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조지프 콘래드의 생애와 작품
그의 대표 작품과 생애에 대해 자세히 수록
2. 어둠의 속에 대하여
줄거리 요약 및 문학적인 의의 수록
그의 대표 작품과 생애에 대해 자세히 수록
2. 어둠의 속에 대하여
줄거리 요약 및 문학적인 의의 수록
본문내용
라지고 없었다. 뿐만 아니라 선원들은 모두가 열병에 걸려 있었으나 배에 비치했던 의료품 상자 속에서는 키니네해열제도 자취를 감추었고 콘래드가 비상금으로 가지고 있던 마지막 돈까지 도둑맞는 형편이었다. 악전고투 끝에 오타고가 목적지 멜번에 도착한 것은 5개월 뒤의 일이었다. 이때의 경험은 그대로《그림자 선線》과《포크》라는 작품에 기록되어 있다.
배는 9월말에 멜버른에서 모리티어스로 가서 두 달 동안 머물렀다. 그 동안에 콘래드는 르누프라는 프랑스인과 사귀며 그의 누이동생 유제니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제니에게는 약혼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이 사건이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는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의 청혼이 이루어졌었더라면 콘래드의 생애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고 더욱이 이듬해의 아프리카 여행도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그의《어둠의 속》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계기로 콘래드는 영영 동양에는 돌아가지 않을 결심으로 유럽으로 귀항했다.
영국으로 돌아간 그는 런던의 남부에 방을 얻어 얼마 동안을 지냈다. 우크라이나에서 지내는 외삼촌을 만나고 싶었으나 아직 그의 영국시민권이 러시아 지방관청에서 공인받지 못한 상황이라 귀국하면 억류당할 우려가 있었고, 그렇다고 나이 들어 병약한 외삼촌이 그를 만나러 오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할일 없이 지내던 콘래드는 1889년 9월 어느 날 동양에서 만났던 올메이어를 모델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무슨 뚜렷한 계획이나 신념에서 시작한 일은 아니며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으나 작가 콘래드의 앞날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9월 말에 어느 선박 브로커에게서 뜻밖에 콩고 행 배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프리카는 콘래드가 어려서부터 가보고 싶어 하던 땅이며 더욱이 콩고는 당시 유럽인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아프리카의 계몽과 개화를 구실로 한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식민지 착취는 그 잔인무도한 수법으로 지각 있는 사람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과학자, 언론인, 정치가들은 이 신천지에 새로운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어려서부터의 동경심으로 콘래드는 콩고 행 배의 선장자리를 구하려 나섰다. 그는 브뤼셀로 가서 친척 마르그리트 포라도프스카에게 이 일을 추진할 것을 부탁하고 그는 외삼촌을 만나기 위해 키예프로 갔다. 이때엔 이미 국적 문제가 러시아 관청에서도 해결이 난 뒤여서 그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며 러시아의 광활한 대평원을 여행할 수가 있었다. 콘래드에게 외삼촌이란 존재는 물심양면으로 정성껏 도와준 잊을 수 없는 은인이었다. 키예프에서 보낸 두 달은 꿈처럼 지나가고 그는 4월에 다시 브뤼셀로 돌아와 임명장을 받기 위해 5월 11일에 버마현재의 미얀마로 갔다. 버마에서 마타디로, 마타디로부터 스탠리 풀즈로 그가 지휘할 배를 타기 위해 여행을 거듭했다. 6월 하순에 콘래드는 프로스퍼 하루라는 지인知人과 31명의 짐꾼으로 구성된 대상隊商을 따라 킨샤사를 향해 떠났다. 산악지대를 올라가는 이 여정은 매우 힘든 것이었으며, 동행인 하루는 비대한 데다 열병을 앓고 있어서 인부들이 들것에 실어서 들고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견디다 못한 인부들이 폭동을 일으킬 기세였고 콘래드의 고충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10일 후 겨우 마냥가에 도착한 콘래드는 병이 나서 2주일 남짓 휴양한 뒤 다시 킨샤사로 향했다. 킨샤사의 조선소에선 그가 탈 플로리다 호를 수리 중 이었다. 그는《어둠의 속》에 나오는 말로 선장처럼 배의 수리가 끝나기까기 두 달씩이나 기다리지 않고 로와 데벨즈라는 배를 타고 스탠리 풀즈로 향했다.
이 항해에서 얻은 강렬한 인상을 콘래드는《어둠의 속》에서 남김없이 그려내고 있다. 콘래드가 스탠리 풀즈로 간 것은 그 곳에서 병에 걸린 무역회사 콩고 지점장 조르주 앙트안 클렌을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클렌은 후에 《어둠의 속》의 중심인물 쿠르츠로 등장하게 된다. 클렌은 돌아오는 배 위에서 결국 죽고 말았다. 클렌과 쿠르츠가 어느 정도 서로 유사하냐 하는 것은 추측할 도리밖에 없으나 콘래드가 사실에 가까운 묘사를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는 쿠르츠와 여러모로 흡사한 인물이었으리라 짐작된다.
킨샤사로 돌아온 그는 플로리다의 선장으로 일하길 원했으나 열병과 설사병의 발병과 회사 지배인 델코뮨이란 사람이 훼방을 놓아 소망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음흉한 인물이던 델코뮨도《어둠의 속》에 지배인으로 등장한다. 결국 콘래드는 10월에 유럽으로 돌아갔다. 델코뮨의 모략은 오히려 후일에는 행운의 손길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때의 쇠약한 건강으로 원시의 땅 콩고탐험선의 선장으로 나갔다면 살아서 돌아 왔을지가 매우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콩고 여행에서 돌아온 콘래드는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렸다. 짐도 도중에 잃어버렸으나 다행히《올메이어의 어리석은 행적》의 원고만은 끝내 간직할 수가 있었다. 고난에 가득 찼던 콩고 여행은 그에게 일생 동안 계속된 간헐적인 말라리아와 류마티즘을 남겨 주었으나 한편으로는 본격적인 작가 생활로 들어갈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병상에 누워 그는 지나온 경험과 자신의 내면을 곰곰이 살피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헛되어 모험만을 쫓던 지난날의 태도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1891년 5월에 콘래드는 류마티즘 요양을 위해 스위스의 샹펠로 갔다. 선장으로서의 생활은 신병 때문에 단념해야 했고 그 때문에 이 시기의 그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건강이 회복되자 우울증도 가벼워져 7월 중순에 런던으로 돌아가 템즈 강변의 어떤 창고 관리직을 맡았다. 그러나 육지에서의 일은 그에겐 따분하기만 했다.
결국 그는 당시 일급 쾌속범선이던 트렌즈 호의 일등항해사로 등록했다. 이 배로 두 번 호주와 영국 사이를 왕래하는 사이 그는 차츰 건강을 되찾아 갔다. 그가 캠브리지 대학생인 W.H.제이퀴즈를 만난 것은 이 배에서였다. 콘래드는 어떤 충동에서인지 이 청년에게 《올메이어의 어리석은 행적》원고를 보이고 그의 의견을 물었다. 제이퀴즈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폐병을 않던 몸이라 호주 아델레이드에 도착하여 얼마 안 돼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때 귀항 배에는 아직
배는 9월말에 멜버른에서 모리티어스로 가서 두 달 동안 머물렀다. 그 동안에 콘래드는 르누프라는 프랑스인과 사귀며 그의 누이동생 유제니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제니에게는 약혼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이 사건이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는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의 청혼이 이루어졌었더라면 콘래드의 생애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고 더욱이 이듬해의 아프리카 여행도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그의《어둠의 속》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계기로 콘래드는 영영 동양에는 돌아가지 않을 결심으로 유럽으로 귀항했다.
영국으로 돌아간 그는 런던의 남부에 방을 얻어 얼마 동안을 지냈다. 우크라이나에서 지내는 외삼촌을 만나고 싶었으나 아직 그의 영국시민권이 러시아 지방관청에서 공인받지 못한 상황이라 귀국하면 억류당할 우려가 있었고, 그렇다고 나이 들어 병약한 외삼촌이 그를 만나러 오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할일 없이 지내던 콘래드는 1889년 9월 어느 날 동양에서 만났던 올메이어를 모델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무슨 뚜렷한 계획이나 신념에서 시작한 일은 아니며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으나 작가 콘래드의 앞날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9월 말에 어느 선박 브로커에게서 뜻밖에 콩고 행 배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프리카는 콘래드가 어려서부터 가보고 싶어 하던 땅이며 더욱이 콩고는 당시 유럽인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아프리카의 계몽과 개화를 구실로 한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식민지 착취는 그 잔인무도한 수법으로 지각 있는 사람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과학자, 언론인, 정치가들은 이 신천지에 새로운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어려서부터의 동경심으로 콘래드는 콩고 행 배의 선장자리를 구하려 나섰다. 그는 브뤼셀로 가서 친척 마르그리트 포라도프스카에게 이 일을 추진할 것을 부탁하고 그는 외삼촌을 만나기 위해 키예프로 갔다. 이때엔 이미 국적 문제가 러시아 관청에서도 해결이 난 뒤여서 그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며 러시아의 광활한 대평원을 여행할 수가 있었다. 콘래드에게 외삼촌이란 존재는 물심양면으로 정성껏 도와준 잊을 수 없는 은인이었다. 키예프에서 보낸 두 달은 꿈처럼 지나가고 그는 4월에 다시 브뤼셀로 돌아와 임명장을 받기 위해 5월 11일에 버마현재의 미얀마로 갔다. 버마에서 마타디로, 마타디로부터 스탠리 풀즈로 그가 지휘할 배를 타기 위해 여행을 거듭했다. 6월 하순에 콘래드는 프로스퍼 하루라는 지인知人과 31명의 짐꾼으로 구성된 대상隊商을 따라 킨샤사를 향해 떠났다. 산악지대를 올라가는 이 여정은 매우 힘든 것이었으며, 동행인 하루는 비대한 데다 열병을 앓고 있어서 인부들이 들것에 실어서 들고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견디다 못한 인부들이 폭동을 일으킬 기세였고 콘래드의 고충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10일 후 겨우 마냥가에 도착한 콘래드는 병이 나서 2주일 남짓 휴양한 뒤 다시 킨샤사로 향했다. 킨샤사의 조선소에선 그가 탈 플로리다 호를 수리 중 이었다. 그는《어둠의 속》에 나오는 말로 선장처럼 배의 수리가 끝나기까기 두 달씩이나 기다리지 않고 로와 데벨즈라는 배를 타고 스탠리 풀즈로 향했다.
이 항해에서 얻은 강렬한 인상을 콘래드는《어둠의 속》에서 남김없이 그려내고 있다. 콘래드가 스탠리 풀즈로 간 것은 그 곳에서 병에 걸린 무역회사 콩고 지점장 조르주 앙트안 클렌을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클렌은 후에 《어둠의 속》의 중심인물 쿠르츠로 등장하게 된다. 클렌은 돌아오는 배 위에서 결국 죽고 말았다. 클렌과 쿠르츠가 어느 정도 서로 유사하냐 하는 것은 추측할 도리밖에 없으나 콘래드가 사실에 가까운 묘사를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는 쿠르츠와 여러모로 흡사한 인물이었으리라 짐작된다.
킨샤사로 돌아온 그는 플로리다의 선장으로 일하길 원했으나 열병과 설사병의 발병과 회사 지배인 델코뮨이란 사람이 훼방을 놓아 소망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음흉한 인물이던 델코뮨도《어둠의 속》에 지배인으로 등장한다. 결국 콘래드는 10월에 유럽으로 돌아갔다. 델코뮨의 모략은 오히려 후일에는 행운의 손길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때의 쇠약한 건강으로 원시의 땅 콩고탐험선의 선장으로 나갔다면 살아서 돌아 왔을지가 매우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콩고 여행에서 돌아온 콘래드는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렸다. 짐도 도중에 잃어버렸으나 다행히《올메이어의 어리석은 행적》의 원고만은 끝내 간직할 수가 있었다. 고난에 가득 찼던 콩고 여행은 그에게 일생 동안 계속된 간헐적인 말라리아와 류마티즘을 남겨 주었으나 한편으로는 본격적인 작가 생활로 들어갈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병상에 누워 그는 지나온 경험과 자신의 내면을 곰곰이 살피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헛되어 모험만을 쫓던 지난날의 태도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1891년 5월에 콘래드는 류마티즘 요양을 위해 스위스의 샹펠로 갔다. 선장으로서의 생활은 신병 때문에 단념해야 했고 그 때문에 이 시기의 그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건강이 회복되자 우울증도 가벼워져 7월 중순에 런던으로 돌아가 템즈 강변의 어떤 창고 관리직을 맡았다. 그러나 육지에서의 일은 그에겐 따분하기만 했다.
결국 그는 당시 일급 쾌속범선이던 트렌즈 호의 일등항해사로 등록했다. 이 배로 두 번 호주와 영국 사이를 왕래하는 사이 그는 차츰 건강을 되찾아 갔다. 그가 캠브리지 대학생인 W.H.제이퀴즈를 만난 것은 이 배에서였다. 콘래드는 어떤 충동에서인지 이 청년에게 《올메이어의 어리석은 행적》원고를 보이고 그의 의견을 물었다. 제이퀴즈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폐병을 않던 몸이라 호주 아델레이드에 도착하여 얼마 안 돼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때 귀항 배에는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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