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인물분석
1)「무정」에서의 애정관과 교육관
①「무정」에서의 애정관 : 신분상승과 개인적 야망
②「무정」에서의 교육관 : 교육에 의한 계몽의 의지
2)「무정」에서의 신여성상
2.「무정」의 근대의 수용과 기독교
1) 계몽의 형상화
2) 기독교와 조선적 박애주의
Ⅲ. 결론
*참고문헌
Ⅱ. 본론
1. 인물분석
1)「무정」에서의 애정관과 교육관
①「무정」에서의 애정관 : 신분상승과 개인적 야망
②「무정」에서의 교육관 : 교육에 의한 계몽의 의지
2)「무정」에서의 신여성상
2.「무정」의 근대의 수용과 기독교
1) 계몽의 형상화
2) 기독교와 조선적 박애주의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기생으로 전락하게 된 영채는 기생 월화에게서 지조를 배우게 된다는 것은, 박진사, 즉 영채의 부친에게서 배운 구시대의 가치관과도 통하는 것이다. 비록 남자들에게 웃음과 기예를 파는 입장이기는 하나 구시대 가치관을 학습한 영채에게는 정조란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기생 월화는 박진사의 다른 모습이라고 할 만 하다.
월화는 송이라는 그녀의 별칭이 암시하듯 타락한 현실을 비판하고 과거의 멋과 낭만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신현재, 『이광수 소설의 분석적 연구』, 서울 : 삼지원, 1986.
인간적인 진실과 정숙한 도덕이 부재하는 현실에서 이퇴계 등의 인물을 생각하는 과거지향적인 인물인 것이다.
그녀 역시 영채처럼 현실적인 상황과 지향적인 이상이 괴리된 인물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정(精)이 영채에게 교육자의 모습으로 다가간다. 영채가 볼 때 월화는 자신이 관념상으로 배우면 도덕적 이상이 그대로 구현된 화신 같은 존재였다. 월화는 영채에게 ‘시 읽기와 시 짓기’를 가르치고 육체적으로 성숙해 가는 영채의 앞날을 근심하며 도덕의식을 심어 주려 한다.
영채의 장래에 설움이 많을 것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월화는 영채가 잘못하여 세상에 섞이기를 두려워하는 모양으로 항상 “영채야, 지금 세상에는 우리의 품을 의탁할 만한 사람이 없느니라.” 하고 옛날 시로 일생의 벗을 삼기를 권하였다.
월화의 이러한 가르침을 영채는 긍정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이는 어려서 박진사에게 배운 교육과도 일맥상통하는 도덕의식에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화의 교육을 박진사의 교육이 추상적인 가르침이었던 반면에 구체적 현실의 상황에서 ‘참사랑’으로 제시되고 있다.
너는 부디 세상 사람에게 속지 말고 일생을 너 혼자 살아라. 옛날 사람으로 벗을 삼아라. 만일 네 마음에 든 사람을 만나지 못하거든.
월화는 이러한 가르침에 영채에게 하면서 타락한 현실과 조율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월화는 평양 대성학교 함교장의 연설에 영채를 데리고 다닌다. 월화는 함교장의 연설에 매료되어 함교장을 연모하면서 평양의 색한들을 조소한다. 월화의 이린 모습은 영채에게 하나의 지표가 된다. 영채에게는 월화가 함교장을 연모하듯, 어릴 적부터 혼인을 약속한 형식이라는 인물이 있다. 기생의 신분으로 전락했지만 형식을 향한 마음은 윌화가 함교장에게 갖는 그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영채는 7년 전에 양반가 처녀에서 기생의 처지로 전락했으나 이를 인정 하지 않았다. 형식과 결혼하겠다는 환상과, 기생이지만 정조를 고수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그녀를 지탱시켜왔다. 그런데 정량사에서 정조를 겁탈당하면서 기존의 환상이 철저히 깨어지고, 이를 계기로 근대적인 가치세계로 이행하여 재생의 길로 들어선다. 구시대적 가치관을 신봉하는 영채에게 있어 정조의 유린은 ‘새로운 방식의 삶’을 찾지 못하는 한 죽음으로밖에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죽음을 결심하고 평양행 기차에 올랐는데 뜻밖에 병욱과 만나게 된다. 병욱은 신문명과 신사상을 접한 근대적 여성이다. 영채가 자살로 생을 마감 지으려 하자 병욱은 영채에게 새로운 삶의 길로 인도한다. 구시대적 가치에 묶여 혼돈감과 상실감에 젖어있는 영채에게 그녀는 대화를 통해 영채가 가진 기존의 가치세계가 그릇되었다는 것 깨뜨려 준다.
근대적 여성은 남자의 소유물, 부속물로서의 삶이 아니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삶, 부모에 의한 타율적인 배우자 선택이 아닌 자율적인 선택, 독립된 개체로서 자아각성을 하고 실천하여 사회와의 조화를 이루는 삶을 강조한다. 영채는 병욱의 말에 압도되며 자신의 생각이 그릇된 것임을 깨닫고 상실감, 절망감으로부터 구원을 발견하는 예감을 갖는다. 그리므로써 그들은 상호관계를 형성 한다.
영채는 이 말을 들고 놀랐다. 열녀라는 생각과 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말이 옳은 것 같다. 과연 지금토록 형식을 사랑할 적은 없었고 다만 허깨비로 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들어 놓고, 그 사람이 아닌 줄을 깨닫고 실망하고 나서는 아아, 이제는 영원히 형식을 보지 못하겠구나 하고 실망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매 영채는 잘못 생각하였던 것을 깨달는 생각과 또 아직 절망하였던 중에 새로운 광명이 발하는 듯 하였다.
이는 교육을 통해 다시 태어나려는 영채의 모습이다. 병욱이 제세한 새로운 가치와의 만남은 어둡고 힘든 절망의 늪으로 치닫게 했던 과거의 가치관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병욱에게만 교육자 모습을 띠지는 않는다. 병욱은 영채에게 서양적 사상을 불어 넣었지만, 영채는 병욱에게 동양적 사상을 배운다.
이러한 신 · 구의 조화가 삶을 기쁨으로 채울 뿐만 아니라, 영채로 대표되는 전통과 병욱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가치도 함께 점목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더 나아가 영채는 진정한 자기발견에까지 이르고 있다. 전에는 천하게만 생각했던 자기의 소질과 재주를 중요한 재능으로 깨달아 가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가 나아갈 방향까지 설정하고 있다. 동경 유학생 병욱은 영채가 지닌 도덕관이 낡은 도덕관이라 비판한다.
“영채씨도 이러한 낡은 사상적 종이 되어서 지금까지 속절없는 괴로움을 맛 보셨습니다. 그 속박을 끊으십시오. 그 꿈을 깨십시오. 저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십시오. 자유를 얻으십시오.”
병욱은 영채에게, 과거의 도덕적 가르침에서 오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권고하는 것이다. 병욱을 다라 그녀의 집으로 간 영채는, 그녀의 집안에도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영채가 발견한 병욱의 집안의 갈등 역시 동시대적 사실성을 드러낸다. 이렇듯 「무정」에 등장하는 인물들 사이에서는 근대적인 자각과 이를 타인들에게 전달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상세하게 형상화되고 있다.
「무정」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개인 간의 갈등들에 민족의 재난 앞에서는 아주 작은 일에 지나리 않는다는 것으로 형상화되고 이라한 시련은 극복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이 제시된다. 이는 작가의 의도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 이다.
교육이라는 틀 속에서 ‘너’와 ‘나’로 분열되었던 인간관계가 ‘우리’라는 공동체적 관계로 이행하면서 일체감을 갖는다. 이는 식민지 시대의 개인들이 지녀야 할 필연적인 공동체적인
기생으로 전락하게 된 영채는 기생 월화에게서 지조를 배우게 된다는 것은, 박진사, 즉 영채의 부친에게서 배운 구시대의 가치관과도 통하는 것이다. 비록 남자들에게 웃음과 기예를 파는 입장이기는 하나 구시대 가치관을 학습한 영채에게는 정조란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기생 월화는 박진사의 다른 모습이라고 할 만 하다.
월화는 송이라는 그녀의 별칭이 암시하듯 타락한 현실을 비판하고 과거의 멋과 낭만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신현재, 『이광수 소설의 분석적 연구』, 서울 : 삼지원, 1986.
인간적인 진실과 정숙한 도덕이 부재하는 현실에서 이퇴계 등의 인물을 생각하는 과거지향적인 인물인 것이다.
그녀 역시 영채처럼 현실적인 상황과 지향적인 이상이 괴리된 인물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정(精)이 영채에게 교육자의 모습으로 다가간다. 영채가 볼 때 월화는 자신이 관념상으로 배우면 도덕적 이상이 그대로 구현된 화신 같은 존재였다. 월화는 영채에게 ‘시 읽기와 시 짓기’를 가르치고 육체적으로 성숙해 가는 영채의 앞날을 근심하며 도덕의식을 심어 주려 한다.
영채의 장래에 설움이 많을 것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월화는 영채가 잘못하여 세상에 섞이기를 두려워하는 모양으로 항상 “영채야, 지금 세상에는 우리의 품을 의탁할 만한 사람이 없느니라.” 하고 옛날 시로 일생의 벗을 삼기를 권하였다.
월화의 이러한 가르침을 영채는 긍정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이는 어려서 박진사에게 배운 교육과도 일맥상통하는 도덕의식에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화의 교육을 박진사의 교육이 추상적인 가르침이었던 반면에 구체적 현실의 상황에서 ‘참사랑’으로 제시되고 있다.
너는 부디 세상 사람에게 속지 말고 일생을 너 혼자 살아라. 옛날 사람으로 벗을 삼아라. 만일 네 마음에 든 사람을 만나지 못하거든.
월화는 이러한 가르침에 영채에게 하면서 타락한 현실과 조율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월화는 평양 대성학교 함교장의 연설에 영채를 데리고 다닌다. 월화는 함교장의 연설에 매료되어 함교장을 연모하면서 평양의 색한들을 조소한다. 월화의 이린 모습은 영채에게 하나의 지표가 된다. 영채에게는 월화가 함교장을 연모하듯, 어릴 적부터 혼인을 약속한 형식이라는 인물이 있다. 기생의 신분으로 전락했지만 형식을 향한 마음은 윌화가 함교장에게 갖는 그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영채는 7년 전에 양반가 처녀에서 기생의 처지로 전락했으나 이를 인정 하지 않았다. 형식과 결혼하겠다는 환상과, 기생이지만 정조를 고수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그녀를 지탱시켜왔다. 그런데 정량사에서 정조를 겁탈당하면서 기존의 환상이 철저히 깨어지고, 이를 계기로 근대적인 가치세계로 이행하여 재생의 길로 들어선다. 구시대적 가치관을 신봉하는 영채에게 있어 정조의 유린은 ‘새로운 방식의 삶’을 찾지 못하는 한 죽음으로밖에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죽음을 결심하고 평양행 기차에 올랐는데 뜻밖에 병욱과 만나게 된다. 병욱은 신문명과 신사상을 접한 근대적 여성이다. 영채가 자살로 생을 마감 지으려 하자 병욱은 영채에게 새로운 삶의 길로 인도한다. 구시대적 가치에 묶여 혼돈감과 상실감에 젖어있는 영채에게 그녀는 대화를 통해 영채가 가진 기존의 가치세계가 그릇되었다는 것 깨뜨려 준다.
근대적 여성은 남자의 소유물, 부속물로서의 삶이 아니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삶, 부모에 의한 타율적인 배우자 선택이 아닌 자율적인 선택, 독립된 개체로서 자아각성을 하고 실천하여 사회와의 조화를 이루는 삶을 강조한다. 영채는 병욱의 말에 압도되며 자신의 생각이 그릇된 것임을 깨닫고 상실감, 절망감으로부터 구원을 발견하는 예감을 갖는다. 그리므로써 그들은 상호관계를 형성 한다.
영채는 이 말을 들고 놀랐다. 열녀라는 생각과 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말이 옳은 것 같다. 과연 지금토록 형식을 사랑할 적은 없었고 다만 허깨비로 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들어 놓고, 그 사람이 아닌 줄을 깨닫고 실망하고 나서는 아아, 이제는 영원히 형식을 보지 못하겠구나 하고 실망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매 영채는 잘못 생각하였던 것을 깨달는 생각과 또 아직 절망하였던 중에 새로운 광명이 발하는 듯 하였다.
이는 교육을 통해 다시 태어나려는 영채의 모습이다. 병욱이 제세한 새로운 가치와의 만남은 어둡고 힘든 절망의 늪으로 치닫게 했던 과거의 가치관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병욱에게만 교육자 모습을 띠지는 않는다. 병욱은 영채에게 서양적 사상을 불어 넣었지만, 영채는 병욱에게 동양적 사상을 배운다.
이러한 신 · 구의 조화가 삶을 기쁨으로 채울 뿐만 아니라, 영채로 대표되는 전통과 병욱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가치도 함께 점목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더 나아가 영채는 진정한 자기발견에까지 이르고 있다. 전에는 천하게만 생각했던 자기의 소질과 재주를 중요한 재능으로 깨달아 가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가 나아갈 방향까지 설정하고 있다. 동경 유학생 병욱은 영채가 지닌 도덕관이 낡은 도덕관이라 비판한다.
“영채씨도 이러한 낡은 사상적 종이 되어서 지금까지 속절없는 괴로움을 맛 보셨습니다. 그 속박을 끊으십시오. 그 꿈을 깨십시오. 저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십시오. 자유를 얻으십시오.”
병욱은 영채에게, 과거의 도덕적 가르침에서 오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권고하는 것이다. 병욱을 다라 그녀의 집으로 간 영채는, 그녀의 집안에도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영채가 발견한 병욱의 집안의 갈등 역시 동시대적 사실성을 드러낸다. 이렇듯 「무정」에 등장하는 인물들 사이에서는 근대적인 자각과 이를 타인들에게 전달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상세하게 형상화되고 있다.
「무정」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개인 간의 갈등들에 민족의 재난 앞에서는 아주 작은 일에 지나리 않는다는 것으로 형상화되고 이라한 시련은 극복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이 제시된다. 이는 작가의 의도가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 이다.
교육이라는 틀 속에서 ‘너’와 ‘나’로 분열되었던 인간관계가 ‘우리’라는 공동체적 관계로 이행하면서 일체감을 갖는다. 이는 식민지 시대의 개인들이 지녀야 할 필연적인 공동체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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