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2월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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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러시아의 2월 혁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2월 혁명의 배경
2. 2월 혁명의 전개
3. 2월 혁명과 민병대
4. 2월 혁명의 영향과 의의

Ⅲ. 결 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백하게 붉은 기를 볼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경찰관들은 발포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프랑스 외교관 Louis de Robien의 일기(1917~1918) 일부분으로 이 일기는 1917년 혁명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쓰인다.
식량 배급제가 실시되던 2월 22일,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기다리던 시민들에게 ‘(보급할 식량이)더 이상 없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굶주림과 좌절 속에 지쳐 있던 가정주부들이 빵가게와 그 밖의 식품점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튿날부터 노동자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24일이 되자 파업자의 수는 약 197,000명에 이르렀다. 이 당시 수도의 경찰 수는 약 3,500명에 이르렀고 여기에 수천 명의 헌병들이 보충되어 있었다. 이밖에도 페트로그라드 수비대는 상당한 규모로 예비군을 이미 동원시켜놓고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보면 수도의 군경 병력은 160,000명 수준에 이르렀다. 처음 이들 군경은 시위 군중들에게 동정적이고 호의적이었으나 장교들의 태도는 달랐다. 26일, 즈나멘스키(Znamensky) 광장에서 수비연대의 한 중대가 발포함으로써 40여명을 죽이고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자 병사들은 장교들에게 반감을 품고 파블로프스키(Pavlovsky) 연대의 제4중대부터 발포거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들 병사는 상당수가 1880년대에 태어난 농민 출신이었다.
27일, 노동자들의 시위는 병사들의 반란으로 바뀌며 짜리즘 정부는 수도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무부 대신 프로토포포프(Protopopov)는 두마위원회의 해산과 반정부적 의원들의 체포 및 대규모 발포를 주장하고 나섰고, 총리 골리친(Golitsyn)은 두마위원회 안의 자유주의적 입헌주의적 의원들과 손을 잡아 점진적 개혁을 이루어 짜리즘을 보존하려는 입장을 취해 정부의 지도자들은 강경과 온건의 두 파로 나뉘었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은 강경론을 채택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27일자 칙령으로 두마의 해산을 명했다. 한편, 의장 로드지앙코(Rodzyanko)는 시위 사태가 혁명으로 발전해나가는 것을 피하고자 니콜라이 2세에게 ‘신임 정부’를 구성하라는 전보를 계속 보냈다. 그러나 두마위원회는 칙령을 거부하고 의사당 안으로 밀려들어온 2만여 명의 시위 군중들에게 정부 대신들의 체포와 정부 청사 등의 점거를 명령했으며, 로드지앙코에게는 집권을 권했다. 이에 그는 정권 인수를 결심하고 시위 군중 앞에서 두마위원회가 중심이 된 ‘책임 있는 정부’ 구성을 약속했다. 곧바로 극우파를 제외한 두마위원회 내의 모든 정당과 정파의 지도자들 12명이 질서 회복과 군대들의 통수를 위한 임시 집행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왕당파였다.
한편, 같은 날 시위를 주도해온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멘셰비키(Mensheviki)인 츠헤이드제(Chkhkeidze)를 의장으로 하는 ‘노동자와 병사 대표자들의 소비에트 영어의 카운슬(council)에 해당하는 이 러시아어는 우리말로 ‘협의회’란 뜻이다.
임시 집행위원회’를 결성했다. 혁명에 가담한 군대 1중대에서 1명씩, 노동자 쪽에서는 1,000명에 1명씩 각각 대표를 뽑아 이 기구에 보냈다. 이 소비에트 임시집행위원회의 결성은 두마위원회의 임시 집행위원회 결성보다 몇 시간 빨랐는데 처음에 이들은 스스로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이나 혁명에 대한 청사진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볼셰비키(Bolsheviki)는 전제 체제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에 의해 완전히 타도될 때까지 사회주의자들은 권력 장악을 회피해야 한다는 멘셰비키와 협력하는 자세를 취했고, 두마위원회는 짜르가 ‘민중의 신임을 받는 내각’ 구성에 동의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28일, 니콜라이 2세는 사태를 어느 정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무력으로 민중봉기를 진압할 수 있다고 믿고 4개 기병 연대와 4개 보병 연대를 추가로 파견하였으나 프스코프에 도착한 그에게 루즈스키(Ruzsky) 장군은 차르스코에 셀로(Tsarskoe Selo)의 모든 군대가 혁명군에 가담하고 짜르의 근위군과 황실 수비대도 모두 넘어갔다는 사실을 보고하며, 두마위원회에게 내각 구성권을 준다는 결정을 내리도록 권유했다. 마침내 그는 두마위원회의 제안에 동의하는 전보를 로드지앙코에게 보내라고 명령하지만 이미 전보가 도착한 그날 아침 두마위원회와 소비에트의 임시집행위원회는 임시정부를 세우기로 합의하고 각료의 인선까지 끝낸 상태였다. 외무부 장관에 카데츠의 밀류코프가, 법무부 장관에 케렌스키가, 전쟁부 장관에 10월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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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0.28
  • 저작시기2006.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69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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