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교산 허균 연구
-시대의 반항아 허균
Ⅰ. 서론
㉠글을 쓰면서
㉡허균의 연구 동향
㉢허균의 평가
Ⅱ. 허균의 개인, 사상적 배경
㉠시대배경
㉡생애
㉢허균의 가계도
㉣허균의 교우관계
㉤사상적 배경
㉥허균의 문학관
Ⅲ. 작품 분석
㉠시문집, 시화집, 시선집
㉡ 전(傳)의 소설화 경향
㉢홍길동전
Ⅲ. 결론
-시대의 반항아 허균
Ⅰ. 서론
㉠글을 쓰면서
㉡허균의 연구 동향
㉢허균의 평가
Ⅱ. 허균의 개인, 사상적 배경
㉠시대배경
㉡생애
㉢허균의 가계도
㉣허균의 교우관계
㉤사상적 배경
㉥허균의 문학관
Ⅲ. 작품 분석
㉠시문집, 시화집, 시선집
㉡ 전(傳)의 소설화 경향
㉢홍길동전
Ⅲ. 결론
본문내용
하는 동안 잦은 파직을 당하면서도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서장관으로 활약하였다. 파직 이유는 그의 돌출적이고 경박한 행동에서 비롯되었는데, 특히 외직에 나가서는 거의 1년을 지탱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그는 귀양살이를 계속하게 된다. 그러나 유배는 그에게 자신의 생애를 돌이켜보는 계기가 되었고, 이 시기에 그는 문학활동을 집중적으로 하거나 자신의 글을 정리하였다. 그는 『성수시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이라 해도 귀양살이를 하면서 어렵고 험난한 체험을 하게 되면 비로소 삶의 진실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는 기묘한 문학을 할 수 있다.
고난의 체험을 통한 문학...그것이 바로 허균의 문학이 아니었나싶다. 한편 종사관으로 활약했다는 것은 그만큼 글재주가 뛰어났음을 의미하는데, 특히 그의 시적 감식안은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다. 숱한 탄핵과 파직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하여 벼슬살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박학다식에 문학적 재능이 출중했고 그것을 당대 사회에서 두루 인정받았던 데 말미암는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자서제질사돈방’ 사건은 그에게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세력이 없던 자기만 유배당했기 때문이다. 그 뒤 허균은 체세를 완전히 바꾸어 당시 대북파의 영수로 권력을 휘두르던 이이첨에게 아부하며 가까이 지내게 된다. 게다가 2년 뒤 서자 출신의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등의 칠서지옥(七庶之獄·)이 일어나자 신변의 위험을 느껴 더욱 이이첨과 가까이 지냈다. 이 옥사는 박응서 등이 주동이 되어 혁명을 일으키려다가 사전에 발각된 것인데, 그들과 평소에 어울리던 허균은 여기서 용케 빠져나올 수 있었다.
허균이 44세 되던 해, 당쟁의 회오리에 휩쓸리던 허균에게 그나마 믿음을 주고 의지가 되었던 큰 형 허성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이제야말로 혼자 남게 되었다. 이이첨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는 이이첨이 주선한 벼슬 호조참의의 신분으로 천추사로 중국을 다녀왔고(46세), 다시 이듬해에는 동지겸진주사인 민형남의 부사가 되어 중국에 갔다. 중국을 왕래하면서 그는 명나라의 학자들과 사귀는 동시에 『태평광기』뿐만 아니라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 등을 얻어 국내에 가져왔다. 두 번에 걸친 사신 일로 인해 그는 48세에 형조판서가 되어 광해군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 무렵 윤선도가 이이첨의 권력 남용을 탄핵하는 상소(1616)를 올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광해군은 이 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이첨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영창대군의 모친인 인목대비 폐모론을 들고 나왔다. 이때 49세로 좌참찬의 직위에 있던 허균은 이이첨의 조종에 따라 폐모론을 강력히 주장하게 되었고 그 흉계를 꾸미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 때문에 허균은 유생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차에 당시 폐모론을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이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에 원한을 품은 그의 아들 기준격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그런데 이이첨은 허균이 광해군의 총애를 받는데다가 허균의 딸이 왕의 후궁으로 가게되는 것을 보고,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허균이 50세가 되던 해 8월, 남대문에 괴서가 붙여진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이 일은 허균의 심복인 서얼 출신 현응민이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이이첨은 허균의 심복인 서얼 출신 현응민이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이이첨은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심문 시킨 끝에 역적모의의 죄목을 뒤집어씌워, 허균을 그의 동료들과 함께 서쪽 저자거리에서 책형(능지처참형)으로 죽이고 말았다. 그는 당쟁의 와중에 휩쓸려 권력투쟁의 전면에 나섰다가 50세의 나이로 불운하게 죽고만 것이다.
생애를 통해 시인으로서, 문장가로서의 그의 탁월한 능력, 그리고 당시로서는 이질적인 사상에 그가 깊이 빠져 있었던 점에 주목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허균은 그 당시에 지배층들에게 결코 달가운 인물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가 저술한 많은 자료가 인멸되었고, 그의 생전 혹은 사후, 그의 행정과 사유를 두고 행해진 숱한 비난과 왜곡이 그의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게 방해한다. 어쨌든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잦은 파직과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는 점, 이달을 비롯한 사회에서 소외받는 자와 어울렸다는 점, 다양한 사상을 취했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러한 면에서 그의 생애는 끝까지 평탄치 않게 흘러간 것을 알 수 있다.
신금이 명목을 해치고 산수가 또 비었으니 액이 많고 가난하고 병이 잦고 꾀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겠다. 그러나 자수가 중간에 있기 때문에 수명이 짧지 않았으며, 강물이 맑고 깨끗하여 재주가 대단하겠고, 묘금이 또 울리므로 이름이 천하후세에 전할 것이다.
-어느 성명가가 허균의 미래를 예언하는 글에서-
㉢허균의 가계도
허균은 양천 허씨로 허공의 후손이다. 허공은 고려 충렬왕 때에 첨의중찬이란 벼슬에까지 오른 이름이 높은 문신이었다. 허공은 충직하고 청렴한 정치가로 1274년에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전함 삼백 채를 고려에 요구하자 그 맡은 일을 거뜬히 해냈고, 1275년엔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왔고, 1279년에 다시 원나라의 명령에 따라 전함 구십 채를 만드는 일을 해내었다. 그는 글을 모아 『고금록』을 펴내기도 했다. 그때에 그는 원나라와의 외교방면에서 으뜸가는 인물이었다. 또 우의정을 지내고 철저한 배불론자인 허종은 허균의 증조할아버지였고, 좌의정을 지내고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고 앞장선 허침은 허균의 증조할아버지의 동생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허한으로 벼슬이 군자감봉사에 머물렀으나, 글씨와 그림이 뛰어났고 그 시대에 이름있던 선비였다. 여기까지가 허균의 할아버지까지 어떠한 사람들이 있었는지 확인한 것으로, 다음으로는 허균과 직접 관련되기 쉬운 가족 구성원들을 살펴보겠다.
허균의 아버지는 허엽이다. 허엽의 호는 초당이었는데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는 조광조의 신원을 청하고 허자, 구수담들의 무죄를 논핵하다가 벼슬에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이라 해도 귀양살이를 하면서 어렵고 험난한 체험을 하게 되면 비로소 삶의 진실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는 기묘한 문학을 할 수 있다.
고난의 체험을 통한 문학...그것이 바로 허균의 문학이 아니었나싶다. 한편 종사관으로 활약했다는 것은 그만큼 글재주가 뛰어났음을 의미하는데, 특히 그의 시적 감식안은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다. 숱한 탄핵과 파직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하여 벼슬살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박학다식에 문학적 재능이 출중했고 그것을 당대 사회에서 두루 인정받았던 데 말미암는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자서제질사돈방’ 사건은 그에게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세력이 없던 자기만 유배당했기 때문이다. 그 뒤 허균은 체세를 완전히 바꾸어 당시 대북파의 영수로 권력을 휘두르던 이이첨에게 아부하며 가까이 지내게 된다. 게다가 2년 뒤 서자 출신의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등의 칠서지옥(七庶之獄·)이 일어나자 신변의 위험을 느껴 더욱 이이첨과 가까이 지냈다. 이 옥사는 박응서 등이 주동이 되어 혁명을 일으키려다가 사전에 발각된 것인데, 그들과 평소에 어울리던 허균은 여기서 용케 빠져나올 수 있었다.
허균이 44세 되던 해, 당쟁의 회오리에 휩쓸리던 허균에게 그나마 믿음을 주고 의지가 되었던 큰 형 허성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이제야말로 혼자 남게 되었다. 이이첨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는 이이첨이 주선한 벼슬 호조참의의 신분으로 천추사로 중국을 다녀왔고(46세), 다시 이듬해에는 동지겸진주사인 민형남의 부사가 되어 중국에 갔다. 중국을 왕래하면서 그는 명나라의 학자들과 사귀는 동시에 『태평광기』뿐만 아니라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 등을 얻어 국내에 가져왔다. 두 번에 걸친 사신 일로 인해 그는 48세에 형조판서가 되어 광해군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 무렵 윤선도가 이이첨의 권력 남용을 탄핵하는 상소(1616)를 올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광해군은 이 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이첨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영창대군의 모친인 인목대비 폐모론을 들고 나왔다. 이때 49세로 좌참찬의 직위에 있던 허균은 이이첨의 조종에 따라 폐모론을 강력히 주장하게 되었고 그 흉계를 꾸미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 때문에 허균은 유생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차에 당시 폐모론을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이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에 원한을 품은 그의 아들 기준격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그런데 이이첨은 허균이 광해군의 총애를 받는데다가 허균의 딸이 왕의 후궁으로 가게되는 것을 보고,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허균이 50세가 되던 해 8월, 남대문에 괴서가 붙여진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이 일은 허균의 심복인 서얼 출신 현응민이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이이첨은 허균의 심복인 서얼 출신 현응민이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이이첨은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심문 시킨 끝에 역적모의의 죄목을 뒤집어씌워, 허균을 그의 동료들과 함께 서쪽 저자거리에서 책형(능지처참형)으로 죽이고 말았다. 그는 당쟁의 와중에 휩쓸려 권력투쟁의 전면에 나섰다가 50세의 나이로 불운하게 죽고만 것이다.
생애를 통해 시인으로서, 문장가로서의 그의 탁월한 능력, 그리고 당시로서는 이질적인 사상에 그가 깊이 빠져 있었던 점에 주목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허균은 그 당시에 지배층들에게 결코 달가운 인물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가 저술한 많은 자료가 인멸되었고, 그의 생전 혹은 사후, 그의 행정과 사유를 두고 행해진 숱한 비난과 왜곡이 그의 실체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게 방해한다. 어쨌든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잦은 파직과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는 점, 이달을 비롯한 사회에서 소외받는 자와 어울렸다는 점, 다양한 사상을 취했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러한 면에서 그의 생애는 끝까지 평탄치 않게 흘러간 것을 알 수 있다.
신금이 명목을 해치고 산수가 또 비었으니 액이 많고 가난하고 병이 잦고 꾀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겠다. 그러나 자수가 중간에 있기 때문에 수명이 짧지 않았으며, 강물이 맑고 깨끗하여 재주가 대단하겠고, 묘금이 또 울리므로 이름이 천하후세에 전할 것이다.
-어느 성명가가 허균의 미래를 예언하는 글에서-
㉢허균의 가계도
허균은 양천 허씨로 허공의 후손이다. 허공은 고려 충렬왕 때에 첨의중찬이란 벼슬에까지 오른 이름이 높은 문신이었다. 허공은 충직하고 청렴한 정치가로 1274년에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전함 삼백 채를 고려에 요구하자 그 맡은 일을 거뜬히 해냈고, 1275년엔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왔고, 1279년에 다시 원나라의 명령에 따라 전함 구십 채를 만드는 일을 해내었다. 그는 글을 모아 『고금록』을 펴내기도 했다. 그때에 그는 원나라와의 외교방면에서 으뜸가는 인물이었다. 또 우의정을 지내고 철저한 배불론자인 허종은 허균의 증조할아버지였고, 좌의정을 지내고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고 앞장선 허침은 허균의 증조할아버지의 동생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허한으로 벼슬이 군자감봉사에 머물렀으나, 글씨와 그림이 뛰어났고 그 시대에 이름있던 선비였다. 여기까지가 허균의 할아버지까지 어떠한 사람들이 있었는지 확인한 것으로, 다음으로는 허균과 직접 관련되기 쉬운 가족 구성원들을 살펴보겠다.
허균의 아버지는 허엽이다. 허엽의 호는 초당이었는데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는 조광조의 신원을 청하고 허자, 구수담들의 무죄를 논핵하다가 벼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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