의 중공군이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동원해 밀고 내려오는 인해 전술을 쓰는 데는 속수 무책이었다.말 그대로 \"인해(사람의 바다)\"의 공격 앞에 유엔군과 국군은 후퇴를 거듭하였다.
11. 1950년 12월 5일 - 계속되는 후퇴
12월 5일 중국군은 수도 평양을 점령했고 UN군은 계속 후퇴 할 수밖에 없었다. 유엔군이 북쪽으로 진격한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전세는 다시 역전 된 것이다. 맥아더 장군 역시 중국의 참전에 대해 미국이 강력 대응할 것을 주장하였다. 첫째, 미 해군은 중국의 해안을 봉쇄하고 둘째, 중국 본토를 폭격하며 셋째, 대만에 있는 장개석 군대를 참전시키고 넷째, 원자탄 사용도 고려할 것이 그것이었다.
12. 1950년 12월 24일 - 흥남 철수 작전
한편, 장진호에서부터 중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모인 유엔군과 한국군 부대들은 안전하게 철수하기 위해서 흥남 주위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들 주위의 땅은 모두 중국군에게 포위 당했기 때문에 배를 타고 안전한 지역으로 철수할 계획이다. 그들은 피난을 원하는 북한주민들과 함께 철수하였다.
13. 1951년 1월 4일 - 1.4 후퇴
흥남에서 철수가 무사히 성공할 무렵, 서울이 위치한 서부전선은 중국군에게 38선까지 밀렸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날, 제 8군 사령관 워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한국전쟁동안 가장 어려웠던 시기인 낙동강 전선을 막아낸 비운의 장군이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리지웨이가 임명되었고 그는 곧바로 전선으로 날아왔다. 1951년에 접어들면서 중국군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고 서울이 중국군에게 곧 함락당할 것이라는 소식이 있자, 서울 시민들 대부분이 피난길에 나섰다. 두 번째로 서울을 떠나는 피난길이었다. 얼어붙은 한강 위로 사람들의 물결이 이어졌고 그들이 떠난 서울은 적막의 도시로 변했다. 오늘(1월 4일) 리지웨이 사령관도 남쪽으로 후퇴결정하고 금강까지 후퇴하였다. 유엔 공군은 계속해서 보급로를 공격하였고 그로 인해 공산군은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리지웨이는 시간을 얻었고 그 동안 전선을 재정비하였다. 특히, 가장 중요한 일은 의욕을 잃은 장병들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는 지프차와 경비행기로 전선을 돌아다니며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다시 전투가 시작
8. 1950년 10월 1일 38도선 - 북으로 북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워커는 인천에 상륙한 군대가 서울에 진입할 무렵 낙동강 전선을 뚫고 북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북한군은 서울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사기가 떨어졌고 재빨리 북쪽으로 후퇴를 시작했다. 특히, 미군은 777부대라는 특수 임무부대를 만들어 다른 부대보다 먼저 서울로 진격하게 하였고 26일에는 인천에 상륙 했던 부대의 일부와 서울 아래쪽의 오산에서 만났다. 오산은 한국 전쟁 초기에 스미스 부대가 북한군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다. 29일 오늘 약 10일 동안 격렬한 전투 끝에 서울을 되찾았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행사가 열렸고 한국 정부도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감격하여 말문을 쉽게 열지조차 못했지만 서울을 되찾도록 열심히 싸운 유엔군과 한국군 모두를 치하하였다. 모든 국민도 다시 서울에 돌아온 이승만 대통령을 환영해 주었다. 하지만, 서울의 모습은 이전과 달랐다. 폐허가 된 서울, 사람들이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의 비참함 뿐이었다.
9. 1950년 10월 26일 낮 2시 압록강 - 중공군 26만 매복 모른 채 전속진격
한국군이 가장 먼저 한반도 꼭대기에 있는 압록강에 도착하였다. 곧이어 11월, 동부전선의 미군도 압록강에 도착하였다. 압록강은 한반도의 북쪽 끝에 있는 강으로 그들은 이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압록강에 그리 힘을 들이지 않고 올 수 있었다. 38도선을 넘은지 보름만에 북한의 수도인 평양을 점령했고 곧이어 항구 도시인 원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비록 어제(25일) 미군이 중공군으로 보이는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0. 1950년 11월 2일 - 중국의 한국전 참전과 인해술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뛰어난 화력과 많은 폭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엄청난 수의 중공군이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동원해 밀고 내려오는 인해 전술을 쓰는 데는 속수 무책이었다.말 그대로 \"인해(사람의 바다)\"의 공격 앞에 유엔군과 국군은 후퇴를 거듭하였다.
11. 1950년 12월 5일 - 계속되는 후퇴
12월 5일 중국군은 수도 평양을 점령했고 UN군은 계속 후퇴 할 수밖에 없었다. 유엔군이 북쪽으로 진격한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전세는 다시 역전 된 것이다. 맥아더 장군 역시 중국의 참전에 대해 미국이 강력 대응할 것을 주장하였다. 첫째, 미 해군은 중국의 해안을 봉쇄하고 둘째, 중국 본토를 폭격하며 셋째, 대만에 있는 장개석 군대를 참전시키고 넷째, 원자탄 사용도 고려할 것이 그것이었다.
12. 1950년 12월 24일 - 흥남 철수 작전
한편, 장진호에서부터 중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모인 유엔군과 한국군 부대들은 안전하게 철수하기 위해서 흥남 주위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들 주위의 땅은 모두 중국군에게 포위 당했기 때문에 배를 타고 안전한 지역으로 철수할 계획이다. 그들은 피난을 원하는 북한주민들과 함께 철수하였다.
13. 1951년 1월 4일 - 1.4 후퇴
흥남에서 철수가 무사히 성공할 무렵, 서울이 위치한 서부전선은 중국군에게 38선까지 밀렸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날, 제 8군 사령관 워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한국전쟁동안 가장 어려웠던 시기인 낙동강 전선을 막아낸 비운의 장군이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리지웨이가 임명되었고 그는 곧바로 전선으로 날아왔다. 1951년에 접어들면서 중국군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고 서울이 중국군에게 곧 함락당할 것이라는 소식이 있자, 서울 시민들 대부분이 피난길에 나섰다. 두 번째로 서울을 떠나는 피난길이었다. 얼어붙은 한강 위로 사람들의 물결이 이어졌고 그들이 떠난 서울은 적막의 도시로 변했다. 오늘(1월 4일) 리지웨이 사령관도 남쪽으로 후퇴결정하고 금강까지 후퇴하였다. 유엔 공군은 계속해서 보급로를 공격하였고 그로 인해 공산군은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리지웨이는 시간을 얻었고 그 동안 전선을 재정비하였다. 특히, 가장 중요한 일은 의욕을 잃은 장병들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는 지프차와 경비행기로 전선을 돌아다니며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다시 전투가 시작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