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고대사 교육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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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양 고대사 교육특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그리스 노예는 가정교사가 많다.)
- 노예에 대한 가혹한 착취는 후에 노예반란으로 확대 (시칠리아 노예 전쟁, 스파르타쿠스 노예 봉기) => 이들의 반란은 개인적 자유를 위한 것이지 노예제도에 대한 거부는 아니다.
∴ 고대사회는 노예제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다.
G. 그라쿠스는 로마 무산자를 위한 곡물정책을 펴는데 이는 로마의 식민시인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시칠리아에서 징수한 곡물을 저렴한 가격으로 농민에게 분배하는 것이다.
(→ 자영농 육성에 의한 병권 강화, 사회 불안 요소의 해결은 아니다.)
- 후에 그라쿠스 형제가 모두 암살되었고 내전 발생
- 대토지 사유로 나타난 사병규모가 늘어나게 되고 군인정치가가 등장, 정권 획득을 위해 다투게 됨
- 노예들의 반란, 동맹시 전쟁(로마 시민권에 대한 요구)
- BC. 60년경 삼인위원회(삼두정치) 등장(케사르, 폼페이우스, 그라쿠스)
- BC. 43년 제 2차 삼인 위원회 등장(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투스)
=>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누르고 로마에 들어와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게 됨 → 옥타비아누스는 스스로를 Princeps라 하여 원수정(원수와 원로원의 이원지배체제)구축→ 후에 아우구스투스가 모든 전권을 가지면서 이시기부터 제정으로 인식
- 아우구스투스의 정치(행정, 군사, 속주 개혁 단행)
→ 원로원 통제 권한을 가짐(그의 지위 내에서 해임가능)
→ 14개 구역으로 나누어 265도시로 나누어 구조를 세분화
→ 9개 보병부대로 구성된 친위대 구성(실질적 권한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
→ 속주에 세금 징수, 중앙 정부 전매수익, 광산개발
=> 관료와 상비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재원 마련
※ 과거의 팽창정책에서 안으로의 통치에 주력하는 것으로 방향전환
- 문화적 전성기 이룩(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리비우스)
∴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황제(AD. 181)를 ‘로마의 평화(Pax Romana)’ 라 부른다.
→ 갈리쿨라, 네로같은 폭군이 등장하지만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5현제등 훌륭한 군주가 나타남
→ 대외정책의 변화로 속주지역의 인구가 늘고 경작지가 확대되며 속주지역에서 신생도 시가 많이 나타남. 지중해 교역등, 많은 요역이 이루어지게 됨(인도 향신료, 중국 비단 거래) ※ 당시 중국은 후한대, 인도는 쿠샨왕조로 대승불교 전달
→ 소작농은 지주들이 대농장을 경영하고 번성하면서 착취가 심하고 황실제정 확보를 위한 세금 부담이 늘어나자 생활조건이 악화됨
로마의 평화의 본질은?
- 격심한 빈부격차, 소작농의 몰락, 중소 농민층 몰락→ 로마시로 빈민이 집중
- 노예반란의 빈발(노예제의 위기)
∴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러한 문제를 감추는 것을 평화로 인식
=> 속주에서의 부를 로마 빈민 구제에 활용(근본적 해결이 아닌 임시적 해결)
=> 원형 경기장, 개선문등 대형 건축물등장(평화를 상징, 대형 건축에 의한 고용촉진)
=> 로마의 평화를 상징하는 원형 경기장에서 이루어진 검투사 경기, 맹수와의 싸움등을 보면서 로마 시민의 불만을 해소시키는 ‘panis et circus\'의 형태가 나타나고 로마의 문제는 잠재되어 있지만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허황된 평화였다.
- 5현제의 정책 - 네르바 : 식량배급정책(일시적 빈민구제)
- 트라이아누스 : 극빈자 구제정책 계승, 오리엔트 지역 정복(비옥한 지대)
- 하드리아누스 : 관료제 정비, 확대, 제국통치를 위해 순방제도 마련
- 안토니오피우스 : 중앙집권적 통치정책 강화, 계승(→ 제국평화가 절정)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철인황제, 희랍철학에 정통, 개인의 행복은 마음 의 통제로 얻을 수 있다는 스토아 철학
=> 로마가 안고 있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했기 보다는 단순히 황제권을 강화시키는 수준에서 개혁
=> 5현제 이후 로마 사회 구조가 가진 문제가 드러나게 되고 로마 사회 해체로 이어짐
로마제국의 해체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후 군인들에 의한 황제권 장악
→ 군인을 끌어들여 주도권 장악(군인황제시대(50여년간 20명의 황제 교체)
→ 내적 혼란으로 외세의 침입 빈발
- 게르만족의 침투(데키우스 황제가 포로로 잡혀 죽음)
- 동쪽 속주 지역에서 페르시아 침략(발레리아누스 황제 페르시아 포로가 됨)
- 소아시아지역을 고트족에게 빼앗김
- 이탈리아 반도에 이민족 침입
→ 경제적 위기 도래
- 은화에 ‘은’이 크게 감소(명목가치> 실질가치) => 화폐체제 붕괴
- 세금의 증대 : 속주민이 세금 납부 어려움, 지중해 지역 인구 감소
- 로마의 중흥 노력 :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황제
→ 토지에 농민을 속박(토지로부터 농민의 이탈을 막고자) => 농민의 지위, 신분 고정화됨에 따라 중세 농노와 유사
→ 수공업, 상업에 조합을 결성, 조합가입을 의무화, 조합원 세습
=>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지위와 신분을 고정시킴
- 5C 귀족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농촌에 Villa 결성(자급 공동체)
→ 도시생활이 어려워지자 촌락중심의 지배체제 확립
→ 노예 노동력 수급 곤란 : 정복전쟁이 종식되면서 대농장 경영에 차질
=> Colonatus제 도입 : 자유민에게 농장토지 임대(임대 받은 농민을 Colonus라 함)
=> Colonus의 신분, 지위가 세습 => 중세 농노의 전신
※ 로마의 도시화에서 농촌화로의 변모 → 중세 자연경제로의 전환이 진행
=> 중세유럽의 체제, 제도 : 로마적 유산+ 게르만적 요소
- 가치혼란 속에서 사람들의 집단 심성을 이끌어낼 새로운 요소가 등장-> 기독교 번영
-> 현실의 불안을 대신할 내세를 제시하고 지역성, 계급성을 초월한 보편성 지향
-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제국이 혼란해지자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한 수단으로
1) 힘이나 무력, 2) 기독교에 기대기 시작함(중세 초기에는 유력한 세력에 대하여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의지하였다.)
=> 로마제국의 초기에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가졌으나 이 충성심이 국가의 붕괴로 흔들리게 되면서 갈피를 잃어 또 다른 충성심의 대상을 찾고 있었는데 그것이 기독교에 반영되었다.
※ 이러한 기독교의 발달은 중세적 요소의 하나로 나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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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1.28
  • 저작시기2002.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76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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