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강화도 개관
Ⅱ. 전등사
1. 전등사의 역사
2. 전등사 대웅전(大雄殿) - 보물 제 178호
3.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 보물 179호
4. 전등사 범종(梵鍾) - 보물 393호
5. 전등사 대조루(對潮樓)
6. 선원보각(璿源譜閣), 장사각(藏史閣)터
7. 전등사 은행나무 이야기
Ⅲ. 정수사
1. 정수사의 역사
2. 정수사의 연기
3. 정수사의 문화재
Ⅳ. 이규보 묘
Ⅴ. 부근리 고인돌
Ⅵ. 고려궁터
1. 고려시대 궁궐
2. 강화유수부 동헌(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7호)
3. 강화유수부 이방청(경기도 유형문화제 제48호)
4. 강화동종(보물 제11호)
Ⅶ. 강화 역사관
Ⅷ. 광성보
Ⅸ. 초지진
Ⅱ. 전등사
1. 전등사의 역사
2. 전등사 대웅전(大雄殿) - 보물 제 178호
3.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 보물 179호
4. 전등사 범종(梵鍾) - 보물 393호
5. 전등사 대조루(對潮樓)
6. 선원보각(璿源譜閣), 장사각(藏史閣)터
7. 전등사 은행나무 이야기
Ⅲ. 정수사
1. 정수사의 역사
2. 정수사의 연기
3. 정수사의 문화재
Ⅳ. 이규보 묘
Ⅴ. 부근리 고인돌
Ⅵ. 고려궁터
1. 고려시대 궁궐
2. 강화유수부 동헌(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7호)
3. 강화유수부 이방청(경기도 유형문화제 제48호)
4. 강화동종(보물 제11호)
Ⅶ. 강화 역사관
Ⅷ. 광성보
Ⅸ. 초지진
본문내용
불서. 과거칠불(過去七佛)에서 석가모니불을 거쳐 달마(達磨)에 이르는 인도 선종(禪宗)의 조사(祖師)들과, 달마 이후 법안(法眼)의 법제자들에 이르기까지의 중국의 전등법계(傳燈法系)를 밝혔다.
이 있어 전등록이 있는 절로 소문이 나다가 전등사로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얘기들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할 뿐 확실하게 단정지을 수는 없는 실정이다.
여하튼 전등사는 정화궁주의 원찰로서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발전을 거듭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시 전등사가 정화궁주의 원찰이 된 가슴 아픈 사연에 대해 살펴보자. 고려 제 25대 충렬왕은 태자로 책봉된 후 원나라로 가서 원 세조의 딸과 혼인하여 살다가 부왕인 원종이 죽은 뒤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즉위하면서 태안공 인()의 딸을 비로 삼았는데 이 분이 바로 정화궁주이다. 이때부터 충렬왕을 사이에 두고 정화궁주와 원나라 제국공주(齊國空株)는 서로 심한 질투를 했다. 심지어는 ‘정화궁주가 사랑을 잃고 무녀를 시켜 공주를 저주한다’는 투서가 있어 궁주는 옥에 갇히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적국의 공주에게 왕의 총애를 빼앗기고, 자신의 아들마저 모함으로 유폐를 당한 정화궁주는 전등사를 자신의 원찰로 삼아 마음의 의지처로 삼은 듯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1605년(선조 38년)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버렸고, 1614년(광해군 6년)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도 모두 탔다. 이듬해 4월 지경(志敬)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하여 1621년(광해군 13년) 2월 옛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을 거치면서 전등사는 그 국가적 기여로 인해 그 위상이 한층 높아졌으며 1660년(현종 즉위년)에는 강화유수이며 선조의 외손자였던 유심이 이곳 전등사 경내에 선원각과 장사각을 지어 왕실세보와 문적(文績) 그리고 역대 조종의 실록을 이곳으로 이관 보장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1678년(숙종 4년)에는 서울의 춘추관과 성주, 그리고 충주사고(史庫)에 보장되어 있던 왕조실록이 왜란으로 소실되자 전주 사고본을 마리산 높이 469 m. 강화도의 최고봉이며, 산정에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이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塹城壇:사적 136)이 있다. 본래 마리산이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마니산(摩尼山)으로 바뀌어 불리다가, 1995년 7월 27일 학계의 의견을 받아들여 머리으뜸최고의 뜻을 나타내는 마리산으로 개명하였다.
사고 마리산 사고는 인천 강화군 화도면(華道面) 덕포리에 있는 조선시대 사고이다. 5사고 중 하나로 임진왜란으로 4사고 중 전화(戰禍)를 피한 전주사고의 실록을 4부 재인쇄하여 유일본인 전주사고본 1질과 함께 나누어 보관하기 위해 5사고 설치가 논의되어 설치되었다. 그러나 마리산사고도 1653년(효종 4) 실화(失火)로 많은 서책이 소실되자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새로 사고를 짓고 남은 실록과 서책을 옮겨 보관하였다.
로부터 정족산 사고 정족산사고는 1653년(효종 4) 마리산사고에 화재가 일어남으로써 건립이 추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효종대 이후로 강화도가 국가의 위기에 대처할 기지로 적극 개발되었으므로 그 곳에 사고를 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1660년(현종 1) 정족산성이 완성되고 실록을 성 내의 사고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관례대로 장사각(藏史閣)과 함께 선원각(璿源閣)이 세워졌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고로 실록이 옮겨진 것은 1678년(숙종 4)이었다. 이후 실록이 새로 만들어지는 대로 1부씩 보관하였고 그 밖에 왕실 족보나 의궤(儀軌)를 비롯한 여러 정부문서를 함께 보관하였다. 춘추관에 소속되어 그 곳에서 관장하였으나 현지의 관리는 수호사찰인 전등사에서 맡았다.
인 장사각으로 옮겨 보관하게 되며, 아울러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한 왕실관계 문적들도 선원각에 보장하게 되었다. 이로서 전등사는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써 조선 왕실의 비호를 받게 된다. 그리고 경기 서부 일대의 사찰을 관장하는 수사찰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에 따라 1719년 이 절의 최고 승려에게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직위를 부여하였는데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1726년(영조 2년)에 영조가 전등사에 직접 와서 취향당의 제액을 써주고 고쳐 걸게 하였고 1734년에는 곡식 수십석을 하사하기도 했다.
일제시대에 들어서도 전등사는 발전을 계속해 강화와 개성 등 6개 군에 소재하는 34개 사찰을 관리하는 본사로 승격되었고 근래에 들어서도 주요 전각에 대한 해체 및 수리 작업과 중건이 자주 이루어지는 등 불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런 역사를 가진 전등사는 삼랑성 내에 위치한 일종의 산성 사찰로 볼 수 있으며 국토방위와 왕실의 수복을 비는 이중기능을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전등사의 배치를 보면 전형적인 산지 가람의 배치를 따르고 있는데 절 입구의 대조루를 지나면 정면 남향으로 앉아있는 대웅전이 이 건물과 축을 맞추어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요사채 사찰내에서 전각이나 산문 외에 승려의 생활과 관련된 건물을 아울러 이르는 말.승려들이 식사를 마련하는 부엌과 식당, 잠자고 쉬는 공간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또한 기도하러온 신도들이 잠깐 쉬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창고우물장독세탁시설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한데 모여 있다.
가 있고, 서쪽으로는 향로전, 약사전, 명부전, 전묵당, 종각 등이 있다. 다시 서북쪽으로 한 층 높은 곳에는 삼성각이 위치하고 있다.
2. 전등사 대웅전(大雄殿) - 보물 제 178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 기와 지붕 건물의 목조 건물이다. 1916년 해체 수리때 발견된 양간록(梁間錄)에 의하면, 이 건물은 1605년 화재로 절반이 탔고 1614년 12월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21년 윤 2월 7일 서까래를 놓았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조선 중기의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다포계 건물인 이 대웅전에는 귀공포에 각각 나무로 깍은 살색의 나녀상(裸女像)이 있어 처마 네 귀퉁이에서 힘겹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어 눈길을 끄는데 여기에
이 있어 전등록이 있는 절로 소문이 나다가 전등사로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얘기들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할 뿐 확실하게 단정지을 수는 없는 실정이다.
여하튼 전등사는 정화궁주의 원찰로서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발전을 거듭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시 전등사가 정화궁주의 원찰이 된 가슴 아픈 사연에 대해 살펴보자. 고려 제 25대 충렬왕은 태자로 책봉된 후 원나라로 가서 원 세조의 딸과 혼인하여 살다가 부왕인 원종이 죽은 뒤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즉위하면서 태안공 인()의 딸을 비로 삼았는데 이 분이 바로 정화궁주이다. 이때부터 충렬왕을 사이에 두고 정화궁주와 원나라 제국공주(齊國空株)는 서로 심한 질투를 했다. 심지어는 ‘정화궁주가 사랑을 잃고 무녀를 시켜 공주를 저주한다’는 투서가 있어 궁주는 옥에 갇히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적국의 공주에게 왕의 총애를 빼앗기고, 자신의 아들마저 모함으로 유폐를 당한 정화궁주는 전등사를 자신의 원찰로 삼아 마음의 의지처로 삼은 듯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1605년(선조 38년)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버렸고, 1614년(광해군 6년)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도 모두 탔다. 이듬해 4월 지경(志敬)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하여 1621년(광해군 13년) 2월 옛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난을 거치면서 전등사는 그 국가적 기여로 인해 그 위상이 한층 높아졌으며 1660년(현종 즉위년)에는 강화유수이며 선조의 외손자였던 유심이 이곳 전등사 경내에 선원각과 장사각을 지어 왕실세보와 문적(文績) 그리고 역대 조종의 실록을 이곳으로 이관 보장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1678년(숙종 4년)에는 서울의 춘추관과 성주, 그리고 충주사고(史庫)에 보장되어 있던 왕조실록이 왜란으로 소실되자 전주 사고본을 마리산 높이 469 m. 강화도의 최고봉이며, 산정에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이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塹城壇:사적 136)이 있다. 본래 마리산이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마니산(摩尼山)으로 바뀌어 불리다가, 1995년 7월 27일 학계의 의견을 받아들여 머리으뜸최고의 뜻을 나타내는 마리산으로 개명하였다.
사고 마리산 사고는 인천 강화군 화도면(華道面) 덕포리에 있는 조선시대 사고이다. 5사고 중 하나로 임진왜란으로 4사고 중 전화(戰禍)를 피한 전주사고의 실록을 4부 재인쇄하여 유일본인 전주사고본 1질과 함께 나누어 보관하기 위해 5사고 설치가 논의되어 설치되었다. 그러나 마리산사고도 1653년(효종 4) 실화(失火)로 많은 서책이 소실되자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새로 사고를 짓고 남은 실록과 서책을 옮겨 보관하였다.
로부터 정족산 사고 정족산사고는 1653년(효종 4) 마리산사고에 화재가 일어남으로써 건립이 추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효종대 이후로 강화도가 국가의 위기에 대처할 기지로 적극 개발되었으므로 그 곳에 사고를 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1660년(현종 1) 정족산성이 완성되고 실록을 성 내의 사고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관례대로 장사각(藏史閣)과 함께 선원각(璿源閣)이 세워졌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고로 실록이 옮겨진 것은 1678년(숙종 4)이었다. 이후 실록이 새로 만들어지는 대로 1부씩 보관하였고 그 밖에 왕실 족보나 의궤(儀軌)를 비롯한 여러 정부문서를 함께 보관하였다. 춘추관에 소속되어 그 곳에서 관장하였으나 현지의 관리는 수호사찰인 전등사에서 맡았다.
인 장사각으로 옮겨 보관하게 되며, 아울러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한 왕실관계 문적들도 선원각에 보장하게 되었다. 이로서 전등사는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써 조선 왕실의 비호를 받게 된다. 그리고 경기 서부 일대의 사찰을 관장하는 수사찰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에 따라 1719년 이 절의 최고 승려에게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직위를 부여하였는데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1726년(영조 2년)에 영조가 전등사에 직접 와서 취향당의 제액을 써주고 고쳐 걸게 하였고 1734년에는 곡식 수십석을 하사하기도 했다.
일제시대에 들어서도 전등사는 발전을 계속해 강화와 개성 등 6개 군에 소재하는 34개 사찰을 관리하는 본사로 승격되었고 근래에 들어서도 주요 전각에 대한 해체 및 수리 작업과 중건이 자주 이루어지는 등 불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런 역사를 가진 전등사는 삼랑성 내에 위치한 일종의 산성 사찰로 볼 수 있으며 국토방위와 왕실의 수복을 비는 이중기능을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전등사의 배치를 보면 전형적인 산지 가람의 배치를 따르고 있는데 절 입구의 대조루를 지나면 정면 남향으로 앉아있는 대웅전이 이 건물과 축을 맞추어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요사채 사찰내에서 전각이나 산문 외에 승려의 생활과 관련된 건물을 아울러 이르는 말.승려들이 식사를 마련하는 부엌과 식당, 잠자고 쉬는 공간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또한 기도하러온 신도들이 잠깐 쉬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창고우물장독세탁시설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한데 모여 있다.
가 있고, 서쪽으로는 향로전, 약사전, 명부전, 전묵당, 종각 등이 있다. 다시 서북쪽으로 한 층 높은 곳에는 삼성각이 위치하고 있다.
2. 전등사 대웅전(大雄殿) - 보물 제 178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 기와 지붕 건물의 목조 건물이다. 1916년 해체 수리때 발견된 양간록(梁間錄)에 의하면, 이 건물은 1605년 화재로 절반이 탔고 1614년 12월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21년 윤 2월 7일 서까래를 놓았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조선 중기의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다포계 건물인 이 대웅전에는 귀공포에 각각 나무로 깍은 살색의 나녀상(裸女像)이 있어 처마 네 귀퉁이에서 힘겹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어 눈길을 끄는데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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