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문화재란 무엇인가?
1. 문화재란?
2. 문화재의 분류
1) 문화재의 속성에 따른 분류
(1) 유형문화재
(2) 무형문화재
(3) 기념물
(4) 민속자료
2) 지정여부에 따른 분류
(1) 지정문화재
(2) 비지정문화재
① 일반동산문화재
② 매장문화재
3) 지정권자에 따른 분류
(1) 국가지정문화재
① 국보
② 보물
③ 사적
④ 명승
⑤ 사적 및 명승
⑥ 천연기념물
⑦ 중요무형문화재
⑧ 중요민속자료
(2) 시․도지정문화재
(3) 문화재자료
Ⅱ 문화재보존과 그에 따른 행정정책의 문제점
Ⅲ 우리 문화유산의 수난사
1. 해외 유출에 의한 우리 문화유산의 수난사
1) 우리 문화유산의 해외 유출 경위
2) 우리 문화유산의 해외 유출 현황
3) 해외유출 문화유산의 환수 현황
2.우리 정부에 의한 우리 문화유산 훼손 사례
-道, 문화재 지정만 했지… 개발삽날에 훼손 방치 관리도 엉망
-운주사 문화재 보수 오히려 훼손
-풍납토성 발굴현장, 문화재 훼손
-마애삼존불 암벽 균열 늘어
-<사라지는 근대문화 유산>근대사의 자취꼭 헐어야 하나
-문화재 망치는 속세문화
1. 문화재란?
2. 문화재의 분류
1) 문화재의 속성에 따른 분류
(1) 유형문화재
(2) 무형문화재
(3) 기념물
(4) 민속자료
2) 지정여부에 따른 분류
(1) 지정문화재
(2) 비지정문화재
① 일반동산문화재
② 매장문화재
3) 지정권자에 따른 분류
(1) 국가지정문화재
① 국보
② 보물
③ 사적
④ 명승
⑤ 사적 및 명승
⑥ 천연기념물
⑦ 중요무형문화재
⑧ 중요민속자료
(2) 시․도지정문화재
(3) 문화재자료
Ⅱ 문화재보존과 그에 따른 행정정책의 문제점
Ⅲ 우리 문화유산의 수난사
1. 해외 유출에 의한 우리 문화유산의 수난사
1) 우리 문화유산의 해외 유출 경위
2) 우리 문화유산의 해외 유출 현황
3) 해외유출 문화유산의 환수 현황
2.우리 정부에 의한 우리 문화유산 훼손 사례
-道, 문화재 지정만 했지… 개발삽날에 훼손 방치 관리도 엉망
-운주사 문화재 보수 오히려 훼손
-풍납토성 발굴현장, 문화재 훼손
-마애삼존불 암벽 균열 늘어
-<사라지는 근대문화 유산>근대사의 자취꼭 헐어야 하나
-문화재 망치는 속세문화
본문내용
만해 한용운(1879~1944)이 성북동 심우장으로 이사하기 전에 살았던 고택이 있다.
집의 규모가 줄어 든 데다 여러 가구가 세 들어 살고 있어 옹색하기 그지없고 그나마 나무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한용운은 설악산 백담사에서 시작한 대표시 님의 침묵을 이 집에서 탈고했다.
더구나 이 집은 31독립운동 당시 천도교대표 등과 함께 기미독립선 언문 강령을 작성한 현장이기도 하다.
구한말과 일제시대 문학 예술인들이 많이 거주한 종로구에는 오감도의 시인 이상의 낡은 한옥기와집이 서울대 건축학과 후배들에 의해 보존돼 이상기념관으로 거듭날 전망이다.
이밖에 월탄 박종화(평창동)춘원 이광수(홍지동)의 고택과 근 대 서예대가 소전 손재형(1903~1981)의 고택(서울시 유형문화재 23호대원군 사랑채가 있음)이 전통한국요리 전문집 석파랑과 반으로 나뉜 채 보존돼 있다.
◈근대 개항장인 인천 중구의 조계지 훼손현장〓한국 최초로 서 양식 근대 도시계획이 도입된 인천 또한 근대문화유산 보존대책 이 시급한 곳.
특히 중구 16만평 부지에 일본중국(청)을 비롯, 영국프랑스독일 등이 조계지로 사용한 근대건축물 79점이 훼손위기에 놓여 있다.
이곳은 새로 차이나타운을 건립하면서 많은 근대건축물들이 파괴되고 있다.
지난해부터 인천 중구 북성동선린동의 중국 풍물상가 건립과정에서 중국인이 국내 최초로 세 운 81년 역사의 화교교회인 중화기독교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화교학교내 구 청국영사관 회의청(중구 선린동1910년 건축 ) 목조건물 지붕은 일본식으로 변형됐고 내부공간만 일부 남아있 다.
이곳은 이미 사라진 구 청국 영사관의 황제와 총통 친필 현판 이 걸려있으나 등록문화재로 지정도 안돼, 차이나타운 건설 붐과 함께 훼손될 처지에 있다.
3년 전부터 중구 해안동 일대에 있는 대규모 붉은 조적조 창고(19 40년대 건축)들도 하나 둘 사라지고 대형쇼핑몰이나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한국산업은행의 전신인 구 식산은행(중구 해안동 1919년 건축)은 2001년 8월 철거돼 현재 중구청 공용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형편.
청국과 일본 조차지를 경계 짓던 진입계단 (1884년 건축)은 국내 최초의 언덕형 돌계단으로 인근 조경과 더 불어 보존가치가 높은 역사적 문화유산인데도, 구청에서 아무 관련이 없는 공자상(중국 기증)을 최근 세워 역사현장을 심하게 훼손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출처: 문화일보
-문화재 망치는 속세문화
우리는 굉장한 역사문화 자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잘못된 보존과 관리로 말미암아 많은 자산이 멋대로 망가져서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일이 허다하다. 2월이 끝나갈 무렵에 찾은 부석사와 소수서원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부석사는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우리는 해가 질 무렵에 도착해서 부석사로 오르게 되었다. 저녁 어스름에 잠겨 부석사는 그윽한 신비로움을 풍기고 있었다. 단순히 천년 고찰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정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깃줄을 모두 땅 속으로 깔아서 절 집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어둠에 잠긴 솔숲에서 밤 부엉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도 뜻밖의 기쁨이었다.
워낙에 유명한 곳이니 만큼 그 입구에는 커다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화장실도 아주 잘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커다란 주차장은 분명히 부석사의 분위기와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부석사의 그윽함을 해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관광객들에게 보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커다란 분수와 영주의 관광지를 알리는 커다란 관광안내판은 더욱 더 그렇게 보였다. 부석사는 고립되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부석사를 돌아보고는 도망치듯이 부석사 아랫동네를 떠나 소수서원으로 갔다. 그 입구의 커다란 소나무들이 우거진 숲 사이로 들어서자 부석사와는 다른 유교문화의 고갱이가 밀려와 온몸으로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이 대단한 곳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배웠으나 정작 이렇게 찾아보기는 처음이었다. 분명히 이곳은 선비문화의 저력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악소리가 울려와 우리를 괴롭게 했다. 서양 고전음악이 들리더니, 이어서 재즈가 들렸다. 분명히 그 소리는 고요해야 할 소수서원의 분위기를 깨는 것이었다. 소수서원이 어떤 곳인가를 생각하면, 결코 들려서는 안 되는소음이었다. 그런데 주차장 한쪽에 자리잡고 있는 커다란 휴게소에서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은 것이었다. 아마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했으리라. 그러나 그 친절이 소수서원의 정취를 크게 훼손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안으로 들어가자 소음은 점차 멀어지더니 들리지 않게 되었다. 소수서원에 담겨 있는 선비들의 정신과 풍류를 생각하면서 한바퀴 돌아보며 느끼는 기분은 각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들이 있었다. 우선 커다란 문화재 안내판들이 문제였다. 그 안내판들은 이곳의 작은 공간들을 마구 망가뜨리고 있다. 원래 이곳에 있었으나 지금은 박물관으로 옮긴 그림들을 안내한답시고 세워놓은 안내판들도 있다. 이것들은 명백한 문화재 훼손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방문객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가 소수서원의 정취를 훼손하듯이, 문화재를 안내한답시고 세워놓은 안내판들이 소수서원의 원래 모습을 망쳐놓고 있는 것이다.
길을 따라 들어가자 제일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제일 큰집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은 관리 동이자 기념관이었다. 그 몸집이며 모습이 소수서원과는 제대로 어울리지 않는다. 비범한 선비의 세계에서 문득 비속한 속인의 세계로 떨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뒷문으로 나가니 죽계별곡을 개발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의 고향으로, 조선 성리학의 성지인 이곳에도 개발의 바람이 맹렬히 불고 있는 것이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다시 매표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나무 숲을 지나 매표소 문을 나서는데, 이번에는 아예 니나노 타령이 들려온다. 서양음악 시간이 끝나고 우리 고전음악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소수서원에 울려 퍼지는 니나노 타령, 우리는 더욱 답답한 마음이 되어 급히 차를 몰아 이곳을 떠나고 말았다.
*출처: 한겨레신문
집의 규모가 줄어 든 데다 여러 가구가 세 들어 살고 있어 옹색하기 그지없고 그나마 나무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한용운은 설악산 백담사에서 시작한 대표시 님의 침묵을 이 집에서 탈고했다.
더구나 이 집은 31독립운동 당시 천도교대표 등과 함께 기미독립선 언문 강령을 작성한 현장이기도 하다.
구한말과 일제시대 문학 예술인들이 많이 거주한 종로구에는 오감도의 시인 이상의 낡은 한옥기와집이 서울대 건축학과 후배들에 의해 보존돼 이상기념관으로 거듭날 전망이다.
이밖에 월탄 박종화(평창동)춘원 이광수(홍지동)의 고택과 근 대 서예대가 소전 손재형(1903~1981)의 고택(서울시 유형문화재 23호대원군 사랑채가 있음)이 전통한국요리 전문집 석파랑과 반으로 나뉜 채 보존돼 있다.
◈근대 개항장인 인천 중구의 조계지 훼손현장〓한국 최초로 서 양식 근대 도시계획이 도입된 인천 또한 근대문화유산 보존대책 이 시급한 곳.
특히 중구 16만평 부지에 일본중국(청)을 비롯, 영국프랑스독일 등이 조계지로 사용한 근대건축물 79점이 훼손위기에 놓여 있다.
이곳은 새로 차이나타운을 건립하면서 많은 근대건축물들이 파괴되고 있다.
지난해부터 인천 중구 북성동선린동의 중국 풍물상가 건립과정에서 중국인이 국내 최초로 세 운 81년 역사의 화교교회인 중화기독교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화교학교내 구 청국영사관 회의청(중구 선린동1910년 건축 ) 목조건물 지붕은 일본식으로 변형됐고 내부공간만 일부 남아있 다.
이곳은 이미 사라진 구 청국 영사관의 황제와 총통 친필 현판 이 걸려있으나 등록문화재로 지정도 안돼, 차이나타운 건설 붐과 함께 훼손될 처지에 있다.
3년 전부터 중구 해안동 일대에 있는 대규모 붉은 조적조 창고(19 40년대 건축)들도 하나 둘 사라지고 대형쇼핑몰이나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한국산업은행의 전신인 구 식산은행(중구 해안동 1919년 건축)은 2001년 8월 철거돼 현재 중구청 공용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형편.
청국과 일본 조차지를 경계 짓던 진입계단 (1884년 건축)은 국내 최초의 언덕형 돌계단으로 인근 조경과 더 불어 보존가치가 높은 역사적 문화유산인데도, 구청에서 아무 관련이 없는 공자상(중국 기증)을 최근 세워 역사현장을 심하게 훼손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출처: 문화일보
-문화재 망치는 속세문화
우리는 굉장한 역사문화 자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잘못된 보존과 관리로 말미암아 많은 자산이 멋대로 망가져서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일이 허다하다. 2월이 끝나갈 무렵에 찾은 부석사와 소수서원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부석사는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우리는 해가 질 무렵에 도착해서 부석사로 오르게 되었다. 저녁 어스름에 잠겨 부석사는 그윽한 신비로움을 풍기고 있었다. 단순히 천년 고찰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정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깃줄을 모두 땅 속으로 깔아서 절 집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어둠에 잠긴 솔숲에서 밤 부엉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도 뜻밖의 기쁨이었다.
워낙에 유명한 곳이니 만큼 그 입구에는 커다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화장실도 아주 잘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커다란 주차장은 분명히 부석사의 분위기와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부석사의 그윽함을 해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관광객들에게 보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커다란 분수와 영주의 관광지를 알리는 커다란 관광안내판은 더욱 더 그렇게 보였다. 부석사는 고립되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부석사를 돌아보고는 도망치듯이 부석사 아랫동네를 떠나 소수서원으로 갔다. 그 입구의 커다란 소나무들이 우거진 숲 사이로 들어서자 부석사와는 다른 유교문화의 고갱이가 밀려와 온몸으로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이 대단한 곳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배웠으나 정작 이렇게 찾아보기는 처음이었다. 분명히 이곳은 선비문화의 저력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악소리가 울려와 우리를 괴롭게 했다. 서양 고전음악이 들리더니, 이어서 재즈가 들렸다. 분명히 그 소리는 고요해야 할 소수서원의 분위기를 깨는 것이었다. 소수서원이 어떤 곳인가를 생각하면, 결코 들려서는 안 되는소음이었다. 그런데 주차장 한쪽에 자리잡고 있는 커다란 휴게소에서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은 것이었다. 아마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했으리라. 그러나 그 친절이 소수서원의 정취를 크게 훼손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안으로 들어가자 소음은 점차 멀어지더니 들리지 않게 되었다. 소수서원에 담겨 있는 선비들의 정신과 풍류를 생각하면서 한바퀴 돌아보며 느끼는 기분은 각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들이 있었다. 우선 커다란 문화재 안내판들이 문제였다. 그 안내판들은 이곳의 작은 공간들을 마구 망가뜨리고 있다. 원래 이곳에 있었으나 지금은 박물관으로 옮긴 그림들을 안내한답시고 세워놓은 안내판들도 있다. 이것들은 명백한 문화재 훼손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방문객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가 소수서원의 정취를 훼손하듯이, 문화재를 안내한답시고 세워놓은 안내판들이 소수서원의 원래 모습을 망쳐놓고 있는 것이다.
길을 따라 들어가자 제일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제일 큰집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은 관리 동이자 기념관이었다. 그 몸집이며 모습이 소수서원과는 제대로 어울리지 않는다. 비범한 선비의 세계에서 문득 비속한 속인의 세계로 떨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뒷문으로 나가니 죽계별곡을 개발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의 고향으로, 조선 성리학의 성지인 이곳에도 개발의 바람이 맹렬히 불고 있는 것이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다시 매표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나무 숲을 지나 매표소 문을 나서는데, 이번에는 아예 니나노 타령이 들려온다. 서양음악 시간이 끝나고 우리 고전음악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소수서원에 울려 퍼지는 니나노 타령, 우리는 더욱 답답한 마음이 되어 급히 차를 몰아 이곳을 떠나고 말았다.
*출처: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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