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이혼의 양상과 그 실제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조선후기 이혼의 양상과 그 실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머리말

Ⅱ.이혼의 유형과 절차
1.이혼의 유형
2.이혼의 절차

Ⅲ.이혼의 실제
1.강제이혼
2.일방적 이혼
1)칠거지악
2)구타
3)피로여성의 이혼
3.합의이혼

Ⅳ.이혼의 처벌

Ⅴ.맺음말

본문내용

상을 같이 치른 경우’,‘ 가난할 때 결혼하여 후에 부귀해진 경우’에 대해 이혼을 허하지 않는 삼불거의 조항도 있는데 위와같음
, 이는 부부의 의리를 중요시 여기는 동시에 칠거를 악용한 이혼의 남발을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부부사이에 구타가 발생하였을 때도 이혼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처가 남편을 구타했을 경우에는 당연히 이혼이 되지만 이때 남편이 원하지 않으면 이혼을 시키지 않았고, 남편이 처를 구타하였을 경우에는 뼈가 부러지는 정도의 구타에 한해 ‘부부가 원한다면 이혼 시킨다’라고 하고 있기에 사실상 처에 의한 이혼은 거의 불가능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양난 때 성적 폭행을 당한 여성도 이혼의 대상이 되었다 《숙종실록》권53 숙종39년 5월 정유
.
합의이혼을 말 그대로 서로의 합의에 의해 이혼이 성립되는 경우로서 위의 사례에 비한다면 비교적 여자의 의사가 많이 반영되는 이혼의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대명률에서는 ‘부부가 화합하지 못하여 서로 이혼하기를 원할 때는 처벌하지 않는다 《대명률》戶律 婚姻 出妻
’라는 표현으로 이에 대한 규제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후기 이혼의 유형은 위의 세가지로 나뉜다. 조선후기에는 전기와는 다르게 양난과 다른 여타 사회적 변화의 요인으로 인하여 ‘역가이혼’ ‘피로여성의 이혼’등 새로운 이혼유형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 이혼은 그 성격을 고려하여 사헌부에 의해 이혼이 청구되는 ‘역가이혼’은 강제적 이혼으로, 남편에 의해 이혼이 청구되는 ‘피로여성의 이혼’은 일방적 이혼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겠다.
2.이혼의 절차
조선후기 이혼의 절차는 따로 정해져 나와있지 않다. 조선시기 전체를 통틀어 이혼제의 기본이 되었던 《대명률》도 형전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혼에 대한 규정만을 알 수 있을 뿐 절차는 알 수 없다. 장병인. 위의책
그렇기 때문에 자료를 기초로 하여 그 안에서 보이고 있는 사실들로부터 유추해 낼 수밖에 없다.
먼저 강제적 이혼을 경우 사헌부에서 대상인들의 행태가 강제적 이혼의 내용에 저촉되었는지의 여부를 조사하여 그 이유가 타당할 시 이혼을 요구하였다. 효종년간 능원군의 부인 유씨가 역신의 죄에 연루되었을 때 헌부가 이혼을 청하고 있는 《효종실록》 권19 효종8년 10월 무술
것은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방적 이혼일 경우 남편이나 시부모가 예조에 이혼을 요구해야 했다 《숙종실록》 권40 숙종 30년 9월 정묘
. 여기서 남편이나 시부모가 이혼을 요구해야 했다고 한 이유는, 물론 여자도 먼저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으나 사실상 불가능했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가 있고, ‘이혼하는 법은 남편이 스스로 고하기를 기다려서 이에 죄를 입게된다’고 하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거의 대부분 남자에 의한 이혼요구로 이혼이 성립된는 것이 당연시 여겨지고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혼의 요구가 들어오면이혼에 대한 타당여부가 판별이 되고 승인을 얻게 되는데 이때 이혼이유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조사하길 원할 경우 사건을 형조에게 위임하여 사실여부가 조사된 뒤 승인을 얻게 되었다. 《숙종실록》 권40 숙종30년 9월 정묘
이혼을 국가에 요청할 때 남편은 부모의 동의를 얻어 이혼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그러나 중기 이후 문중의식이 강해지면서 부모만이 아니라 문중의 동의도 필요하게 되었다. 사사롭게 처를 버린 차천로에 대해 선조가 “위로 관청에 알리고 다음에 문족들과 상의하여 그 죄를 헤아려 처를 내쳐야 명분이 서는것”이라며 힐책하고 있는 기사 《선조실록》 권194 선조38년 12월 무진
는 그러한 변모를 시사하는 자료로 볼 수 있다.
강제이혼이든 일방적 이혼이든 꼭 거쳐야 할 절차는 이혼사유에 대한 사실여부의 판단이었는데 만약 판단과정 도중 이혼사유가 법제에 없거나 《숙종실록》 권40 숙종30년 9월 임술
조사할 것을 청하지 않고 곧바로 이혼 할 것을 청한사실이 드러나면 《숙종실록》 권53 숙종39년 5월 경인
그 이혼은 성립 되지 않았다. 이는 비록 악역(惡逆)의 죄에 관계되더라도 국가에서 법을 적용할때에는 반드시 복초(服招)하여 승인하기를 기다렸다가 율(律)에 따라 벌을주는 것 《숙종실록》 권40 숙종30년 9월 병인
에 따른 것으로 엄중히 조사하여 뒷날의 폐단을 막으려는 까닭이였다.
이렇게 이혼을 하게되었을 때 오늘날처럼 이혼확인문건을 남겼는가의 여부는 조선후기자료로서 숙종년간 ‘문권(文券)’ 《숙종실록》 권39 숙종3년 6월 계유
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밖에 확인할 길이 없다. 이렇게 따로 문건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나라에 이혼을 요구하는 것이 매우 까다로웠기 때문에 사사로이 이혼이 많이 행해지고 있는 상태에서 예전의 풍토가 전례처럼 잘 지켜져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특별히 문제될게 없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렇기에 이 부분은 조선전기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조선전게에는 국가의 허락없이 사사롭게 이혼이 이루어질 경우에는 이혼문서를 작성하여 후일의 증빙자료로 삼았다. 이때의 문서는 기별명문(棄別明文) 《세종실록》 권 3 세조2년 정월 신사
, 기별문자(棄別文字) 《세종실록》 권33 세종8년 9월 신축
, 휴서(休書) 《성종실록》 권163 성종15년 2월 계유
, 수서(手誓) 《추관지》 영조39년
등의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였고 처를 ‘棄別’하는 글이라는 의미에서 기별지서(棄別之書) 《세종실록》 권58 세종14년 10월 갑인
기별지문(棄別之文) 《세조실록》 권30 세조9년 4월 무자
, 기처문(棄妻文) 《성종실록》 권 1 성종 즉위년 12월 경신
이라고 하거나 단순히 통서(通書) 《세조실록》 권 30 세조9년 6월 신사
라고 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명칭이 사용되었다. 이때 문서를 작성하는 것은 ‘기처문’이라는 명칭에서 집작할 수 있다시피 남편측이었고 처측에서 이혼문서를 작성할 수는 없었다. 장병인, 위의책
이혼문서에는 특별한 양식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일반적으로 이혼할 상대방의 이름과 이혼한 연월등을 기재하였던 것 같다 《성종실록》 권198 성종17년 12월 계사
.
이혼절차는 따로 나와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기존의 사실로 유츄해 낼 수

키워드

조선,   후기,   이혼,   여성,   지위

추천자료

  • 가격9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6.12.01
  • 저작시기2006.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7955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