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중국이 고구려사를 저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논리는 통일다민족국가론이다.
Ⅲ. 동북공정은 통일다민족국가론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연구프로젝트이다
Ⅳ. 고구려사는 한국사의 일부이다
Ⅴ. 고구려사를 저들의 역사로 만들기 위한 중국의 주장에는 억지가 많다
Ⅵ.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Ⅱ. 중국이 고구려사를 저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논리는 통일다민족국가론이다.
Ⅲ. 동북공정은 통일다민족국가론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연구프로젝트이다
Ⅳ. 고구려사는 한국사의 일부이다
Ⅴ. 고구려사를 저들의 역사로 만들기 위한 중국의 주장에는 억지가 많다
Ⅵ.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본문내용
만든 역사유적으로 보고, 심지어는 그곳에 가서 최고의 경배를 드리기도 하는데, 이런 관점이 중국의 학자와 백성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여섯째, 한족의 선조가 한반도 북부를 차지한 것이 천년이 넘었다. 4세기 초에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를 점령한 것은 다른 민족의 토지를 점령한 것이다. 한족(漢族) 정권이 반도의 북부를 쳐서 점령하는 것은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는 것이며, 수당(隨唐)이 고구려를 친 것은 대외 침략전쟁이 아니라 중국의 국내 민족 간의 전쟁이었다.
일곱째, 왕씨의 고려는 신라인, 백제인, 일부 고구려인, 한인 후예들이 세운 것이다.
여덟째, 오늘날의 조선족으 s고대 조선반도 남부의 삼한에서 비롯되어, 신라인을 핵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당이 신라에게 대동강 이남을 주고, 요(遼)가 압록강 이동 여진 영토를 고려에게 주었다. 명(明)은 도문강 이남의 땅을 조선에게 주었다. 이렇게 중조국경이 형성되었다. 오늘날 조선 및 한국의 학자들은 다른 속셈을 가지고 오랜 역사 속의 민족과 정권이 어디에 속하는가 하는 논쟁을 일으켜 중국의 땅을 조선의 것이라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이것은 두 나라 사이의 우의를 파괴하는 무리한 요구이다. 만일 세계 각국이 모두 1000년 전의 역사분쟁을 가지고 오늘의 국경을 다시 논증하려 한다면 세계적인 대란이 발생할 것이다. 중국 정부와 학자들은 모두 지금의 중조 두 나라의 긴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전통적 국경을 승인한다. 다만 일부 조선과 한국의 학자들이 다른 속셈을 가지고 중국 영토를 침략하려고 하는 관점을 우리는 반드시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반박하여야 하며, 그들의 감추어진 나쁜 계략을 폭로하여야 한다.
손진기의 이 글은 북한에서 나온 <조선전사>의 세련되지 못한 표현과 한국 및 조선족 관광객들의 신중치 못한 행동이 중국을 자극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국인들이 마땅히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역사상의 고구려가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라고 하여, 그 땅을 수복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한중간의 현재의 국경은 존중되어야 한다. 앞으로 멀지 않은 장래에 동북아시아 지역에도 유럽공동체와 같은 경체협력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다. 누구의 영토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주가 옛 고구려 영토였다고 하여, 수복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더욱이 불필요한 발언을 함으로써 양국 간에 정치외교적인 마찰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이외의 손진기 주장에 대해서는 변강사지연구중심의 입장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언급하였다. 손진기 역시 고구려가 단순한 외교적 의례관계에서 중국의 관작을 받은 것을 가지고, 고구려사가 중국사에 귀속된다고 하고 있는데 이 또한 외교관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이다. 고구려가 중국에 귀속되지 않았으니 고구려를 지방민족정권이라 하거나, 수당과의 전쟁을 중국의 국내 민족 간의 전쟁이라 함도 억지이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와 남쪽의 신라, 백제는 하나의 민족으로서 한예였기에, 조선족은 고대 조선반도 남부의 삼한에서 비롯되어, 신라인을 핵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고 함도 역사를 잘못 인식한 결과이다.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동북 전역과 조선반도가 모두 연의 영역에 속하였고 하지만, 연의 영역은 압록강을 넘어온 적이 없고, 대개 요하 서쪽에 있었다.
고구려가 한(漢)의 혀도군 영토 안에서 건국되었고 그 역사가 한사군 영역 내에서 전개되었다고 주장한다. 한반도 북부가 한사군 즉, 낙랑, 진번, 현도, 임둔의 영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서> 지리지에 6만2812호, 40만6748명이었던 낙랑군의 인구는 <진서>지리지에서는 낙랑군3700호, 대방군 4900호로 줄어들었다. 이는 낙랑군, 대방군이 313년, 314년까지 남아 있기는 하였지만 단순 계산으로 해도 낙랑군의 인구는 설치 당시의 100의 5로 줄어들어 그 영역 또한 매우 축소된 가운데, 극히 일부지역에서 소수의 한족(漢族)과 친중국계 조선인을 지배하는 형태로 명맥만 유지하다가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하기야 기년명전이나 고분벽화의 묵서명을 근거로 낙랑, 대방군이 축출된 후에도 중국인들이 평안, 황해도 일대에 많이 남아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평안도, 황해도 일대의 전축분에서 나온 기년명전이 광개토왕대인 407년까지 만들어 졌다고 하는 주장이 그것이다. 고구려에 의해 낙랑, 대방군이 축출된 313년, 314년까지 뿐 아니라 407년가지 평안, 황해도 일대에 중국인들이 남아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안악3호분의 묘주를 전연에서 망명온 동수라고 하는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견해이다. 이 견해를 따를 경우,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 중국인들이 동수가 죽은 357년까지도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어서 동수는 그들 중국인의 대표이거나, 혹은 그들 중국인을 지배하기 위해 파견한 존재였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주장은 314년까지 한반도 북부가 한사군의 영역이었을 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중국의 영향이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사가 중국사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중국학자들의 주장을 본의 아니게 지지하는 결과를 낳게 될 우려가 있다.
이들 견해와는 달리, 북한학자들과 필자는 안악3호분을 고국원왕릉이라 주장한다. 안악3호분의 묵서명에는 동수가 357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의 출신지는 <유주 요동 평곽 도향 경상리>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동수가 죽은 357년에는 요동이 유주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묵서가 기재될 수 없다. 357년에 묵서명이 작성되었다면, 동수의 출신지는 <유주 요동>이 아니라 <평주 요동>으로 기재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동수의 출신지가 <유주 요동>으로 기재되어 있음은 요동군이 유주에 속하였던 370년에서 380년 사이에 안악3호분이 축조되었고, 그 때 이 묵서명이 기재되었음을 뜻한다. 무덤의 노부행렬도에 <성상번>이라고 한 표기는 왕의 깃발을 의미하고, 370년에서 380년 사이에 죽은 왕이 이 무덤의 주인이라는 뜻이 된다. 이 시기에 죽은 고구려의 왕은 고국원왕이다. 무덤의 벽화에는 연화문 또한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 벽화가 그려
여섯째, 한족의 선조가 한반도 북부를 차지한 것이 천년이 넘었다. 4세기 초에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를 점령한 것은 다른 민족의 토지를 점령한 것이다. 한족(漢族) 정권이 반도의 북부를 쳐서 점령하는 것은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는 것이며, 수당(隨唐)이 고구려를 친 것은 대외 침략전쟁이 아니라 중국의 국내 민족 간의 전쟁이었다.
일곱째, 왕씨의 고려는 신라인, 백제인, 일부 고구려인, 한인 후예들이 세운 것이다.
여덟째, 오늘날의 조선족으 s고대 조선반도 남부의 삼한에서 비롯되어, 신라인을 핵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당이 신라에게 대동강 이남을 주고, 요(遼)가 압록강 이동 여진 영토를 고려에게 주었다. 명(明)은 도문강 이남의 땅을 조선에게 주었다. 이렇게 중조국경이 형성되었다. 오늘날 조선 및 한국의 학자들은 다른 속셈을 가지고 오랜 역사 속의 민족과 정권이 어디에 속하는가 하는 논쟁을 일으켜 중국의 땅을 조선의 것이라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이것은 두 나라 사이의 우의를 파괴하는 무리한 요구이다. 만일 세계 각국이 모두 1000년 전의 역사분쟁을 가지고 오늘의 국경을 다시 논증하려 한다면 세계적인 대란이 발생할 것이다. 중국 정부와 학자들은 모두 지금의 중조 두 나라의 긴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전통적 국경을 승인한다. 다만 일부 조선과 한국의 학자들이 다른 속셈을 가지고 중국 영토를 침략하려고 하는 관점을 우리는 반드시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반박하여야 하며, 그들의 감추어진 나쁜 계략을 폭로하여야 한다.
손진기의 이 글은 북한에서 나온 <조선전사>의 세련되지 못한 표현과 한국 및 조선족 관광객들의 신중치 못한 행동이 중국을 자극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국인들이 마땅히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역사상의 고구려가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라고 하여, 그 땅을 수복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한중간의 현재의 국경은 존중되어야 한다. 앞으로 멀지 않은 장래에 동북아시아 지역에도 유럽공동체와 같은 경체협력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다. 누구의 영토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주가 옛 고구려 영토였다고 하여, 수복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더욱이 불필요한 발언을 함으로써 양국 간에 정치외교적인 마찰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이외의 손진기 주장에 대해서는 변강사지연구중심의 입장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언급하였다. 손진기 역시 고구려가 단순한 외교적 의례관계에서 중국의 관작을 받은 것을 가지고, 고구려사가 중국사에 귀속된다고 하고 있는데 이 또한 외교관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이다. 고구려가 중국에 귀속되지 않았으니 고구려를 지방민족정권이라 하거나, 수당과의 전쟁을 중국의 국내 민족 간의 전쟁이라 함도 억지이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와 남쪽의 신라, 백제는 하나의 민족으로서 한예였기에, 조선족은 고대 조선반도 남부의 삼한에서 비롯되어, 신라인을 핵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고 함도 역사를 잘못 인식한 결과이다.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동북 전역과 조선반도가 모두 연의 영역에 속하였고 하지만, 연의 영역은 압록강을 넘어온 적이 없고, 대개 요하 서쪽에 있었다.
고구려가 한(漢)의 혀도군 영토 안에서 건국되었고 그 역사가 한사군 영역 내에서 전개되었다고 주장한다. 한반도 북부가 한사군 즉, 낙랑, 진번, 현도, 임둔의 영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서> 지리지에 6만2812호, 40만6748명이었던 낙랑군의 인구는 <진서>지리지에서는 낙랑군3700호, 대방군 4900호로 줄어들었다. 이는 낙랑군, 대방군이 313년, 314년까지 남아 있기는 하였지만 단순 계산으로 해도 낙랑군의 인구는 설치 당시의 100의 5로 줄어들어 그 영역 또한 매우 축소된 가운데, 극히 일부지역에서 소수의 한족(漢族)과 친중국계 조선인을 지배하는 형태로 명맥만 유지하다가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하기야 기년명전이나 고분벽화의 묵서명을 근거로 낙랑, 대방군이 축출된 후에도 중국인들이 평안, 황해도 일대에 많이 남아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평안도, 황해도 일대의 전축분에서 나온 기년명전이 광개토왕대인 407년까지 만들어 졌다고 하는 주장이 그것이다. 고구려에 의해 낙랑, 대방군이 축출된 313년, 314년까지 뿐 아니라 407년가지 평안, 황해도 일대에 중국인들이 남아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안악3호분의 묘주를 전연에서 망명온 동수라고 하는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견해이다. 이 견해를 따를 경우, 평안도 황해도 일대에 중국인들이 동수가 죽은 357년까지도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어서 동수는 그들 중국인의 대표이거나, 혹은 그들 중국인을 지배하기 위해 파견한 존재였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주장은 314년까지 한반도 북부가 한사군의 영역이었을 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중국의 영향이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사가 중국사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중국학자들의 주장을 본의 아니게 지지하는 결과를 낳게 될 우려가 있다.
이들 견해와는 달리, 북한학자들과 필자는 안악3호분을 고국원왕릉이라 주장한다. 안악3호분의 묵서명에는 동수가 357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의 출신지는 <유주 요동 평곽 도향 경상리>로 되어 있다. 그러나 동수가 죽은 357년에는 요동이 유주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묵서가 기재될 수 없다. 357년에 묵서명이 작성되었다면, 동수의 출신지는 <유주 요동>이 아니라 <평주 요동>으로 기재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동수의 출신지가 <유주 요동>으로 기재되어 있음은 요동군이 유주에 속하였던 370년에서 380년 사이에 안악3호분이 축조되었고, 그 때 이 묵서명이 기재되었음을 뜻한다. 무덤의 노부행렬도에 <성상번>이라고 한 표기는 왕의 깃발을 의미하고, 370년에서 380년 사이에 죽은 왕이 이 무덤의 주인이라는 뜻이 된다. 이 시기에 죽은 고구려의 왕은 고국원왕이다. 무덤의 벽화에는 연화문 또한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 벽화가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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