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샹송이란?
2) 프랑스 인과 샹송
3) 샹송의 종류
4) 샹송의 역사
-시대별로 알아본 샹송
-현대샹송의 발달
5) 대표적 샹송 가수들
((참고))
2) 프랑스 인과 샹송
3) 샹송의 종류
4) 샹송의 역사
-시대별로 알아본 샹송
-현대샹송의 발달
5) 대표적 샹송 가수들
((참고))
본문내용
손을 주세요'가 제작되었다. 미국에서는 한 발 앞서 1927년에 알 졸슨 주연의 '재즈 싱어'가 개봉되어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My mammy'의 노래 소리에 관객은 깜짝 놀랐다. 이 '재즈 싱어'는 1930년 파리에서 공개되어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같은 해에 프랑스에서도 르네 크렐 감독의 토기 제1작 '파리의 지붕 밑'이 만들어져 그 주제가가 대히트했다. '파리나기'(원제는 '잠수 대장')에서는 조르주 밀턴이 부르는 '몽 파파C'est pour mon papa'가 갈채를 받았다. 1933년에는 르네 크렐 감독의 유명한 '파리제'(원제는 7월 14일)가 만들어졌고, 1934년의 '알몸의 여왕'에서는 주연인 조제핀 베이커가 '하이티'를 처음으로 불렀다. 1936년에는 티노 로시의 '마리넬라'(동명 영화의 주제가)가 있으며, 모리스 슈발리에의 '우리들'이 영화 '슈발리에의 유행인'의 주제가로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즉 1930년대의 토키 영화는 샹송의 커다란 공급원이 되었고, 레뷰 무대에서 이들 새로운 매스 미디어로 진출하여 전대미문의 인기를 획득한 슈퍼스타는 코르시카 섬 출신의 미남 가수 티노 로시였다.
샹송의 개혁
1930년대에는 이탈리아풍이나 라틴 리듬의 샹송이 환영받았고, 이국적인 노래가 히트한 시대이기도 했다. 물론 재즈도 널리 침투하여 미국의 파퓰러송의 창법을 사용해서 샹송을 개혁하려고 하는 진보적인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중심이 된 것이 여류 작곡가 겸 가수인 미레유였다. 재즈는 1917년 12월에 카지노 드 파리의 레뷰 속에서 여성 가수 가비 데스리스에 의해 비로소 파리의 대중에게 소개되었다. 미국에서 귀환한 그녀는 함께 온 재즈 밴드를 반주로 노래와 춤을 선보여서 대단한 인기를 모았으나, 병 때문에 쓰러져 미스탕게트와 교체되었다. 1920년대부터 재즈의 기법은 조금씩 샹송 속에 도입되어, 폭스 트로트 풍의 노래 등도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결국은 빌어온 것에 불과하여, 이제까지의 샹송과는 동떨어진 이색적인 분야를 형성하고 있었다. 미레유는 여성다운 섬세함으로 두 가지 면을 완전히 결부시켰다. 빠른 말로 리드미컬하게 부르는 독특한 창법을 개척하여, 새로운 형태의 샹송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더구나 그녀의 노래는 클래식 음악의 소양에 뒷받침되어 고상한 부드러움을 결코 잃지 않았다. 미레유는 1906년 파리 태생으로, 3세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파리 음악원에서 배웠으나, 손가락이 짧았기 때문에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을 단념하고 연극으로 전향하여 14세로 첫 무대를 밟았으며, 1926년에는 레뷰의 주역을 맡을 정도까지 되었다. 1931년에 그녀는 작사가인 장 노앙과 알게 되었는데, 노앙은 본명을 장 마리 르그랭이라 하며, 시인 모리스 르그랭의 아들로, 1900년 파리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변호사를 거쳐 저널리스트가 되었고, 젊은이 대상의 신문을 편집하면서 시를 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쉽게 의기투합하여 노앙 작사, 미레유 작곡에 의한 샹송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색다른 그들의 노래는 좀처럼 일반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이윽고 그녀는 미국 순회 공연을 떠났다. 1933년에 귀국하자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1933년 카지노 드 파리의 레뷰 속에서 듀엣 팀인 필스와 타베(자크 필스와 조르주 타베)가 노앙과 미레유가 만든 '건초 안에 누워서'라는 노래를 불러 대히트시켰고, 그 레코드도 같은 해 4월 ACC 디스트 대상을 수상했던 것이다. 이 곡은 미국에서도 앤드류 시스터즈에 의해 불려진 바 있다. 필스는 후에 뤼시엔 부와예나 에디트 피아프와 결혼한 사람인데, 1932년에 알제리 태생의 피아니스트 타베와 컴비를 이루어 이 곡에 의해 명성을 얻었다. 장 사브롱도 또한 미레유의 작품을 재빨리 다룬 한 사람으로서, 그는 무대 위에서 마이크로폰을 처음으로 사용한 샹송 가수로서 알려져 있다. 당시는 이러한 기계의 도움을 빌어 목소리를 확대한다든가 하는 것은 가수의 수치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그것을 사용했고, 스피커의 배치나 재생법을 연구하여 부드러운 목소리를 객석의 구석구석까지 미치게 하여 청중을 놀라게 한 것은 1936년의 일이었다. 창법도 연구하여 빙 크로스비로 대표되는 미국의 크루너적인 창법을 샹송에 도입했다. 그밖에 1933년에는 반주에 재즈 기타의 명수 장고 라인하르트의 트리오를 기용하는 등 의욕적인 시도를 하여 샹송과 재즈를 결부시켰다. 이 사람들은 이를테면 1930년대의 샹송계에서 누벨 바그라고 할 만한 존재였다. 이윽고 그들의 업적은 샤를 트레네에게 계승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현대적인 샹송이 찬란히 꽃피게 되었다.
5) 대표적 샹송 가수들
a. 모리스 슈발리에
영화배우로서 낯익은 슈발리에는 1888년 페인트 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세경부터 노래를 부르고 레뷰에 출현하였다. 세계적인 대스타로서 전성시대를 쌓아 올렸다.
b. 줄리에트 그레코
1927년 2월 7일 몽페리에 태어난 여가수. 7세부터 파리에서 살았다. 검은 쉐터와 지저분한 바지가 사람들의 눈을 끌어 실존주의 뮤즈라 소문이 나면서 유명해졌다. 1951년 <나는 일요일이 싫어>를 불러 ‘에디트 피아프상’ , 52년<로망스>로 디스크 대상 수상 프랑스어의 뉘앙스 살린 시적인 샹송을 들려주는 뛰어난 가수이다.
c. 파트리샤 카스
1966년 프랑스 로렌지방에서 태어났다. 8살 때 노래를 시작하여 13세때에는 독일 룸펠카머라는 캬바레와 계약을 맺고 7년동안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녀의 음악이 이전의 샹소니에과 구분되는 것은 그녀의 감성이 지닌 다양함에 비롯된다 할 수 있다. 그녀의 표현미약 속에서 샹송이외 블루스, 재즈, 로큰록, 팝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프랑스의 민족적 자부심과 숨쉬고 있다. 끓어오르는 열정을 적절히 자제하는 노련미와 급경사로 상승되는 클라이막스, 그리고 시종일관 경탄을 자아내는 감정 컨트롤 등은 가히 최상의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참고))
- 노래있는 사이트
http://www.machanson.com/
http://chanson.er.ro/
http://www.youni.biz/music/chanson/chanson140.html
샹송의 개혁
1930년대에는 이탈리아풍이나 라틴 리듬의 샹송이 환영받았고, 이국적인 노래가 히트한 시대이기도 했다. 물론 재즈도 널리 침투하여 미국의 파퓰러송의 창법을 사용해서 샹송을 개혁하려고 하는 진보적인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중심이 된 것이 여류 작곡가 겸 가수인 미레유였다. 재즈는 1917년 12월에 카지노 드 파리의 레뷰 속에서 여성 가수 가비 데스리스에 의해 비로소 파리의 대중에게 소개되었다. 미국에서 귀환한 그녀는 함께 온 재즈 밴드를 반주로 노래와 춤을 선보여서 대단한 인기를 모았으나, 병 때문에 쓰러져 미스탕게트와 교체되었다. 1920년대부터 재즈의 기법은 조금씩 샹송 속에 도입되어, 폭스 트로트 풍의 노래 등도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결국은 빌어온 것에 불과하여, 이제까지의 샹송과는 동떨어진 이색적인 분야를 형성하고 있었다. 미레유는 여성다운 섬세함으로 두 가지 면을 완전히 결부시켰다. 빠른 말로 리드미컬하게 부르는 독특한 창법을 개척하여, 새로운 형태의 샹송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더구나 그녀의 노래는 클래식 음악의 소양에 뒷받침되어 고상한 부드러움을 결코 잃지 않았다. 미레유는 1906년 파리 태생으로, 3세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파리 음악원에서 배웠으나, 손가락이 짧았기 때문에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을 단념하고 연극으로 전향하여 14세로 첫 무대를 밟았으며, 1926년에는 레뷰의 주역을 맡을 정도까지 되었다. 1931년에 그녀는 작사가인 장 노앙과 알게 되었는데, 노앙은 본명을 장 마리 르그랭이라 하며, 시인 모리스 르그랭의 아들로, 1900년 파리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변호사를 거쳐 저널리스트가 되었고, 젊은이 대상의 신문을 편집하면서 시를 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쉽게 의기투합하여 노앙 작사, 미레유 작곡에 의한 샹송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색다른 그들의 노래는 좀처럼 일반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이윽고 그녀는 미국 순회 공연을 떠났다. 1933년에 귀국하자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1933년 카지노 드 파리의 레뷰 속에서 듀엣 팀인 필스와 타베(자크 필스와 조르주 타베)가 노앙과 미레유가 만든 '건초 안에 누워서'라는 노래를 불러 대히트시켰고, 그 레코드도 같은 해 4월 ACC 디스트 대상을 수상했던 것이다. 이 곡은 미국에서도 앤드류 시스터즈에 의해 불려진 바 있다. 필스는 후에 뤼시엔 부와예나 에디트 피아프와 결혼한 사람인데, 1932년에 알제리 태생의 피아니스트 타베와 컴비를 이루어 이 곡에 의해 명성을 얻었다. 장 사브롱도 또한 미레유의 작품을 재빨리 다룬 한 사람으로서, 그는 무대 위에서 마이크로폰을 처음으로 사용한 샹송 가수로서 알려져 있다. 당시는 이러한 기계의 도움을 빌어 목소리를 확대한다든가 하는 것은 가수의 수치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그것을 사용했고, 스피커의 배치나 재생법을 연구하여 부드러운 목소리를 객석의 구석구석까지 미치게 하여 청중을 놀라게 한 것은 1936년의 일이었다. 창법도 연구하여 빙 크로스비로 대표되는 미국의 크루너적인 창법을 샹송에 도입했다. 그밖에 1933년에는 반주에 재즈 기타의 명수 장고 라인하르트의 트리오를 기용하는 등 의욕적인 시도를 하여 샹송과 재즈를 결부시켰다. 이 사람들은 이를테면 1930년대의 샹송계에서 누벨 바그라고 할 만한 존재였다. 이윽고 그들의 업적은 샤를 트레네에게 계승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현대적인 샹송이 찬란히 꽃피게 되었다.
5) 대표적 샹송 가수들
a. 모리스 슈발리에
영화배우로서 낯익은 슈발리에는 1888년 페인트 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세경부터 노래를 부르고 레뷰에 출현하였다. 세계적인 대스타로서 전성시대를 쌓아 올렸다.
b. 줄리에트 그레코
1927년 2월 7일 몽페리에 태어난 여가수. 7세부터 파리에서 살았다. 검은 쉐터와 지저분한 바지가 사람들의 눈을 끌어 실존주의 뮤즈라 소문이 나면서 유명해졌다. 1951년 <나는 일요일이 싫어>를 불러 ‘에디트 피아프상’ , 52년<로망스>로 디스크 대상 수상 프랑스어의 뉘앙스 살린 시적인 샹송을 들려주는 뛰어난 가수이다.
c. 파트리샤 카스
1966년 프랑스 로렌지방에서 태어났다. 8살 때 노래를 시작하여 13세때에는 독일 룸펠카머라는 캬바레와 계약을 맺고 7년동안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녀의 음악이 이전의 샹소니에과 구분되는 것은 그녀의 감성이 지닌 다양함에 비롯된다 할 수 있다. 그녀의 표현미약 속에서 샹송이외 블루스, 재즈, 로큰록, 팝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프랑스의 민족적 자부심과 숨쉬고 있다. 끓어오르는 열정을 적절히 자제하는 노련미와 급경사로 상승되는 클라이막스, 그리고 시종일관 경탄을 자아내는 감정 컨트롤 등은 가히 최상의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참고))
- 노래있는 사이트
http://www.machanson.com/
http://chanson.er.ro/
http://www.youni.biz/music/chanson/chanson14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