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홍대용의 생애
3. 저서 <의산문답>을 통해 본 홍대용
가. 지구구체설과 지전설
나. 무한 우주론
다. 중화사상 타파
라. 만민평등
4. 홍대용의 사상
가. 사회사상가
나. 과학사상가
5. 홍대용과 실학
가. 진보적 지식인 홍대용
나. 실학의 형성과 홍대용
6. 맺음말
2. 홍대용의 생애
3. 저서 <의산문답>을 통해 본 홍대용
가. 지구구체설과 지전설
나. 무한 우주론
다. 중화사상 타파
라. 만민평등
4. 홍대용의 사상
가. 사회사상가
나. 과학사상가
5. 홍대용과 실학
가. 진보적 지식인 홍대용
나. 실학의 형성과 홍대용
6. 맺음말
본문내용
스의 태양중심설과도 근본적으로 차이점이 있다. 그의 바탕은 인문학이었다. 결국 홍대용의 이런 과학적 이론들은 과학 그 자체로의 의미보다 그의 사상에 끼친 영향으로의 가치로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한편 그는 〈주해수용 籌解需用〉을 저술하여 일반 산술에서 대수학·기하학에 이르는 수학 전반을 정리했다. 또 자신의 집에 농수각(籠水閣)이라는 별실을 지어 혼천의(渾天儀)와 서양에서 만든 자명종(自鳴鐘)을 두고 연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담헌서 湛軒書〉가 있다. 홍대용이라는 인물을 알면 알수록 안타까운 점은 대외적인 그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책을 저술함으로써 과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중요성을 강조한 것인지 모르나 그의 저서는 결국 홍대용 자신의 자연과학에 대한 놀라운 이해도를 보여주는데 그친다.
한편 그는 주체적인 수용이라는 것을 가장 실천적으로 행한 사람이다. 그의 견해는 비판성 주체성을 잃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홍대용이 음양오행설을 비판한 것은 아주 고무적이다. 음양오행설을 깊이 있게 탐구한 서경덕 이항복에 이어 홍대용의 실학 사상을 받아들인 정약용 또한 음양오행이론을 연구했다는 점과는 대비되는 홍대용의 이런 비판은 고루한 조선시대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꿈꾸었다라는 호평을 끌어낼만하다. 실학이 성리학에 비해 그러나 홍대용은 과학적 사고, 즉 과학정신에 위배되는 것을 모조리 비판했다는 점에서 그들과 다른 높은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그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조선의 열악한 자연과학바탕과는 무관한 그런 희대의 천재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가 고루한 조선의 기존 비과학적 사고를 탈피했다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의산문답에서 그는 실옹의 입을 빌려 자신의 과학적 견해를 허자에게 설파하는데 기존의 그 사고의 틀을 깼다라고 보기 힘들다. 점성술이나 사주풀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런 논지를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자석은 쇠를 당기고 호박은 지푸라기를 끌어당기니, 같은 종류가 서로 감응함은 사물의 이치이다. 이때문에 불꽃이 위로 올라가는 것은 해(日)에 근본한 때문이고, 바닷물이 위로 솟구치는 것은 달(月)에 근본한 때문이며, 만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땅(地)에 근본한 때문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당신은 수의 기질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러하기에 이러이러하다 라고 일러주는 소위 말하는 비과학적인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홍대용의 사상 속에는 근대 서양 과학과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 또 근대적 합리주의와 도교의 신비 사상, 그리고 지구 중심적 세계관과 우주 무한론 등이 때로는 서로 어울리지 못한 채 섞여 있는 혼란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조의 가장 뛰어난 과학 사상가였다.
5. 홍대용과 실학
가. 진보적 지식인 홍대용
홍대용은 당시로써 가장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지구구체설, 지전설, 중화사상타파, 만민평등 등의 획기적인 생각을 피력하면서 조선을 진일보 시킬 수 있는 이념을 이 땅에 남긴 지식인이다. 그렇다고 그가 조선의 역사를 한걸음 옮겨놓은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조선조의 패러다임의 자극할 수 있는 주장을 편 사람이다. 역사의 변화는 한사람의 아이디어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물꼬를 트는 사람이 있고 그 물꼬를 더 세게 열어젓히는 사람이 있고,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그 첫 번째 행동을 한 사람이 바로 홍대용이라는 선각자이다.
그런데 홍대용의 여러 획기적인 주장들이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해외에서 받아들인것이라는 점을 들어 그 가치를 폄하하려한다. 하지만, 그 시대에 어떤 이론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나서 그 결과를 우리식의 사고로 체계화하고 합리화 시킴으로써 우리 사회가 그러한 선진화된 주장을 인정할 수 있게 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열린 사고로 충격적인 서양과학을 흡수하지 못했다면 그러한 서양과학문명이 우리사회에서 인정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중국의 여러 서적을 봄으로써 서양과학의 논리를 이해하려했다. 그 결과 지구구체설에서 일식과 월식 등을 근거로 들 수 있게되었다. 그렇지만, 서양과 다른 사고의 틀에서 그들의 주장을 완벽하게 이해하는데 무리가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설명의 한계를 홍대용은 이미 사회가 인정하는 유교적 논리로 설명함으로써 세상을 보는 우리 조선사람의 인식을 더욱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 주체적 비판적 사고의 틀에서 서양 과학을 이해하는 그의 사상은 실로 높이 평가받을만 하다. 그런 점에서 홍대용은 현실에 발붙인 지식인으로써의 역할을 최선을 다한 선각자이다.
홍대용은 참된 근대로 향하는 길목에선 인물이었다. (실학자라 불리는) 당시의 여러 지식인들과 홍대용이 크게 구별되는 점이 있다. 바로 홍대용의 만민평등 사상이다. 홍대용의 만민평등 사상은 기본적으로 인물성 동이논쟁에서 비롯된다. 조선 후기 우리 사회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치열한 논리전쟁인 이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인물성동론을 택하고, 또다른 많은 사람은 인물성이론을 택했다. 이 중에 실학자들도 둘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북학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인물성동론을 주장하면서 오랑캐와 중화는 별 차이가 없으므로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도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홍대용만이 이 인물성동론에서 만민평등을 이끌어낸다. 많은 학자들이 인성과 물성의 차이가 없음을 인정했지만, 자기네 집의 노비와 자신을 같게 보기는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홍대용은 과감하게 인물성동론에서 우리모두가 동일함을 지적한다.
우리는 근대의 시작을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에서 찾는다. 전자는 어떤 물적인 측면의 풍요를 가져옴으로써 우리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고 후자는 인간존엄을 이룩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물적인 측면의 풍요를 지적했다. 박지원, 박제가 등도 그런 점에서 한정된 의의를 가진다. 그렇지만, 홍대용은 그들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존엄의 시대를 주장했다. 과학 지식의 도입과 서양문물을 가져와서 사회를 변화시켜서 물적 풍요를 얻고자 하는 동시에 만민평등의 주장을 통해 우리 사회가 가져야할 가치기준을 인간평등에
한편 그는 〈주해수용 籌解需用〉을 저술하여 일반 산술에서 대수학·기하학에 이르는 수학 전반을 정리했다. 또 자신의 집에 농수각(籠水閣)이라는 별실을 지어 혼천의(渾天儀)와 서양에서 만든 자명종(自鳴鐘)을 두고 연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담헌서 湛軒書〉가 있다. 홍대용이라는 인물을 알면 알수록 안타까운 점은 대외적인 그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책을 저술함으로써 과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중요성을 강조한 것인지 모르나 그의 저서는 결국 홍대용 자신의 자연과학에 대한 놀라운 이해도를 보여주는데 그친다.
한편 그는 주체적인 수용이라는 것을 가장 실천적으로 행한 사람이다. 그의 견해는 비판성 주체성을 잃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홍대용이 음양오행설을 비판한 것은 아주 고무적이다. 음양오행설을 깊이 있게 탐구한 서경덕 이항복에 이어 홍대용의 실학 사상을 받아들인 정약용 또한 음양오행이론을 연구했다는 점과는 대비되는 홍대용의 이런 비판은 고루한 조선시대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꿈꾸었다라는 호평을 끌어낼만하다. 실학이 성리학에 비해 그러나 홍대용은 과학적 사고, 즉 과학정신에 위배되는 것을 모조리 비판했다는 점에서 그들과 다른 높은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그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조선의 열악한 자연과학바탕과는 무관한 그런 희대의 천재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가 고루한 조선의 기존 비과학적 사고를 탈피했다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의산문답에서 그는 실옹의 입을 빌려 자신의 과학적 견해를 허자에게 설파하는데 기존의 그 사고의 틀을 깼다라고 보기 힘들다. 점성술이나 사주풀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런 논지를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자석은 쇠를 당기고 호박은 지푸라기를 끌어당기니, 같은 종류가 서로 감응함은 사물의 이치이다. 이때문에 불꽃이 위로 올라가는 것은 해(日)에 근본한 때문이고, 바닷물이 위로 솟구치는 것은 달(月)에 근본한 때문이며, 만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땅(地)에 근본한 때문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당신은 수의 기질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러하기에 이러이러하다 라고 일러주는 소위 말하는 비과학적인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홍대용의 사상 속에는 근대 서양 과학과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 또 근대적 합리주의와 도교의 신비 사상, 그리고 지구 중심적 세계관과 우주 무한론 등이 때로는 서로 어울리지 못한 채 섞여 있는 혼란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조의 가장 뛰어난 과학 사상가였다.
5. 홍대용과 실학
가. 진보적 지식인 홍대용
홍대용은 당시로써 가장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지구구체설, 지전설, 중화사상타파, 만민평등 등의 획기적인 생각을 피력하면서 조선을 진일보 시킬 수 있는 이념을 이 땅에 남긴 지식인이다. 그렇다고 그가 조선의 역사를 한걸음 옮겨놓은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조선조의 패러다임의 자극할 수 있는 주장을 편 사람이다. 역사의 변화는 한사람의 아이디어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물꼬를 트는 사람이 있고 그 물꼬를 더 세게 열어젓히는 사람이 있고,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그 첫 번째 행동을 한 사람이 바로 홍대용이라는 선각자이다.
그런데 홍대용의 여러 획기적인 주장들이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해외에서 받아들인것이라는 점을 들어 그 가치를 폄하하려한다. 하지만, 그 시대에 어떤 이론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나서 그 결과를 우리식의 사고로 체계화하고 합리화 시킴으로써 우리 사회가 그러한 선진화된 주장을 인정할 수 있게 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열린 사고로 충격적인 서양과학을 흡수하지 못했다면 그러한 서양과학문명이 우리사회에서 인정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중국의 여러 서적을 봄으로써 서양과학의 논리를 이해하려했다. 그 결과 지구구체설에서 일식과 월식 등을 근거로 들 수 있게되었다. 그렇지만, 서양과 다른 사고의 틀에서 그들의 주장을 완벽하게 이해하는데 무리가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설명의 한계를 홍대용은 이미 사회가 인정하는 유교적 논리로 설명함으로써 세상을 보는 우리 조선사람의 인식을 더욱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 주체적 비판적 사고의 틀에서 서양 과학을 이해하는 그의 사상은 실로 높이 평가받을만 하다. 그런 점에서 홍대용은 현실에 발붙인 지식인으로써의 역할을 최선을 다한 선각자이다.
홍대용은 참된 근대로 향하는 길목에선 인물이었다. (실학자라 불리는) 당시의 여러 지식인들과 홍대용이 크게 구별되는 점이 있다. 바로 홍대용의 만민평등 사상이다. 홍대용의 만민평등 사상은 기본적으로 인물성 동이논쟁에서 비롯된다. 조선 후기 우리 사회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치열한 논리전쟁인 이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인물성동론을 택하고, 또다른 많은 사람은 인물성이론을 택했다. 이 중에 실학자들도 둘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북학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인물성동론을 주장하면서 오랑캐와 중화는 별 차이가 없으므로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도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홍대용만이 이 인물성동론에서 만민평등을 이끌어낸다. 많은 학자들이 인성과 물성의 차이가 없음을 인정했지만, 자기네 집의 노비와 자신을 같게 보기는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홍대용은 과감하게 인물성동론에서 우리모두가 동일함을 지적한다.
우리는 근대의 시작을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에서 찾는다. 전자는 어떤 물적인 측면의 풍요를 가져옴으로써 우리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고 후자는 인간존엄을 이룩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물적인 측면의 풍요를 지적했다. 박지원, 박제가 등도 그런 점에서 한정된 의의를 가진다. 그렇지만, 홍대용은 그들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존엄의 시대를 주장했다. 과학 지식의 도입과 서양문물을 가져와서 사회를 변화시켜서 물적 풍요를 얻고자 하는 동시에 만민평등의 주장을 통해 우리 사회가 가져야할 가치기준을 인간평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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