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커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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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커밍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장-한미관계의 경과, 1943-1953

제6장 남한의 체제

제7장 남한 체제에 대한 도전 : 제주와 여수

제8장 유격투쟁

제9장 북한의 체제

제11장 북한의 대중국 관계

제12장 젊잖은 막간 : 미군철수,국경선충돌,게릴라토벌

제13장 "연설":프레스클럽에서 애치슨의 전쟁억제

제14장 전쟁직전의 북한

제16장 전쟁전의 남한

제18장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

본문내용

되지 않은 오후 6시 45분 참모본부의 교신을 청취한 내용은 오전 8시에 있었던 ‘6월 25일의 야간작전계획을 위한 공동회의’를 기록하고 있다. 그 때는 바로 피치와 랜킨이 옹진을 떠났을 때이고 이승만이 조만식과 김삼룡-이주하의 교환을 거부하기로 결정한 몇 시간 뒤이다. 도청기록에는 제 1선 사령관이 6월 25일 오전 6시에 국방부 장관에게 보낸 전통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적이 우리의 전선에 맹렬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1, 2, 3 지점에서 우리는 적의 한 분견대와 전투를 개시했다.’고 되어 있다. 소련의 이 한정적인 도청 기록철은 뒤에 북한측이 주장한 것처럼 남한이 38선 전역에 걸쳐서 총공격을 가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아무런 내용도 없다.
또 하나의 증거는 6월 21일에 제 17연대의 맞은 편에 포진하고 있던 북한의 여단으로부터 드러났다. ‘앞으로 각 정찰대는 적을 격퇴하거나 생포해야 한다’ ‘공격 개시와 함께 적의 퇴로와 집결지를 알아내라’ 어느 문서에든 북한이 은밀하게 침공계획을 세운 증거가 보이지 않으며 북한의 군부대들이 남한으로부터의 공격을 예측하고 있었음을 함축하고 있다. 해주가 남한군에 의해서 점령된 적이 있는가? 월로비의 KLO 본부에 비치되었던 극비의 정보 관계지도에는 제 17연대의 부대들이 6월 26일 오전 7시 현재 해주를 점령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미국은 이 발표가 옹진에서 보낸 한 기자의 잘못된 보도에 근거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북한도 해주를 점령했다는 주장을 ‘거짓에 찬 날조’이며 ‘희극’이라고 비난했다.
전투가 언제, 어느 편에 의해서 발단이 되었는지 불확실함은 전투개시에 관한 무초의 유명한 전문에서도 넌지시 비추고 있다. ‘KMAG의 일선 고문관에 위해서 부분적으로 확인된 한국 육군의 보고를 근거로 하여’ 북한측이 옹진에서 공격을 가했다고 말했다.
개성에서의 폭발
증거로 보아 옹진반도에서 새벽 2시에서 4시 사이에 시작된 전투는 2시간에서 4시간 뒤에는 개성 근처로 확대되었다. 마가렛 하긴스는 남한의 총선거 바로 전날에 개성을 방문했다. 북한의 라디오 방송은 총선거일은 38선 전역에 걸친 대남 공격의 신호가 될 것이라는 도발적인 위협을 했다. 개성은 연변지역 가운데서 6월 25일 아침에도 미국인 장교가 실재하고 있던 유일한 곳이었다. KMAG의 제 12연대 담당 고문관인 조셉 다리고는 막사에서 자고 있다가 오전 5시에 포격소리에 놀라 일어났다고 했다. 그는 시내 한복판에서 일단의 인민군이 쏘아대는 총탄을 피해가며 남쪽을 향해 달렸다. 한 미국인 선교사는 포격소리가 항상 있는 일이어서 다시 잠이 들었는데 2시간 뒤에 깨어보니 인민군 병사들이 노려보고 있었고, 그는 3년을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보냈다.
북한은 1949년 송악산 전투를 전후로 해서 남쪽으로부터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38선 이북지역에 철로를 철거했다. 그들은 6월 25일 직전에 그 철로를 다시 부설했음이 분명하다. 기차로 군대를 약 10km 이동시키는데는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개성에서도 남쪽의 도발에 북한이 대응할 수 없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 철로와 관련된 사실은 북한이 남한에 대해 기습공격을 준비해 왔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첫 번째 증거가 된다. 북한은 1949년에 철로를 철거하고 개성에서 북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에 지뢰들을 부설했다. 그러나 남한은 지뢰을 부설하지도 않았고 병력과 보급물자들을 38선 근처에 집중적으로 전진 배치해 놓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쌍방의 행동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1949년에는 남한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북한은 그렇지 못했으며, 1950년에는 남한처럼 북한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문헌에는 송호찬 제 12연대장이 북한의 개성공격을 방조했을 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있다. 또 다른 미국측 자료는 북한의 초기 공격과 신속한 서울 점령은 ‘사전에 배반된 자들로 조직된 제 5열의 도움’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같은 남한 배부로부터의 협조설은 5월 총선이 일단의 중도파 지도자들로 하여금 이승만과 그의 가까운 동맹자들을 고립시킨 채 북한과 결합하고 싶은 생각을 갖도록 부추겼다는 해석과 부합될 수도 있다.
전투가 동부로 확산되다.
맥페일 KMAG의 정보장교, 아마 월로비의 KLO에 소속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는 북한으로 밀파한 남한출신 첩보원으로부터 풍부한 정보를 입수했다.
의 정보에 의하면, 북한이 38선 연변의 주민들을 소개시키고 38선 바로 북쪽의 제한된 지역에 위장한 탱크와 대포들을 숨겨놓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정보참모는 그의 정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제 6사단은 모든 외출을 취소하고 ‘그 주말에 전병력을 방어위치에 배치했다.’ 이와 같은 ‘준비태세를 갖춤으로써 ’초기의 공격을 격퇴되었다.’ 한국군 제 6사단 제7연대에는 전투가 개시될 때 인민군 제 2사단과 조우했으며 전투지역에 미국인들은 없었다. 동해안에서는 한국군 제 8사단이 훌륭하게 싸웠다. 이 지역에서도 38선 접경지대에는 미국군이 없었다. 한국인들은 삼척에 있던 KMAG의 케슬러 고문관을 깨워 북한이 공격을 가해왔다고 알렸다. 북한의 상륙작전은 오전 5시 무렵에 삼척 근처에서 이루어졌으며 ‘이후’인 역시 25일 어느 시점에 강릉 근처에도 상륙했다. 전쟁이 발발된 뒤 몇 일 동안 동해안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고 강릉도 6월 28일까지는 남한측의 손에 있었다. 애플만에 따르면 오전 5시 30분 무렵 철원 남쪽의 38선 근처에 있던 인민군이 한국군 제7사단 제 1연대를 강습하여 막심한 인명피해를 가했다. 북한군 부대들은 6월 26일 오후와 저녁에 의정부 회랑의 갈라진 틈새를 통하여 쏟아져 왔으며, 그 결과 서울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다방면에 걸친 공격준비가 없이는 인민군 2개 사단이 이 전략적인 회랑으로 진격해 내려올 수는 없다, 옹진과 개성 그리고 춘천에서의 전투와는 달리 이 전투는 북한이 사전에 공격준비를 했음을 드러내는 훌륭한 증거이다. 그러나 그것이 북한이 6월 25일 오전 4시에 전투를 개시했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인민군이 의정부 회랑으로 진격해 내려온 것은 북한이 준비했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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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0.22
  • 저작시기20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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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67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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