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의 선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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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허의 선사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鏡虛惺牛의 生涯와 思想
【近代禪의 中興祖】

目 次
1. 들어가면서
2. 경허를 택한 이유
3. 시대적 배경
4. 경허의 생애
1) 출생
2) 출가와 수행
3) 捨敎入禪
(1)悟後保任
(2)禪風振作
(3)修禪結社
4) 入廛垂手
5. 경허의 思想
1)禪思想
2)看話禪風
3)定慧․兜率 結社運動
4)牧牛思想
5)대중적 생활참선
6. 경허의 저술
7. 선종사적 평가
8. 나가면서

◆경허의 약력

◆참고문헌

본문내용

처럼 내가 東鶴寺강원에 살면서 경허의 체취를 그리워하고, 그가 見性하신 도량을 배회한 것이 因緣이었을까?
내가 경허를 택한 이유가 말이다.
경허가 탄생한 조선사회는 抑佛斥僧으로 일관된 法難의 시대로서 正法은 극도로 침체되고 禪法은 그 法脈마저 끊어져 선지식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던 시기이다. 이런 때에 無師自悟한 분이 경허이다.
경허의 現存하는 초상화를 보면 머리는 깍고 수염을 길게 기르고 오른손에 주장자를 꽉 쥐고 앉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머리는 깎아서 세상을 등졌으나 수염은 길러서 丈夫임을 표하느니」 李興雨, 空性의 피안길, 동화문화사, 1980 P160~161
김시습은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았겼다는 소식을 듣고, 放聲大哭한 후, 儒典, 儒依를 모두 불살라 버리고 삭발을 했으나 수염은 깍지 않은 채 「削髮避當世留髥表丈夫」라 했다. 그후 사명당(1544~1610)도 머리는 깎았으나 수염은 길렀다고 한다. 그리고 「削髮避塵世,存髥表丈夫」라 읊었다. 경허는 서산대사를 존경하고 그의 12세손임을 자처했는데 몸 모양은 머리는 깎고 수염은 길러 사명당과 같이 했다.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은 어쩌면 쓸쓸하고 초라하기만 했던 생애, 무소유로 살다간 경허의 전 생애와 그의 사상을 통하여 한국불교 禪門의 사상적인 골격과 禪風의 기틀을 마련한 그의 禪法정신과 불법사상을 이번 조계종사 과제물을 토대로 공부해 보고 아울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주소와 정체성을 살피고자 한 것이 내가 경허를 택한 목적이었다.
만공의 辯처럼 범과 같고 부처와 같은 너무나 인간적인 그러한 경허를 우리는 오늘 만나려 한다.
3. 시대적 배경
鏡虛(1849~1912)가 생존했던 우리 나라 19세기 중엽하면 조선의 왕업은 終幕에 접어들어 최후의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다. 왕조의 無力과 몰락으로 서민층의 생활에 심각한 위협을 주었으며 살아간다는 것이 뼈를 깍는 고통이었던 시기였다.
당시는 조선왕조가 서서히 몰락하여 종국에는 한일합방이란 민족적 비애를 맞아야 했던 격동기인 동시에 과도기적 시대였으므로, 불안전한 요소가 사회 전반에 고조되고 있었다. 흔히 하나의 체계가 무너질 무렵에는 말기 현상적인 병리가 나타나듯, 19세기 말, 20세기 초기의 사회상은 말이 아니었다. 국가 기강 해이에서 오는 가렴주구는 극에 달했으며, 계층간의 갈등 그리고 사회 전반에 무질서 등으로 병리 요소들이 나타났다.
국제적으로 한반도에서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선진열강들의 角逐이 날로 심해져 국가의 존립이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 있었고, 프랑스, 미국, 영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문호를 개방하라는 압력이 날로 심해 갔다. 급기야 1876년에는 조선의 문호를 여는 丙子修護條約이 체결되었고, 1905년에는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기는 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었으며, 마침내 1910년 경허 입적을 2년 앞두고 韓日合邦으로 주권을 빼앗겨 일제의 가혹한 植民政治가 시작되었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1811년 홍경래의 난, 1862년 진주민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나는 등 극도의 정치, 사회적 혼란이 거듭되었고, 그러한 혼란기에 나라의 관사들은 오히려 폭정과 수탈을 자행하여 민가의 참담한 생활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시대였다.
더욱이 불교교단은 조선왕조의 계속적인 숭유억불 정책으로 사회경제적인 토대를 완전히 잠식시켰으며, 교단은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위축된 상태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절을 수호하고 보존하는 데 급급하여, 불교 본래의 사명인 교화나 사회활동과 같은 중생구제에는 아예 손길을 돌릴 겨를을 갖지 못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修道場의 開設도, 참되게 수행하는 모습도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었다. 단지 의례적인 예식이나 외형적인 기복에만 의존한 형식적 불교에 치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당시의 불교상황을 생각해 볼 때 경허의 출생은 큰 의미를 안겨준다.
경허는 침체된 불교계에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수행과 수도에 눈을 뜨게 하여 공부하는 풍토를 조성케 함으로써 불교계에 생명력을 되찾게 하고, 나아가서는 많은 人才를 배출해 냈다. 그러므로 경허는 근세불교의 중흥조이며, 암울하고 어두웠던 시대에 반야의 法燈을 밝힌 선각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4. 경허의 생애
1)출생
경허(鏡虛)(1849~1921)선사의 속성은 송(宋)씨이며 법명은 성우(惺牛), 속명은 동욱(東旭), 법호는 경허(鏡虛)이다. 그는 1849년 8월 24일 전주 子東里에서 여산(礪山) 宋斗玉씨와 密陽 朴氏부인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나 세상에 나온 지 3일 만에야 비로소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집안은 가난했지만 뼈대있는 선량한 가문이었다.
경허의 나이 9세 때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를 따라 淸溪寺에 入山하여 桂虛大師 法下에서 출가자의 첫걸음을 내디뎠으며, 그의 형 역시 공주 마곡사에서 일찍이 得度하였다.
2)출가와 수행
청계사에서 시작된 어린 경허의 행자생활은 절 집의 혹독한 노동을 통하여 출가 초기의 수행을 쌓아 가면서 경학수련을 받게 되었다.
1862년 (철종13년) 그의 나이 14세때 朴처사라는 儒者에게서 처음으로 문자를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는 매일 5~6장의 글을 능히 외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才童으로 칭송이 자자하게 되었다.
이때 경허에게 佛緣을 처음으로 맺어준 계허대사가 퇴속하면서 경허를 계룡산 東鶴寺에 있는 萬化講伯에게 천거했다. 이 동학사 만화강백 밑에서 경허는 一大時敎와 儒典, 老莊까지 두루 섭렵하여 실력을 공인 받게 되었다. 23세 때 동학사 강원 講師로 추대되어 諸方學人을 지도하며 30세 전후 젊은 강백으로 크게 명망을 떨쳤다. 그도 그럴 것이 훤칠한 키에 우렁찬 음성, 유창한 어조, 그 위에 젊은 기백과 정열로 깊고 넓은 지식(知識)을 구사했으니, 그의 종교적 천재(天才)는 이때 벌써 발휘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3)사교입선(捨敎入禪)
경허의 나이 31세 때 여름 문득 옛 은사인 계허를 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학인들을 쉬게 하고 행장을 갖추어 상경하였다. 도중 천안 인근에서 모진 風雨를 만나 民家에 머물러 피하려 했으나, 집 주인이 내쫓는지라 다른 집으로 가 보았으나 역시 사정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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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6.22
  • 저작시기2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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