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제1차세계대전의 배경
(1) 독일통일의 유산
(2) 개전의 위기
(3) 비스마르크체제의 성립과 붕괴
(4) 발칸문제
(5) 보스니아의 위기
(6) 영국·독일의 대립
2. 전쟁의 발발과 경위
(1) 사라예보사건과 7월 위기
(2) 슐리펜계획
(3) 타넨 베르크전쟁
(4) 마른전투
(5) 갈리폴리 해전
(6) 베르덩 전투
(7) 솜 전투
3. 전쟁의 실상.
4.각 국의 정세.
5. 미국의 참전과 러시아 혁명
6. 전쟁의 종결과 파리강화회의
(1) 독일통일의 유산
(2) 개전의 위기
(3) 비스마르크체제의 성립과 붕괴
(4) 발칸문제
(5) 보스니아의 위기
(6) 영국·독일의 대립
2. 전쟁의 발발과 경위
(1) 사라예보사건과 7월 위기
(2) 슐리펜계획
(3) 타넨 베르크전쟁
(4) 마른전투
(5) 갈리폴리 해전
(6) 베르덩 전투
(7) 솜 전투
3. 전쟁의 실상.
4.각 국의 정세.
5. 미국의 참전과 러시아 혁명
6. 전쟁의 종결과 파리강화회의
본문내용
때까지 굴하지 않고 극복해 나가도록 유도하였다. 리보내각의 내무장관이었던 L.J. 말비와 전 총리였던 J.P.M.A. 카이요 등의 프랑스정계 거물들이 클레망소에 의하여 독일과 내통하고 조국을 배신하는 반역죄를 범했다고 고발될 정도로 이 내각의 반전 평화운동의 탄압은 강력하였다. 또한 프랑스·영국도 대전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클레망소나 로이드 조지에 의한 독재체제가 수립되었다.
5. 미국의 참전과 러시아 혁명
독일과 국교를 단절한 뒤 미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것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강행한 독일군부수뇌들도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미리 알지 못했던 것은 미국이 전쟁준비가 신속하게 진행되어 완전무장한 미국군인들이 영국이 굴복전에 유럽전선에 도착하는 상태였다. 독일군에 의해 보급이 끊긴 영국은 그들 생각으로는 6개월이내에 굴복할 것으로 보았으나 영국은 막대한 손실을 입으면서도 호송선단제에 의해 봉쇄작전을 견뎌낼 수 있었다.이 후 투입된 미국 병력과 풍부한 군수물자 투입이 유럽전선에서의 독일의 패전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 시기에 윌슨은 상하 양원합동회의 연설에서 강화의 구체적 조건인 14개조를 발표 하였다. 윌슨은 이를 통해 공개외교 확립을 요구하며 대전 중 횡행한 비밀외교와 정면으로 대결할 자세를 보였고, 또한 국제연맹이라는 국제기구의 설립을 호소하였다. 또한 이 조항은 벨기에의 원상회복, 알자스 로렌을 프랑스에게 돌려주는 문제, 폴란드 국가의 설립 등이 포함 되어 있었다. 1916년 브루실로프공세가 중도에 좌절된 뒤 러시아군의 세력은 쇠퇴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린 러시아국민의 반전분위기는 엄청난 것이었다. 17년 3월의 <3월혁명>에 의해 로마노프왕조는 붕괴되었고 그 뒤를 이어받은 리보프의 임시정부는 지금까지 다를 바 없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연합국측을 안심시켰으나 전쟁 때문에 극도로 지쳐 버린 국민은 실망하였다. 정권은 리보프로부터 케렌스키에게로 이어졌으나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는 여전히 저조하여 11월 7일에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11월혁명에 의하여 권력을 장악하였다. 정권을 잡은 레닌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전쟁을 끝맺고 국민의 기대에 부응할 필요가 있었다. 11월 8일에 발표한 <평화에 관한 포고>는 즉각 정전 강화교섭의 시작, 무합병 무상금형태로의 공정하고도 민주적인 강화 실현을 교전중인 각국에 호소하였다. 연합국쪽, 즉 그 때까지 러시아와 동맹관계에 있었던 영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는 이를 거부했으나, 반대로 러시아의 적이었던 동맹국쪽은 이 호소를 수락할 자세를 보였다. 이리하여 러시아와 독일측 4개국의 강화교섭이 12월 22일부터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독일측이 12월 말에 제시한 강화조건은 무합병 무상금은 커녕 폴란드와 발트해 연안지역을 러시아로부터 분리시키고 러시아에 거액의 배상부담을 부과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볼셰비키의 지도자들은 냉혹한 현실정치와 대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내에서 동요가 일어났으나, 일시휴식을 위한 강화가 불가결하다고 일관되게 주장해온 레닌의 끈질긴 설득에 의해 당 중앙위원회의 대세가 굳어졌으며, 막 탄생한 당시 소련정부는 18년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독일측과 강화조약에 조인하였다. 러시아와의 조약에 의해 독일군은 동부전선의 강한 압력으로부터 벗어났으나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러시아의 탈퇴로 연합국측에 생겨난 부족분을 충분히 보충할 수 있었으므로 러시아의 탈퇴가 독일에 최후의 승리를 가져다 주지는 못하였다.
6. 전쟁의 종결과 파리강화 회의
1918년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마지막 대공세를 시작했으나 실패하고 그 뒤 영국 프랑스 미국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독일군의 패배는 확실해졌다. 이어서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가 항복했다. 독일은 윌슨의 14개조를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독일혁명이 일어난 상황하에서 빌헬름 2세는 네델란드로 망명하고, 막스 폰 바덴 대신 사회민주당의 에베르트정권이 휴전조약에 조인했다. 이렇게 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강화회의는 파리에서 19년 1월부터 6월까지 열렸다. 14개조가 회의의 기조가 될 형세였으나 독일에 대한 보복과 자국의 안전보장을 강력히 요구하는 프랑스 측에 의해서 방침은 크게 바뀌게 된다. 한편 영국의 로이드 조지는 국민들에게 약속한 독일에 대한 보복 공약 때문에 윌슨을 도울 수 없었다. 이렇게 되어서 독일에 대한 가혹한 베르사유조약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진승국의 일원이었으나 거의 모든 전쟁에서 패하여 런던밀약에서의 참전 대가를 약속대로 모두 차지 할 수 없었다. 이들 국민의 파리강화횡의에 대한 강한 불만은 그 뒤 무솔리니가 파시즘 운동을 전개하는데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이들보다 더 불만이 많았던 독일국민들은 29년 이후에 세계공황이 독일을 강타하여 독일경제를 큰 혼란에 빠뜨렸을 때 한층 강화되었다. 이리하여 히틀러의 베르사유체제 타파구호에 국민들이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그에 의한 나치즘운동은 세계공황의 상황하에서 크게 성장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히틀러는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일본은 파리강화회의에서 1917년의 밀약대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1921년 인정받았던 산둥반도의 이권을 중국측에 되돌려주어야만 하였다. 이리하여 전후에 초래된 국제질서에 대해 가지지 못한 나라 라는 불만은 품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3개국은 이윽고 지구상의 자원에 대한 재분배를 요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이다. 패전국에 종속되엇던 민족들에 대해 민족자결이 인정되어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체코슬로 바키아가 각각 독립했고, 세르비아는 주변의 영토를 얻어 유고슬라비아가 되었다. 그러나 민족자결의 원칙은 영국 전승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고, 투르크의 영토였던 서아시아는 아랍인의 요구가 무시된 채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하에 두었다. 즉 1차 대전이후 성립된 베르사유체제는 패전국의 희생을 강요하고 유럽열강의 이해관계를 조정헤만 주력하여 아시아, 아프리카의 약소민족은 독립하지 못하고 계속 전승국의 식민지 통치하에 있게 되는 결함을 드러내게 된다.
5. 미국의 참전과 러시아 혁명
독일과 국교를 단절한 뒤 미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것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강행한 독일군부수뇌들도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미리 알지 못했던 것은 미국이 전쟁준비가 신속하게 진행되어 완전무장한 미국군인들이 영국이 굴복전에 유럽전선에 도착하는 상태였다. 독일군에 의해 보급이 끊긴 영국은 그들 생각으로는 6개월이내에 굴복할 것으로 보았으나 영국은 막대한 손실을 입으면서도 호송선단제에 의해 봉쇄작전을 견뎌낼 수 있었다.이 후 투입된 미국 병력과 풍부한 군수물자 투입이 유럽전선에서의 독일의 패전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 시기에 윌슨은 상하 양원합동회의 연설에서 강화의 구체적 조건인 14개조를 발표 하였다. 윌슨은 이를 통해 공개외교 확립을 요구하며 대전 중 횡행한 비밀외교와 정면으로 대결할 자세를 보였고, 또한 국제연맹이라는 국제기구의 설립을 호소하였다. 또한 이 조항은 벨기에의 원상회복, 알자스 로렌을 프랑스에게 돌려주는 문제, 폴란드 국가의 설립 등이 포함 되어 있었다. 1916년 브루실로프공세가 중도에 좌절된 뒤 러시아군의 세력은 쇠퇴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린 러시아국민의 반전분위기는 엄청난 것이었다. 17년 3월의 <3월혁명>에 의해 로마노프왕조는 붕괴되었고 그 뒤를 이어받은 리보프의 임시정부는 지금까지 다를 바 없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연합국측을 안심시켰으나 전쟁 때문에 극도로 지쳐 버린 국민은 실망하였다. 정권은 리보프로부터 케렌스키에게로 이어졌으나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는 여전히 저조하여 11월 7일에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11월혁명에 의하여 권력을 장악하였다. 정권을 잡은 레닌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전쟁을 끝맺고 국민의 기대에 부응할 필요가 있었다. 11월 8일에 발표한 <평화에 관한 포고>는 즉각 정전 강화교섭의 시작, 무합병 무상금형태로의 공정하고도 민주적인 강화 실현을 교전중인 각국에 호소하였다. 연합국쪽, 즉 그 때까지 러시아와 동맹관계에 있었던 영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는 이를 거부했으나, 반대로 러시아의 적이었던 동맹국쪽은 이 호소를 수락할 자세를 보였다. 이리하여 러시아와 독일측 4개국의 강화교섭이 12월 22일부터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독일측이 12월 말에 제시한 강화조건은 무합병 무상금은 커녕 폴란드와 발트해 연안지역을 러시아로부터 분리시키고 러시아에 거액의 배상부담을 부과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볼셰비키의 지도자들은 냉혹한 현실정치와 대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내에서 동요가 일어났으나, 일시휴식을 위한 강화가 불가결하다고 일관되게 주장해온 레닌의 끈질긴 설득에 의해 당 중앙위원회의 대세가 굳어졌으며, 막 탄생한 당시 소련정부는 18년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독일측과 강화조약에 조인하였다. 러시아와의 조약에 의해 독일군은 동부전선의 강한 압력으로부터 벗어났으나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러시아의 탈퇴로 연합국측에 생겨난 부족분을 충분히 보충할 수 있었으므로 러시아의 탈퇴가 독일에 최후의 승리를 가져다 주지는 못하였다.
6. 전쟁의 종결과 파리강화 회의
1918년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마지막 대공세를 시작했으나 실패하고 그 뒤 영국 프랑스 미국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독일군의 패배는 확실해졌다. 이어서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가 항복했다. 독일은 윌슨의 14개조를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독일혁명이 일어난 상황하에서 빌헬름 2세는 네델란드로 망명하고, 막스 폰 바덴 대신 사회민주당의 에베르트정권이 휴전조약에 조인했다. 이렇게 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강화회의는 파리에서 19년 1월부터 6월까지 열렸다. 14개조가 회의의 기조가 될 형세였으나 독일에 대한 보복과 자국의 안전보장을 강력히 요구하는 프랑스 측에 의해서 방침은 크게 바뀌게 된다. 한편 영국의 로이드 조지는 국민들에게 약속한 독일에 대한 보복 공약 때문에 윌슨을 도울 수 없었다. 이렇게 되어서 독일에 대한 가혹한 베르사유조약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진승국의 일원이었으나 거의 모든 전쟁에서 패하여 런던밀약에서의 참전 대가를 약속대로 모두 차지 할 수 없었다. 이들 국민의 파리강화횡의에 대한 강한 불만은 그 뒤 무솔리니가 파시즘 운동을 전개하는데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이들보다 더 불만이 많았던 독일국민들은 29년 이후에 세계공황이 독일을 강타하여 독일경제를 큰 혼란에 빠뜨렸을 때 한층 강화되었다. 이리하여 히틀러의 베르사유체제 타파구호에 국민들이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그에 의한 나치즘운동은 세계공황의 상황하에서 크게 성장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히틀러는 권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일본은 파리강화회의에서 1917년의 밀약대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1921년 인정받았던 산둥반도의 이권을 중국측에 되돌려주어야만 하였다. 이리하여 전후에 초래된 국제질서에 대해 가지지 못한 나라 라는 불만은 품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3개국은 이윽고 지구상의 자원에 대한 재분배를 요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이다. 패전국에 종속되엇던 민족들에 대해 민족자결이 인정되어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체코슬로 바키아가 각각 독립했고, 세르비아는 주변의 영토를 얻어 유고슬라비아가 되었다. 그러나 민족자결의 원칙은 영국 전승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고, 투르크의 영토였던 서아시아는 아랍인의 요구가 무시된 채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하에 두었다. 즉 1차 대전이후 성립된 베르사유체제는 패전국의 희생을 강요하고 유럽열강의 이해관계를 조정헤만 주력하여 아시아, 아프리카의 약소민족은 독립하지 못하고 계속 전승국의 식민지 통치하에 있게 되는 결함을 드러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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