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의화단 운동의 전개 및 의의
1) 민중의 역습
2) 침략의 격화
3) 민교불화
4) 실업과 사회불안
5) 구식군대의 삭감
6) 대도회
7) 의화권
8) 지방관의 대응
9) 핑위안교안
10) 정부핵심부의 동향
11) 가뭄의 엄습
12) 의화단 전쟁
13) 선전포고와 동남호보
14) 신축조약
15) 신가身家를 지킨다
1) 민중의 역습
2) 침략의 격화
3) 민교불화
4) 실업과 사회불안
5) 구식군대의 삭감
6) 대도회
7) 의화권
8) 지방관의 대응
9) 핑위안교안
10) 정부핵심부의 동향
11) 가뭄의 엄습
12) 의화단 전쟁
13) 선전포고와 동남호보
14) 신축조약
15) 신가身家를 지킨다
본문내용
에 위기를 느낀 열강은 청조정부에 대하여 진압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사태는 열강의 기대와 거꾸로 진행되었다. 1900년 4월 6일, 영미독불의 4개국 공사는 2개월 이내에 의화단을 없앨 것, 그것이 실행되지 않을 경우 즈리直隸산둥山東의 두 성에 직접 출병하여 진압에 나설 것임을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에 통고했다. 그러나 팽창된 의화단세력을 힘으로 누를 수 있는 능력이 청조정부에는 이미 없었고, 배외파가 주도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그럴 의지도 없었던 형편이었다. 각국 공사는 군사개입을 결의하고, 5월 28일, 본국에 파병을 요청함과 동시에 총리각국사무아문에도 이를 통고했다.
6월 초에 중국해역에 있었던 각국 함선은 다구大沽 앞바다에 집결했고 영국해군 중장 시모아E.H. Seymour가 이끄는 각국 혼성군 약 2천 명이 베이징공사관 및 거류민보호를 이유로 파괴된 경진철도京津鐵道를 수리 복구하면서 베이징으로 향했으나, 도중에 랑팡廊坊에서 의화단과 둥푸샹董福祥(1839~1908)의 감군甘軍에게 저지당하여 양춘楊村으로 물러섰다. 재차 운하로 베이징에 들어가려 했으나 의화단에 급습당하여, 할 수 없이 톈진으로 후퇴하게 되었지만, 톈진에서도 녜스청士成(?~1900)의 무위전군武衛前軍, 마위쿤馬玉崑(?~1908)의 무위좌군武衛左軍과 의화단에 의한 조계租界공격이 시작되었다. 열강은 각국 사령관회의에서 무력진압을 위한 출병을 결의하여 6월 17일 영국러시아독일프랑스미국이탈리아오스트리아일본의 8개국 연합군은 다구포대를 공략하고, 곧이어 톈진으로 진군을 개시했다.
13) 선전포고와 동남호보
이 사이 청조정부는 의화단을 우대하는 조처를 취하는 한편, 각국 공사관의 보호를 명하는 등 화和전戰 양면의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열강이 출병을 결정하고, 톈진 주변에서 이미 전투상태에 들어갔음을 들은 청조는 6월 16일부터 연일 어전회의를 열었다. 자이이載 등의 주전파와 광수제光緖帝 등의 화평파 사이의 격렬한 논쟁 후, 시태후는 마침내 개전을 결의했다. 6월 21일 결국 열강에 대하여 선전을 포고함으로써, 사태는 ‘의화단전쟁’의 단계로 돌입하게 되었다.
가장 격렬한 공방전이 전개된 곳은 베이징공사관 지역과 톈진조계였다. 정규군의 일부도 가담하여, 의화단운동에 참가한 민중은 끈질기게 싸웠으나, 장비의 차이는 결정적이었다. 연합군은 7월 14일 톈진을 함락하고 민중의 저항을 배제하면서 전진했고, 8월 14일에는 베이징에 입성하여 저항의 거점을 차차 무너뜨렸다. 시태후 등은 연합군의 입성 이전에 베이징을 탈출하여 10월 말 시안西安에 도착했다.
그보다 앞서 양강총독 류쿤이劉坤一, 호광총독 장즈둥張之洞, 양광총독 리훙장李鴻章 등은 6월 20일 이후의 조칙은 위조라고 하며 받들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스스로 열강 영사와 ‘동남호보약관東南互保約款[中外互保條約]을 체결하여 상호 이해를 존중할 것을 약속했다. 여기에 산둥순무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비롯하여 민절총독閔浙總督절강순무浙江巡撫 등도 동조했다고 하는데, 단순하게 계산해 보면 광둥광시쟝쑤江蘇안후이쟝시江西후난湖南후베이湖北저쟝浙江푸
6월 초에 중국해역에 있었던 각국 함선은 다구大沽 앞바다에 집결했고 영국해군 중장 시모아E.H. Seymour가 이끄는 각국 혼성군 약 2천 명이 베이징공사관 및 거류민보호를 이유로 파괴된 경진철도京津鐵道를 수리 복구하면서 베이징으로 향했으나, 도중에 랑팡廊坊에서 의화단과 둥푸샹董福祥(1839~1908)의 감군甘軍에게 저지당하여 양춘楊村으로 물러섰다. 재차 운하로 베이징에 들어가려 했으나 의화단에 급습당하여, 할 수 없이 톈진으로 후퇴하게 되었지만, 톈진에서도 녜스청士成(?~1900)의 무위전군武衛前軍, 마위쿤馬玉崑(?~1908)의 무위좌군武衛左軍과 의화단에 의한 조계租界공격이 시작되었다. 열강은 각국 사령관회의에서 무력진압을 위한 출병을 결의하여 6월 17일 영국러시아독일프랑스미국이탈리아오스트리아일본의 8개국 연합군은 다구포대를 공략하고, 곧이어 톈진으로 진군을 개시했다.
13) 선전포고와 동남호보
이 사이 청조정부는 의화단을 우대하는 조처를 취하는 한편, 각국 공사관의 보호를 명하는 등 화和전戰 양면의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열강이 출병을 결정하고, 톈진 주변에서 이미 전투상태에 들어갔음을 들은 청조는 6월 16일부터 연일 어전회의를 열었다. 자이이載 등의 주전파와 광수제光緖帝 등의 화평파 사이의 격렬한 논쟁 후, 시태후는 마침내 개전을 결의했다. 6월 21일 결국 열강에 대하여 선전을 포고함으로써, 사태는 ‘의화단전쟁’의 단계로 돌입하게 되었다.
가장 격렬한 공방전이 전개된 곳은 베이징공사관 지역과 톈진조계였다. 정규군의 일부도 가담하여, 의화단운동에 참가한 민중은 끈질기게 싸웠으나, 장비의 차이는 결정적이었다. 연합군은 7월 14일 톈진을 함락하고 민중의 저항을 배제하면서 전진했고, 8월 14일에는 베이징에 입성하여 저항의 거점을 차차 무너뜨렸다. 시태후 등은 연합군의 입성 이전에 베이징을 탈출하여 10월 말 시안西安에 도착했다.
그보다 앞서 양강총독 류쿤이劉坤一, 호광총독 장즈둥張之洞, 양광총독 리훙장李鴻章 등은 6월 20일 이후의 조칙은 위조라고 하며 받들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스스로 열강 영사와 ‘동남호보약관東南互保約款[中外互保條約]을 체결하여 상호 이해를 존중할 것을 약속했다. 여기에 산둥순무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비롯하여 민절총독閔浙總督절강순무浙江巡撫 등도 동조했다고 하는데, 단순하게 계산해 보면 광둥광시쟝쑤江蘇안후이쟝시江西후난湖南후베이湖北저쟝浙江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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