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본의 한국의 역사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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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과 일본의 한국의 역사왜곡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중국의 역사 왜곡
󰊱 동북공정의 내용
󰊲 동북공정의 문제점
󰊳 동북공정에 따른 간도 문제


(2) 일본의 역사 왜곡
󰊱 임나일본부설
󰊲 독도 문제
󰊳 기타 역사 왜곡


Ⅲ. 결론

본문내용

키고는 그것이 국내전쟁이라는 궤변을 하고 있다. 당나라는 전쟁직전에 고구려에0 보낸 국서에서 ‘두 나라의 평화’라고 하여 고구려를 상대국으로 분명히 인정하고 있었다. 중국은 당이 고구려전쟁에서 패배한 사실을 숨긴 것이다.
넷째로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이 대부분 중국인으로 동화 되었다”는 주장은 그 인원파악에서 근본적으로 오류가 있다. 중국문헌에는 고구려 멸망시의 인구를 70만호라 하였다. 당시 1호당 인구가 5명(전후)으로 파악하면 인구수가 350만이 되니까 이 수치는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 그 대신 《삼국유사》의 기록인 21만호에서 3분지 1인(한족)을 제한 15만호(70~80마인)으로 파악하였으며, 이 중에서 50~60만이 감소되었으므로 본토에 살던 고구려인은 거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70년 전쟁(수당전쟁:598~668)기간에 고구려는 많은 인구의 감소를 가져 중국측 기록에도 유녀, 유인이라는 남편을 잃은 여인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 멸망당시의 고구려 인구는 호당3인으로 210마인이라고 생각된다. 이 중에서 강제이주 42만, 피살 10만, 포로 8만5천, 고구려발해로의 귀화 각각 10만등 80여만명이 감소 되었으므로 130~140만명이 된다. 그러므로 이들은 고구려 옛땅에 남아 때로는 신라와 함깨, 또는 자기들 스스로 대당항쟁을 주도한 것이다. 《삼국사기》에 고구려 멸망후 당에 항복하지 않는 성이 목저성과 남소성등 11개가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 멸망 후 계속된 대당항쟁은 곧 고토에 남아있던 유민들의 활동의 결과였으며,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북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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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1.07
  • 저작시기2006.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7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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