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며
Ⅱ. 본능 vs 질서
1. 똥깐이의 본능적 속성
2. 사회질서 내의 사람들
1) 부조리한 사회구조
2) 소시민적 마을 사람들
Ⅲ. 나가며
Ⅱ. 본능 vs 질서
1. 똥깐이의 본능적 속성
2. 사회질서 내의 사람들
1) 부조리한 사회구조
2) 소시민적 마을 사람들
Ⅲ. 나가며
본문내용
상상조차 힘든 똥깐이라는 인물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
사실 작가는 똥깐이라는 비주류적이며 악당에 가까운 인물을 표면적으로는 비웃음의 대상으로 삼는 듯하지만 실은 좌절 속에서도 본래 면목을 잃지 않는 그들의 뚝심을 통해 부박하고 탐욕스러운 세태를 고발하고 있다. 분명 똥깐은 긍정적인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인간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사회라는 제도가 오히려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짐승같은 모습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지 않는 교양속물의 삶 혹은 그들의 내용 없는 엄숙주의를 그는 농담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똥깐의 주변인(은척 사람들, 경찰관)들로 대표되는 부조리하고 권위에 가득찬 세계에 대한 통쾌한 야유와 비웃음을 날려볼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우리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것들과 획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허세들을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함으로써 이것들을 유쾌하게 풍자해낸다.
소설의 제목이 <조동관약전>의 전(傳)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주목해볼 만하다. 전기란 훌륭한 사람의 일생을 서술한 것인데 망나니에 악행을 일삼는 똥깐의 일생을 이렇게 쓴 것은 상당히 풍자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작가는 끝에 똥깐에게 그만의 비석과 동굴 그리고 바위를 부여함으로써 자칫 풍자적이고 우스운 이야기로만 끝날 수 있었을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작가는 똥깐의 생애를 신화적 어조로 너스레를 떨며 과장함으로써 그것을 보잘 것 없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데, 그 과정에서 보잘 것 없음의 건너편에 도사리고 있는 더 큰 제도적 폭력을 자연스럽게 환기시킨다.
재미있는 점은 실제로 소설 안에서도 주인공 똥깐의 사회의 질서를 위협하는 그 괴팍성과 무자비함, 무질서함과 폭력행사에도 불구하고 은척 사람들이 그를 필요로 하며 종국에는 영웅으로까지 승격시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똥깐이에게 당하면서도 똥깐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즐기고 똥깐이의 행동을 통해 어떤 시원함을 느끼며, 똥깐을 죽인 경찰관을 한마음이 되어 원망한다. 이러한 모습은 물론 정이라든지 공개된 인물을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인간 특성에서 비롯된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람들은 똥깐이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들이 행하지 못하는 어떤 가식적이고 인위적인 틀을 깨부수는 행위의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성석제의 소설의 묘미는 바로 뻔한 소재와 전형적인 인물을 이야기하는 방식, 즉 서사의 전략화에 있다. 그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유려한 이야기의 기술로 써 내려가면서 시시콜콜한 일상사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하찮은 소재는 그의 허풍과 익살을 거쳐 우리에게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오히려 너무 사소해서 우리의 삶을 곰곰이 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그의 일상적 이야기에서 우리는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우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소설이 부정적인 대상의 이면을 폭로하고 야유하지만, 동시에 그조차 껴안는 넉넉한 포용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 성석제는 소설 <조동관 약전>을 통해 제도적 폭력과 권위주의를 조롱하고 있지만 그 너머에 대상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보여준다. 어리석음이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알고 있는 그는 비주류적인 인물을 따스하게 바라보면서 똥깐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광호의 말처럼 ‘성석제를 읽은 뒤에도, 당신과 나의 생애는 오히려, 더욱더 통속적이고 어처구니 없고 허망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결국 그가 보여주는 인간애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감흥을 주고 우리의 삶을 미약하게나마 바꿔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사실 작가는 똥깐이라는 비주류적이며 악당에 가까운 인물을 표면적으로는 비웃음의 대상으로 삼는 듯하지만 실은 좌절 속에서도 본래 면목을 잃지 않는 그들의 뚝심을 통해 부박하고 탐욕스러운 세태를 고발하고 있다. 분명 똥깐은 긍정적인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인간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사회라는 제도가 오히려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짐승같은 모습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지 않는 교양속물의 삶 혹은 그들의 내용 없는 엄숙주의를 그는 농담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똥깐의 주변인(은척 사람들, 경찰관)들로 대표되는 부조리하고 권위에 가득찬 세계에 대한 통쾌한 야유와 비웃음을 날려볼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우리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것들과 획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허세들을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함으로써 이것들을 유쾌하게 풍자해낸다.
소설의 제목이 <조동관약전>의 전(傳)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주목해볼 만하다. 전기란 훌륭한 사람의 일생을 서술한 것인데 망나니에 악행을 일삼는 똥깐의 일생을 이렇게 쓴 것은 상당히 풍자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작가는 끝에 똥깐에게 그만의 비석과 동굴 그리고 바위를 부여함으로써 자칫 풍자적이고 우스운 이야기로만 끝날 수 있었을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작가는 똥깐의 생애를 신화적 어조로 너스레를 떨며 과장함으로써 그것을 보잘 것 없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데, 그 과정에서 보잘 것 없음의 건너편에 도사리고 있는 더 큰 제도적 폭력을 자연스럽게 환기시킨다.
재미있는 점은 실제로 소설 안에서도 주인공 똥깐의 사회의 질서를 위협하는 그 괴팍성과 무자비함, 무질서함과 폭력행사에도 불구하고 은척 사람들이 그를 필요로 하며 종국에는 영웅으로까지 승격시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똥깐이에게 당하면서도 똥깐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즐기고 똥깐이의 행동을 통해 어떤 시원함을 느끼며, 똥깐을 죽인 경찰관을 한마음이 되어 원망한다. 이러한 모습은 물론 정이라든지 공개된 인물을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인간 특성에서 비롯된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람들은 똥깐이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들이 행하지 못하는 어떤 가식적이고 인위적인 틀을 깨부수는 행위의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성석제의 소설의 묘미는 바로 뻔한 소재와 전형적인 인물을 이야기하는 방식, 즉 서사의 전략화에 있다. 그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유려한 이야기의 기술로 써 내려가면서 시시콜콜한 일상사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하찮은 소재는 그의 허풍과 익살을 거쳐 우리에게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오히려 너무 사소해서 우리의 삶을 곰곰이 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그의 일상적 이야기에서 우리는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우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소설이 부정적인 대상의 이면을 폭로하고 야유하지만, 동시에 그조차 껴안는 넉넉한 포용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 성석제는 소설 <조동관 약전>을 통해 제도적 폭력과 권위주의를 조롱하고 있지만 그 너머에 대상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보여준다. 어리석음이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알고 있는 그는 비주류적인 인물을 따스하게 바라보면서 똥깐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광호의 말처럼 ‘성석제를 읽은 뒤에도, 당신과 나의 생애는 오히려, 더욱더 통속적이고 어처구니 없고 허망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결국 그가 보여주는 인간애는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감흥을 주고 우리의 삶을 미약하게나마 바꿔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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