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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웃한 중국을 노리고 있었다. 몽골인들에게 인구 1억이 넘는 중국은 풍요의 나라 그 자체였다. 농부와 학자, 기술자와 행정 관료가 가득한 나라, 값진 원료와 섬세한 세공으로 만들어진 갑옷과 무기들이 넘쳐나는 나라, 아름다운 여자와 말, 그리고 침이 절로 나는 산해진미가 가득한 나라. 중국은 가축을 방목해 젖과 치즈, 그리고 고기만을 얻는 몽골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풍족한 나라였다.
중국은 이웃 변방의 민족들이 자기들에게 시기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도, 그래서 그들이 언제라도 공격해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길이 5000킬로미터의 만리장성을 세워 초원에 살고 있는 민족들로부터 풍요로움을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만리장성보다 더 효과적이었던 방어 수단은 바로 중국의 외교 정책이었다.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중국은 초원 부족들간의 관계를 교묘하게 조종해 서로 싸움을 벌이도록 만들었다. 계속되는 전투로 특정 권력이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이는 황제의 제국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치밀한 장치였다. 그러나 1200년경에 이르러 분할해 지배하라.는 정책은 와해되고 만다. 중국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남송과 서하, 금나라로 분열됐기 때문이다. 칭기즈 칸은 새로 편성한 군사의 실력을 세 나라 중 가장 약한 서하를 상대로 시험했다. 1209년 칭기즈 칸의 군대는 고비 사막을 가로질러 서하로 향했다. 황량한 초원을 누비고 다니던 몽골족에게 사막을 건너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몽골군은 서하의 두터운 성곽 앞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도시 하나를 점령하긴 했지만, 그 후엔 계속 패배를 겪었다. 기마병이 주를 이루는 몽골군은 성벽을 공략해야 하는 전투에서 서툰 탓이엇다.
여기서 칭기즈 칸은 성곽으로부터 적들을 유인하기 위한 전술을 쓰기로 했다. 몇몇 감시병들과 함께 식량마차를 세워 놓도록 지시하고 적의 동태를 살폈다. 얼마 되지 않는 상대군의 수를 보고 서하군은 섣불리 마차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순간 매복하고 있던 몽골의 기마병들이 달려 나와 적을 죽이고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서하의 수도로 가는 길이 뚫렸다. 그리고 1210년 서하의 왕은 공물을 바치고 자신의 딸을 칭기즈 칸의 아내로 내주면서 칭기즈 칸에게 종주권을 인정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몽골군의 기세에 위협을 느낀 위구르, 키르기스, 오이라트 등 몽골 주변의 부족들도 스스로 항복해 왔다. 몽골군의 위력은 개량된 무기를 통해 증가되었다. 화살의 길이가 너무 짧거나 길 경우, 멀리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적당한 길이의 활을 만들어 최대한 멀리 날아 가도록 제작했다.
화살촉도 용도에 따라 개량해 인명 살상용,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심리전용, 소리를 내는 동시에 상처를 입히는 다목적용 등 다양한 기능의 화살을 만들어 냈다. 몽골의 군사 기술자들은 일직선이던 전투용 칼날을 휘어진 곡선으로 변형시켰다. 날이 일직선이면 한 번 공격할 때 치거나 찌르는 것 중 한 가지만 가능한 데 비해, 날이 휘어 있으면 치고 베는 효과를 동시에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하를 접수한 몽골의 지도자는 1211년, 화북 지방에 위치한 금나라를 치기로 결정했다. 몽골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금나라의 국경 안으로 들어갔다. 출정한 군인들은 여분의 말을 한 필씩 더 가지고 이동했고, 계속 말을 갈아타면서 빠른 속도로 적진을 돌파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은 금나라의 수도, 중두의 공격을 서두르지 않았다. 현재 베이징에 위치한 이 견고한 성곽 도시를 치기 위해 우회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금나라의 영토였던 만주 평야와 화북 지역의 농경지와 농가를 모조리 불태웠고, 성을 공격할 때는 부대 앞에 생포한 인질들을 방어막으로 세워 진격하는 잔인한 전술까지 동원했다. 항복한 도시는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었지만, 저항한 도시는 철저히 파괴됐다. 몽골군은 이 무렵 이미 중국과 페르시아에서 데려온 기술자들을 동원해 성을 부술 수 있는 투석기도 갖추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3년이 지난 1214년, 금나라는 칭기즈 칸이 제시한 평화협상을 받아들였다.
금나라의 황제는 몽골군이 물러나는 조건으로 금은보화와 말 3000필, 노예 500명이라는 엄청난 물량의 조공을 바쳤다. 그리고 칭기즈 칸은 금의 공주를 또 한 명의 아내로 얻게 됐다. 그러나 어렵게 얻은 금나라와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후 금나라는 무자비한 적에게서 멀리 벗어나고자 수도를 남부에 위치한 카이펑으로 옮기는데, 칭기즈 칸은 이를 반란의 신호로 여겼다. 곧 몽골군은 중두를 포위해 맹공격을 쏟아 부었고, 1215년 먹을 것이 바닥난 도시는 항복을 택했다. 그리고 도시는 곧 피바다가 되었다. 수천 명이 칼부림을 당했고, 여자들은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성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몽골군에게 완전히 제압된 중두는 한 달 동안이나 화염에 휩싸여야 했다.
1216년 봄 칭기즈 칸은 4000명의 군사를 금나라를 남겨 두고 몽골로 돌아왔다. 몽골의 서쪽 변방의 서요에서 불안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이만족의 쿠출르쿠가 자신의 부족사람들을 규합해 군대를 조직하면서 몽골의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칭기즈 칸은 이곳에 자신이 가장 신임하던 장군 제베를 파견했다. 당시 쿠출르쿠는 주민들 대다수가 믿는 이슬람교를 탄압하고 폭력적인 종교탄압을 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몽골군이 나타났을 때 주민들은 오히려 이들을 해방자로 여기며 환영했다. 몽골군의 보복은 반란을 꾀한 쿠출르쿠에 한정된 것 이었다. 병사들은 모든 종교를 존중하고, 함부로 약탈하지 말라는 칭기즈 칸의 명을 충실히 따랐다. 반면 도주 중이던 쿠출르쿠는 추격대에게 잡혀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이제 몽골의 서쪽 국경은 호레즘 제국과 접하게 됐다. 13세기 초부터 세력을 길러 온 호레즘의 영토는 지금의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지의 영역에 걸쳐 있었다. 칭기즈 칸은 새로 이웃이 된 호레즘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했다. 호레즘의 술탄 무하마드 2세에게 선물 공세를 퍼부었고, 자기가 동쪽의 지배자이듯 무하마드를 서쪽의 지배자로 인정하겠다며 서로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한다는
중국은 이웃 변방의 민족들이 자기들에게 시기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도, 그래서 그들이 언제라도 공격해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길이 5000킬로미터의 만리장성을 세워 초원에 살고 있는 민족들로부터 풍요로움을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만리장성보다 더 효과적이었던 방어 수단은 바로 중국의 외교 정책이었다.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중국은 초원 부족들간의 관계를 교묘하게 조종해 서로 싸움을 벌이도록 만들었다. 계속되는 전투로 특정 권력이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다. 이는 황제의 제국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치밀한 장치였다. 그러나 1200년경에 이르러 분할해 지배하라.는 정책은 와해되고 만다. 중국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남송과 서하, 금나라로 분열됐기 때문이다. 칭기즈 칸은 새로 편성한 군사의 실력을 세 나라 중 가장 약한 서하를 상대로 시험했다. 1209년 칭기즈 칸의 군대는 고비 사막을 가로질러 서하로 향했다. 황량한 초원을 누비고 다니던 몽골족에게 사막을 건너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몽골군은 서하의 두터운 성곽 앞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도시 하나를 점령하긴 했지만, 그 후엔 계속 패배를 겪었다. 기마병이 주를 이루는 몽골군은 성벽을 공략해야 하는 전투에서 서툰 탓이엇다.
여기서 칭기즈 칸은 성곽으로부터 적들을 유인하기 위한 전술을 쓰기로 했다. 몇몇 감시병들과 함께 식량마차를 세워 놓도록 지시하고 적의 동태를 살폈다. 얼마 되지 않는 상대군의 수를 보고 서하군은 섣불리 마차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순간 매복하고 있던 몽골의 기마병들이 달려 나와 적을 죽이고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서하의 수도로 가는 길이 뚫렸다. 그리고 1210년 서하의 왕은 공물을 바치고 자신의 딸을 칭기즈 칸의 아내로 내주면서 칭기즈 칸에게 종주권을 인정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몽골군의 기세에 위협을 느낀 위구르, 키르기스, 오이라트 등 몽골 주변의 부족들도 스스로 항복해 왔다. 몽골군의 위력은 개량된 무기를 통해 증가되었다. 화살의 길이가 너무 짧거나 길 경우, 멀리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적당한 길이의 활을 만들어 최대한 멀리 날아 가도록 제작했다.
화살촉도 용도에 따라 개량해 인명 살상용,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심리전용, 소리를 내는 동시에 상처를 입히는 다목적용 등 다양한 기능의 화살을 만들어 냈다. 몽골의 군사 기술자들은 일직선이던 전투용 칼날을 휘어진 곡선으로 변형시켰다. 날이 일직선이면 한 번 공격할 때 치거나 찌르는 것 중 한 가지만 가능한 데 비해, 날이 휘어 있으면 치고 베는 효과를 동시에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하를 접수한 몽골의 지도자는 1211년, 화북 지방에 위치한 금나라를 치기로 결정했다. 몽골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금나라의 국경 안으로 들어갔다. 출정한 군인들은 여분의 말을 한 필씩 더 가지고 이동했고, 계속 말을 갈아타면서 빠른 속도로 적진을 돌파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은 금나라의 수도, 중두의 공격을 서두르지 않았다. 현재 베이징에 위치한 이 견고한 성곽 도시를 치기 위해 우회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금나라의 영토였던 만주 평야와 화북 지역의 농경지와 농가를 모조리 불태웠고, 성을 공격할 때는 부대 앞에 생포한 인질들을 방어막으로 세워 진격하는 잔인한 전술까지 동원했다. 항복한 도시는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었지만, 저항한 도시는 철저히 파괴됐다. 몽골군은 이 무렵 이미 중국과 페르시아에서 데려온 기술자들을 동원해 성을 부술 수 있는 투석기도 갖추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3년이 지난 1214년, 금나라는 칭기즈 칸이 제시한 평화협상을 받아들였다.
금나라의 황제는 몽골군이 물러나는 조건으로 금은보화와 말 3000필, 노예 500명이라는 엄청난 물량의 조공을 바쳤다. 그리고 칭기즈 칸은 금의 공주를 또 한 명의 아내로 얻게 됐다. 그러나 어렵게 얻은 금나라와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후 금나라는 무자비한 적에게서 멀리 벗어나고자 수도를 남부에 위치한 카이펑으로 옮기는데, 칭기즈 칸은 이를 반란의 신호로 여겼다. 곧 몽골군은 중두를 포위해 맹공격을 쏟아 부었고, 1215년 먹을 것이 바닥난 도시는 항복을 택했다. 그리고 도시는 곧 피바다가 되었다. 수천 명이 칼부림을 당했고, 여자들은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성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몽골군에게 완전히 제압된 중두는 한 달 동안이나 화염에 휩싸여야 했다.
1216년 봄 칭기즈 칸은 4000명의 군사를 금나라를 남겨 두고 몽골로 돌아왔다. 몽골의 서쪽 변방의 서요에서 불안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이만족의 쿠출르쿠가 자신의 부족사람들을 규합해 군대를 조직하면서 몽골의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칭기즈 칸은 이곳에 자신이 가장 신임하던 장군 제베를 파견했다. 당시 쿠출르쿠는 주민들 대다수가 믿는 이슬람교를 탄압하고 폭력적인 종교탄압을 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몽골군이 나타났을 때 주민들은 오히려 이들을 해방자로 여기며 환영했다. 몽골군의 보복은 반란을 꾀한 쿠출르쿠에 한정된 것 이었다. 병사들은 모든 종교를 존중하고, 함부로 약탈하지 말라는 칭기즈 칸의 명을 충실히 따랐다. 반면 도주 중이던 쿠출르쿠는 추격대에게 잡혀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이제 몽골의 서쪽 국경은 호레즘 제국과 접하게 됐다. 13세기 초부터 세력을 길러 온 호레즘의 영토는 지금의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지의 영역에 걸쳐 있었다. 칭기즈 칸은 새로 이웃이 된 호레즘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했다. 호레즘의 술탄 무하마드 2세에게 선물 공세를 퍼부었고, 자기가 동쪽의 지배자이듯 무하마드를 서쪽의 지배자로 인정하겠다며 서로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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