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들어가기
2.칭기즈칸 배경
3.칭기즈칸 성공 요인
결론
2.칭기즈칸 배경
3.칭기즈칸 성공 요인
결론
본문내용
에 키를 대보게 한 뒤 거의 모두를 처참하게 살해 했다. 자신을 포로로 잡아갔던 타이시우드족은 재조차 남기지 않고 말살했다. 또한 부르테를 납치해 갔던 메르키드족을 처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보낸 사신을 살해하고 호레즘 전쟁을 유도한 오트라르 성의 이날축은 귀와 눈에 끓는 은을 부어 살해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스스로 전쟁을 불러들인 뒤 도주 길에 나선 호레즘의 군주 무하마드는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 처벌하라는 칭기스칸의 명령을 받은 제베와 수베타이의 끈질긴 추적을 받았고 그 넓은 땅에서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채 카스피해의 한 섬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복수에 대한 집념은 결국 그를 죽음으로 이끌어 갔다. 노구를 이끌고 나선 2차 서하 원정도 호레즘 원정 때 도움을 주지 않는 대신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던 탕구드족에 대한 응징으로 단행된 것이었다. 그는 이 원정으로 서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도록 철저히 말살시켰지만 결국 자신도 원정 중에 숨지고 말았다.
6.어머니
1)개와 어머니가 가장 두려웠던 칭기스칸
칭기스칸은 지극히 인간적인 면도 지니고 있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심약한 일면을 지니고 있어 아버지 예수게이가 그를 미래의 부인인 부르테의 집에 맡기고 올 때 장인에게 이 점을 주지시키기도 했다. 또 어머니 호엘룬을 두려워해 그 앞에서는 언제나 여러 자식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인간 칭기스칸을 총체적으로 보면 그 자신이 가진 친화력과 냉철한 판단력, 권력을 향한 강한 의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열린 마음 등이 어우러져 세계를 장악할 수 있었던 원초적인 힘이 됐을 것이다.
결론
칭기즈 칸은 다면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뛰어난 체력, 강한 목표의식,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고집이 센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내들이나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조언을 즐겨 들었다. 남을 속이기도 했지만 사소한 일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토그릴이나 자무카와는 달리 충성심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상관을 배신하는 적수들은 칭기즈 칸으로부터 차가운 대접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는 그들의 배신을 이용할 줄도 알았다. 그는 종교적 신앙이 강하여 신이 자신에게 내려준 신성한 사명을 늘 의식했고, 위기의 순간마다 몽골족의 최고신에게 깊은 경배를 올렸다. 이같은 경향은 그의 유년시절에 특히 강했다. 그러나 스텝 지역을 벗어나 외부의 낯선 정착문화와 접촉하게 되면서 그의 성품 가운데 다른 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학살과 약탈에 의해 얻어지는 직접적인 이득 외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고, 때로는 복수의 일념으로 불타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평생 자신에게 충성할 사람들을 주위에 끌어모았다. 그리하여 그의 추종자들 중에는 동료 유목민뿐만 아니라 정착문화 세계에 사는 문화인들도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적응력이 뛰어나고 배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군사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조직, 기강, 기동성, 무자비한 목적의식 등이 근본적인 바탕이 되었다. 특히 피정복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약탈을 자행하는 것이 그가 정기적으로 사용해온 무기였다. 성읍들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그 요구에 응하지 않는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이 일종의 심리전이었다고 이야기되어 왔지만, 그가 사용한 방법은 20세기에 저질러진 학살에 비교될 만큼 잔인했다. 학살정책은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저항의식을 꺾고자 한 것이었지만 학살을 위한 학살도 많이 자행되었다. 칭기즈 칸의 업적은 위대했다. 그는 유목민 부족을 모두 통일했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화레즘 샤나 금 같은 대제국을 정복했다. 또한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의 부족들을 피폐시키지 않았다. 그는 아들인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선임하고, 다른 아들들이 오고타이의 말에 따르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으며, 오고타이에게 강성한 군대와 국가를 물려주었다. 칭기즈 칸이 죽었을 때, 베이징에서부터 카스피 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몽골 제국의 영토로 복속되었고, 그의 부장들은 페르시아와 러시아를 침공했다. 또한 그의 후계자들은 중국, 페르시아, 러시아의 대부분 지역에까지 세력의 판도를 넓혔다. 그들은 칭기즈 칸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그들의 정복지역을 잘 조직된 제국으로 개편하는 일을 실행했다. 칭기즈 칸은 파괴와 약탈을 자행했으나 그가 벌인 정복전은 몽골 제국의 출현을 처음으로 알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몽골 제국은 중세와 현대를 통틀어 가장 영토가 큰 제국이었다. 몽골하면 나는 징기스칸을 연상한다. 징기스칸은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정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유목민족인 이들은 항상 이동하는 속성 때문인지, 자신에 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징기스칸 연구는 외국의 기록에 의지해야 한다.
세계사를 읽어보면, 징기스칸 군대가 얼마나 포악하였는지, 그리고 얼마나 잔인하게 사람을 죽였는가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러다가 회교에 관한 책을 읽던 중, 회교의 사회윤리법이 징기스칸이 개발한 법을 본받았다는 내용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법을 무스림은 시야사(siyasa)라고 하는데, 몇 가지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 법을 보면, 형법은 엄정하고, 관습법은 인간미 넘치는 따스함이 있다.
간음한 자, 고의로 거짓말한 자, 간첩, 첩보원은 사형에 처한다. 허락없이 죄수에게 음식이나 옷을 주는 사람, 도주하는 노예를 보고도 신고하지 않은 자, 이들도 사형에 처한다. 군인은 자기 소유의 물건을 반드시 신고해야 한다. 정복한 후에는 몽골인과 비몽골인의 구별은 금지한다. 관습법은 아주 특이하다. 음식에 관한 것을 적어보자. 다른 사람이 보고 있을 때, 혼자 음식을 먹지 않는다.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한다. 식사 때는 다른 사람보다 많이 먹어서는 안된다. 나그네가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으면, 그도 함께 먹을 권리가 있다. 징기스칸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유럽 사람들은 침략을 당한 형편이었기에 징기스칸은 죽이고 싶은 미운 대상이었고, 또한 저주의 대상이었다. 그에 관해 글을 쓰면 좋은 말이 써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유럽인의 안목으로 본 징기스칸을 배웠을 뿐이다.
6.어머니
1)개와 어머니가 가장 두려웠던 칭기스칸
칭기스칸은 지극히 인간적인 면도 지니고 있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심약한 일면을 지니고 있어 아버지 예수게이가 그를 미래의 부인인 부르테의 집에 맡기고 올 때 장인에게 이 점을 주지시키기도 했다. 또 어머니 호엘룬을 두려워해 그 앞에서는 언제나 여러 자식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인간 칭기스칸을 총체적으로 보면 그 자신이 가진 친화력과 냉철한 판단력, 권력을 향한 강한 의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열린 마음 등이 어우러져 세계를 장악할 수 있었던 원초적인 힘이 됐을 것이다.
결론
칭기즈 칸은 다면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뛰어난 체력, 강한 목표의식, 강철 같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고집이 센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내들이나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조언을 즐겨 들었다. 남을 속이기도 했지만 사소한 일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토그릴이나 자무카와는 달리 충성심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상관을 배신하는 적수들은 칭기즈 칸으로부터 차가운 대접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는 그들의 배신을 이용할 줄도 알았다. 그는 종교적 신앙이 강하여 신이 자신에게 내려준 신성한 사명을 늘 의식했고, 위기의 순간마다 몽골족의 최고신에게 깊은 경배를 올렸다. 이같은 경향은 그의 유년시절에 특히 강했다. 그러나 스텝 지역을 벗어나 외부의 낯선 정착문화와 접촉하게 되면서 그의 성품 가운데 다른 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학살과 약탈에 의해 얻어지는 직접적인 이득 외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고, 때로는 복수의 일념으로 불타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평생 자신에게 충성할 사람들을 주위에 끌어모았다. 그리하여 그의 추종자들 중에는 동료 유목민뿐만 아니라 정착문화 세계에 사는 문화인들도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적응력이 뛰어나고 배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군사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조직, 기강, 기동성, 무자비한 목적의식 등이 근본적인 바탕이 되었다. 특히 피정복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약탈을 자행하는 것이 그가 정기적으로 사용해온 무기였다. 성읍들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그 요구에 응하지 않는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이 일종의 심리전이었다고 이야기되어 왔지만, 그가 사용한 방법은 20세기에 저질러진 학살에 비교될 만큼 잔인했다. 학살정책은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저항의식을 꺾고자 한 것이었지만 학살을 위한 학살도 많이 자행되었다. 칭기즈 칸의 업적은 위대했다. 그는 유목민 부족을 모두 통일했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화레즘 샤나 금 같은 대제국을 정복했다. 또한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의 부족들을 피폐시키지 않았다. 그는 아들인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선임하고, 다른 아들들이 오고타이의 말에 따르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으며, 오고타이에게 강성한 군대와 국가를 물려주었다. 칭기즈 칸이 죽었을 때, 베이징에서부터 카스피 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몽골 제국의 영토로 복속되었고, 그의 부장들은 페르시아와 러시아를 침공했다. 또한 그의 후계자들은 중국, 페르시아, 러시아의 대부분 지역에까지 세력의 판도를 넓혔다. 그들은 칭기즈 칸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그들의 정복지역을 잘 조직된 제국으로 개편하는 일을 실행했다. 칭기즈 칸은 파괴와 약탈을 자행했으나 그가 벌인 정복전은 몽골 제국의 출현을 처음으로 알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몽골 제국은 중세와 현대를 통틀어 가장 영토가 큰 제국이었다. 몽골하면 나는 징기스칸을 연상한다. 징기스칸은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정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유목민족인 이들은 항상 이동하는 속성 때문인지, 자신에 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징기스칸 연구는 외국의 기록에 의지해야 한다.
세계사를 읽어보면, 징기스칸 군대가 얼마나 포악하였는지, 그리고 얼마나 잔인하게 사람을 죽였는가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러다가 회교에 관한 책을 읽던 중, 회교의 사회윤리법이 징기스칸이 개발한 법을 본받았다는 내용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법을 무스림은 시야사(siyasa)라고 하는데, 몇 가지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 법을 보면, 형법은 엄정하고, 관습법은 인간미 넘치는 따스함이 있다.
간음한 자, 고의로 거짓말한 자, 간첩, 첩보원은 사형에 처한다. 허락없이 죄수에게 음식이나 옷을 주는 사람, 도주하는 노예를 보고도 신고하지 않은 자, 이들도 사형에 처한다. 군인은 자기 소유의 물건을 반드시 신고해야 한다. 정복한 후에는 몽골인과 비몽골인의 구별은 금지한다. 관습법은 아주 특이하다. 음식에 관한 것을 적어보자. 다른 사람이 보고 있을 때, 혼자 음식을 먹지 않는다. 가급적이면, 다른 사람을 초대하여 함께 식사한다. 식사 때는 다른 사람보다 많이 먹어서는 안된다. 나그네가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으면, 그도 함께 먹을 권리가 있다. 징기스칸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유럽 사람들은 침략을 당한 형편이었기에 징기스칸은 죽이고 싶은 미운 대상이었고, 또한 저주의 대상이었다. 그에 관해 글을 쓰면 좋은 말이 써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유럽인의 안목으로 본 징기스칸을 배웠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