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 답사기 (고궁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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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화유적 답사기 (고궁을 다녀와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서론
가 덕수궁의 역사
1) 덕수궁의 창건배경
2) 덕수궁의 변천사
나. 덕수궁을 가게 된 동기
다. 덕수궁을 가면서

2.본론
가. 대한문
나. 금천교
다. 하마비
라. 중화문
바. 중화전
사. 석어당
아. 덕홍전 / 함녕전
자. 정관헌
차. 즉조당
아. 준명당
차. 분수대 / 양부일구
카. 석조전
타. 석조전별관
파 .광명문
하. 선원전터
거. 연못과 매점

3. 결론

4. 참고사이트

본문내용

서부 황화방 북원(西部 皇華坊 北原)에 능을 만들고 정릉(貞陵)이라 했다. 정릉의 위치는 현 미대사관저 일대로 추정된다. 오늘날 덕수궁 일대를 정동(貞洞)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정릉동(貞陵洞)에서 유래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 정책을 있었는데 어떻게 해서 덕수궁에 있는지 알 수 가 없었다. 이것은 태조의 유언으로 이 동종이 남아 있게 된 이유라고 한다.
흥천사 동종은 세조 7년(1461) 주조된 후 동대문을 거쳐, 종루(종각)에 걸려 시각을 알려주다가 다시 광화문에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광화문이 일제에 의해 이전되면서 창경궁으로 다시 옮겨진 뒤 해방이후 이곳 덕수궁 광명문의 지붕 밑으로 오게 되었다.
한편 흥천사는 현종 10년(1669) 신흥사로 개칭하였고 현재 성북구 돈암동에 자리잡게 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윤비가 한국전쟁 무렵 신흥사에 머물며 불공을 드리기도 했다. 흥천사 동종은 고려시대 범종 양식을 계승한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범종으로 꼽을 수 있다.
신기전기화차(神機箭機火車)
신기전기화차는 신기전(神機箭)이라는 로켓 100발을 장전하여 차례로 발사할 수 있는 틀(신기전기:神機箭機)을 화차(火車)에 탑재(搭載)하여 화차 수레의 발사각도를 조절한 뒤 동시에 위층에서부터 아래층까지 차례로 100발을 발사했다. 신기전은 고려말 최무선이 제조한 주화(走火)를 세종 30년(1448년) 개량하여 만든 조선시대 로켓병기이다. 일본은 조총으로 무장했지만 우리나라는 이런 로켓포가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에서 신기전기화차의 가공할 위력이 발휘되기도 했다
하. 선원전터
선원전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와 당대 왕의 4대조 어진(御眞:임금의 초상화)을 모셔놓고 수시로 왕이 다례(茶禮)를 올리던 곳이다. 그런만큼 선원전은 궁궐 안에 자리잡고 가장 존귀하게 받들어지며, 일상적으로 기념되던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덕수궁 선원전은 현재의 덕수궁 궁내에 있지 않고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는 1800년대 후반 이미 외국 공사관들이 정동 일대에 들어선 까닭에 궁궐의 입지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인 듯 하다. 오늘날 덕수궁 선원전 영역을 둘러보려면 옛 경기여고 부지를 포함한 영국대사관 북쪽과 조선일보사 일대, 지금의 덕수궁 돌담길 북쪽 끄트머리로 찾아가야 한다. 이곳엔 선원전을 포함해 주요 건물 다섯 채, 그리고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1922년 일제가 이른바 '덕수궁 돌담길'을 뚫으면서 돈덕전이 헐리고, 선원전 영역도 모두 헐렸던 것이다. 일제는 덕수궁 선원전과 그 일대를 헐고 식민지 교육기관 등을 차례로 지었다. 우선 1922년 엄비(嚴妃)의 혼전(魂殿)을 헐고 그 자리에 '경성제일여자고등학교'를 짓고, 1923년 길 건너편에는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를 지었다. 뿐만 아니라 1926년 경성방송국 2층 본관과 부속건물 등을 세우기도 했다. 한편 해방이후 1945년 10월 경기여고가 이곳으로 이전되어 자리를 잡았다가, 1988년 2월 현 개포동 부지로 이전한 뒤 공터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선원전터에 대한 발굴조사 조차 한번 없었던 이곳에 美 대사관과 미국 대사관 직원숙소 등이 20층 규모의 고층빌딩으로 곧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현 이화여고 옆 크램린궁전 처럼 웅장한 규모로 들어선 러시아 대사관, 예원학교 옆 하남호텔 터에 9층 규모로 들어설 캐나다 대사관, 그리고 이곳 선원전 터에 20층 규모로 들어설 미국 대사관 등 오늘날 변모하는 덕수궁 정동 일대의 모습은 100년전 '열강들의 각축장' 그대로다.그런 상황에서 선원전터는 이미 '美 합중국(U.S.A)의 소유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선원전터는 볼수가 없었다. 덕수궁에 관한 자료 찾아 보던중 위와 같은 내용의 찾게 된 것이다. 이런 유서깊은 문화 유적터가 외국 열강과 안일한 문화보존으로 이렇게 방치 해두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거. 연못과 매점
모든 덕수궁을 둘러보고 오는 길에 매점과 연못을 볼 수 있었다. 좀 앉아 쉴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이지만 꼬옥 매점이 필요 할지는 의문이 생겼다. 그리고 매점의 공간도 지금 고궁의 모습과는 전혀 맞지 않는 건물 이었다. 연못 역시 사라져버린 시민의식으로 쓰레기가 보이고 지저분했다. 좀 더 관리가 잘 이루어 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3. 결론
덕수궁 안에는 위에 소개한 같이 석조전과 석조전 별관에 많은 유물과 그림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안의 내용을 둘러 보며 우리 조상들의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모습과 그리고 우리 궁전에서 의식에 사용했던 의복들 그리고 옥쇠의 내용등을 볼 수 있어 좋았다. 고등학교 때 앉아서 공부하는 것보다 이런데 한번 와서 보는게 훨씬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수궁은 우리나라 근대의 쇠약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궁이라 하겠다. 열강들의 자기 이권을 앞세운 건물들 우리나라의 고유한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서양식 건물이 바로 그것이다. 국사시간에 교과서를 통해 글과 그림으로 통해 본 우리나라 근대 모습 보다 훨씬 더 안 좋은 맘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맘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 나 스스로 더욱 더 발전하여 부강한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덕수궁은 1904년 일본의 비호아래에 방화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참으로 나라의 힘이 중요한 걸을 한 번 더 느끼게 되었다. 덕수궁을 다 둘러보고 오면서 씁쓸한 마음과 안타까움이 많이 들었다. 개발 논리가 앞선 우리 문화재의 손실과 잘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 그리고 사라져 버린 우리시민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문화재는 우리의 뿌리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는 세계에 알리는 하나의 도구이며, 관광자원이다. 좀더 개인이나 정부에서 신경 썼으면 하는 맘이다. 마지막으로 답사를 가면서 사전에 인터넷을 통해서 답사할 곳의 사전 정보를 알고 가니 꼼꼼하게 볼 수 있어 유익했으며 그리고 문짝하나 건물 하나하나의 우리조상의 지혜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덕수궁은 근대사회를 직접 체험할 수 있어 좋았다. 앞으로 우리 문화유적지를 갈 때는 사전 지식을 충분히 알고 가야겠다.
4. 참고문헌 / 참고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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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8.20
  • 저작시기20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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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61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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