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는 글
2. 채만식의 삶과 문학관
3. 채만식 문학에 나타나는 부정의 양상
1) 초기의 작품(1923~1933)
2) 爛熟期의 작품(1934~1938)
3) 苦惱期의 작품(1939~1945)
4) 해방 이후의 작품(해방 직후~1950)
4. 마치는 글
2. 채만식의 삶과 문학관
3. 채만식 문학에 나타나는 부정의 양상
1) 초기의 작품(1923~1933)
2) 爛熟期의 작품(1934~1938)
3) 苦惱期의 작품(1939~1945)
4) 해방 이후의 작품(해방 직후~1950)
4. 마치는 글
본문내용
어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채만식은 자신의 잘못을 자인하면서도 여전히 현실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았다. 그 불만이라 개인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민족의 장래와 관계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이쁘장스런 소설>, 즉 사군자나 고려청자와 같은 소설을 쓰기를 권유했다. 따지고 보면 해방 이후 아픈 곳을 지니지 않은 문인은 드물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문인들은 몸을 도사려 <이쁘장한> 작품만 쓰는 것이 곧 자신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채만식은 단호하게 그것을 거부했다. 그로서는 현실의 증언대에 오르는 것이 곧 속죄의 길이었다.
이 시대에 그는 도야지, 落照, 孟巡査, 미스터 方 등을 통하여 그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부정적 인물들에 대한 도전적 증언을 시작했다. 그가 주로 부정의 대상으로 삼은 인물들은 과거의 자신을 감추거나 잊고 해방된 세상에서 가장 애국자인 체 날뛰면서 私利私慾을 탐하고 있는 유무산층, 혹은 유무식층 사람들이다. 그는 이들을 다룬 작품들을 묶어 단편집을 내고 거기에 <잘난 사람들>이라는 반어적인 표제를 붙였다. 그의 작중인물은 반민족행위자를 포섭하려는 정치 세력, 미국이나 소련 같은 외세에 빌붙어 민중을 배신하는 자들, 치안 부재의 구석을 찾아내어 기만과 위선을 행하는 자들로 대별된다. 이들을 지배하는 것은 弱肉强食의 논리와 기회주의였다.
그러나 채만식은 이들이 몰락해야 하고 또 몰락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매 작품의 결말에서 그는 이들이 몰락하는 것을 부각시킴으로써 독자를 통쾌하게 하고 있다. 도야지의 문영환은 국회의원선거에서 도야지와 함께 <낙방>했다. 미스터 方의 <밑씻다 방>은 양칫물 벼락을 맞은 상전인 미군 장교로부터 일격의 <어퍼커트>를 맞고 쓰러졌다. 孟巡査에서는 일제 치하에서 순사를 하다가 해방 후 일단 쫓겨난 뒤 다시 또 순사가 된 맹순사가 과거에 살인강도이자 무기징역수였던 자가 동료 순사가 되어 나타난 것을 보고, <패검을 뽑아 배를 찌를 것만 같아> 도망치듯 사직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落照의 전직 경부보인 박재춘은 노한 민중에 의해 파멸 당하고 아들을 자랑하던 그의 어머니는 쌀 한 말에 천 오백 원을 받는 쌀장사마저도 공산당이라며 세상을 원망하는 신세가 된다.
이들 작품에서 채만식은 부정적 상황을 구상화하려 했으며, 풍자수법을 통하여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려 했다. 이때 채만식은 한편으로는 현실의 부정적 측면을 정밀하게 파헤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시야를 넓혀 현실을 역사적 시각에서 파악하고, 민족의 장래를 전망해 보려고 하였다.
Ⅳ. 마무리
채만식을 통하여 우리는 고약한 세상에서 어렵게 살아가면서도 역사의 증인이 되려고 했던 몇몇 양심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떠 올리게 된다. 채만식은 여느 비평에서 보이는 것처럼 니힐리스트는 아니었다. 그는 미래에 대한 굳은 신념을 잃지 않고 버티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믿은 사람이었다. 그의 증인의식은 부정정신으로 구체화되었다. 그의 증언 내용은 자기가 산 사회의 부정적 양상들이었다. 증언할 긍정적 양상을 발견하기가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의 예술이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투철한 증인의식 때문이었다. 부정적 증언이 없는 작품은 그에 있어서 한낱 평범한 소모품에 불과했다. 부정 정신은 훌륭한 문학 형식을 낳았다. 훌륭한 내용을 담은 문학 작품이란 훌륭한 정신에서 나온다는 것, 훌륭한 문학 형식이란 훌륭한 정신에서 나온다는 것―이런 상식을 채만식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절감케 하고 있다.
채만식은 결벽한 사람이었다. 해방 후에도 자기 부정을 통해 결벽성을 지켰다. 어떤 개인적 이득도 얻은 바 없으며, 어느 단체에 가입하여 세력의 일부가 된 적도 없었다. 邪를 멀리하고 가난과 고독 속에 자신을 던짐으로써 시대의 증인으로서의 기본을 지켰다. 그러나 이러한 결벽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점을 남겼다. 그의 오점은 일제 강점시대에 민족 전체가 겪은 비극의 한 예증이지만, 우리에게 하나의 큰 교훈을 남기고 있다. 어두운 시절은 영원할 수 없는 것이기에, 반드시 올 밝은 새벽을 위하여 사람들은 맑은 몸으로의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채만식에 있어서 창작은 역사적 삶의 전부였고, 부정의 논리는 그의 문학의 근간이 되었다. 그는 끝내 역사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지 못했다. 작품을 통하여 현재를 부정하면서 밝은 미래를 기다렸지만, 결국 만족할 만한 미래를 만나지 못하고 간 것이다.
그러나 채만식은 자신의 잘못을 자인하면서도 여전히 현실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았다. 그 불만이라 개인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민족의 장래와 관계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이쁘장스런 소설>, 즉 사군자나 고려청자와 같은 소설을 쓰기를 권유했다. 따지고 보면 해방 이후 아픈 곳을 지니지 않은 문인은 드물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문인들은 몸을 도사려 <이쁘장한> 작품만 쓰는 것이 곧 자신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채만식은 단호하게 그것을 거부했다. 그로서는 현실의 증언대에 오르는 것이 곧 속죄의 길이었다.
이 시대에 그는 도야지, 落照, 孟巡査, 미스터 方 등을 통하여 그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부정적 인물들에 대한 도전적 증언을 시작했다. 그가 주로 부정의 대상으로 삼은 인물들은 과거의 자신을 감추거나 잊고 해방된 세상에서 가장 애국자인 체 날뛰면서 私利私慾을 탐하고 있는 유무산층, 혹은 유무식층 사람들이다. 그는 이들을 다룬 작품들을 묶어 단편집을 내고 거기에 <잘난 사람들>이라는 반어적인 표제를 붙였다. 그의 작중인물은 반민족행위자를 포섭하려는 정치 세력, 미국이나 소련 같은 외세에 빌붙어 민중을 배신하는 자들, 치안 부재의 구석을 찾아내어 기만과 위선을 행하는 자들로 대별된다. 이들을 지배하는 것은 弱肉强食의 논리와 기회주의였다.
그러나 채만식은 이들이 몰락해야 하고 또 몰락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매 작품의 결말에서 그는 이들이 몰락하는 것을 부각시킴으로써 독자를 통쾌하게 하고 있다. 도야지의 문영환은 국회의원선거에서 도야지와 함께 <낙방>했다. 미스터 方의 <밑씻다 방>은 양칫물 벼락을 맞은 상전인 미군 장교로부터 일격의 <어퍼커트>를 맞고 쓰러졌다. 孟巡査에서는 일제 치하에서 순사를 하다가 해방 후 일단 쫓겨난 뒤 다시 또 순사가 된 맹순사가 과거에 살인강도이자 무기징역수였던 자가 동료 순사가 되어 나타난 것을 보고, <패검을 뽑아 배를 찌를 것만 같아> 도망치듯 사직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落照의 전직 경부보인 박재춘은 노한 민중에 의해 파멸 당하고 아들을 자랑하던 그의 어머니는 쌀 한 말에 천 오백 원을 받는 쌀장사마저도 공산당이라며 세상을 원망하는 신세가 된다.
이들 작품에서 채만식은 부정적 상황을 구상화하려 했으며, 풍자수법을 통하여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려 했다. 이때 채만식은 한편으로는 현실의 부정적 측면을 정밀하게 파헤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시야를 넓혀 현실을 역사적 시각에서 파악하고, 민족의 장래를 전망해 보려고 하였다.
Ⅳ. 마무리
채만식을 통하여 우리는 고약한 세상에서 어렵게 살아가면서도 역사의 증인이 되려고 했던 몇몇 양심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떠 올리게 된다. 채만식은 여느 비평에서 보이는 것처럼 니힐리스트는 아니었다. 그는 미래에 대한 굳은 신념을 잃지 않고 버티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믿은 사람이었다. 그의 증인의식은 부정정신으로 구체화되었다. 그의 증언 내용은 자기가 산 사회의 부정적 양상들이었다. 증언할 긍정적 양상을 발견하기가 극히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의 예술이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투철한 증인의식 때문이었다. 부정적 증언이 없는 작품은 그에 있어서 한낱 평범한 소모품에 불과했다. 부정 정신은 훌륭한 문학 형식을 낳았다. 훌륭한 내용을 담은 문학 작품이란 훌륭한 정신에서 나온다는 것, 훌륭한 문학 형식이란 훌륭한 정신에서 나온다는 것―이런 상식을 채만식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절감케 하고 있다.
채만식은 결벽한 사람이었다. 해방 후에도 자기 부정을 통해 결벽성을 지켰다. 어떤 개인적 이득도 얻은 바 없으며, 어느 단체에 가입하여 세력의 일부가 된 적도 없었다. 邪를 멀리하고 가난과 고독 속에 자신을 던짐으로써 시대의 증인으로서의 기본을 지켰다. 그러나 이러한 결벽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점을 남겼다. 그의 오점은 일제 강점시대에 민족 전체가 겪은 비극의 한 예증이지만, 우리에게 하나의 큰 교훈을 남기고 있다. 어두운 시절은 영원할 수 없는 것이기에, 반드시 올 밝은 새벽을 위하여 사람들은 맑은 몸으로의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채만식에 있어서 창작은 역사적 삶의 전부였고, 부정의 논리는 그의 문학의 근간이 되었다. 그는 끝내 역사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지 못했다. 작품을 통하여 현재를 부정하면서 밝은 미래를 기다렸지만, 결국 만족할 만한 미래를 만나지 못하고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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