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양반에 대한 비판과 풍자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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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후기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양반에 대한 비판과 풍자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조선 후기 몰락 양반의
빈곤한 경제 상황
2. 양반에 대한 비판
1) 양반의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
2) 양반의 학정에 대한 비판
3. 양반에 대한 풍자
1) 양반의 부정부패에 대한 풍자
2) 양반의 위선에 대한 풍자

Ⅲ. 결론

본문내용

이 둘로 나누고 있으니 그 고기도 잡될 것이요, 오행은 각기 제 바탕이 있어서 애당초 서로 낳는 것은 아니거늘 이제 그들은 억지로 자, 모로 갈라서 짜고 신 맛으로 나누어 놓았으니 그 맛이 순수하지 못할 것이요, 육기는 재 각기 행하는 것이어서 남이 이끌어 펴 줌을 기다릴 것이 없거늘 이제 그들은 망녕되니 ‘재성’‘보상’이라 일컬어서 사사로이 제 공을 세우려 하니, 그것을 막는다면 어찌 딱딱하여 가슴에 체하거나 목구멍에서 역겹지 않는단 말이냐.”
하였다. 김지용,『연암 박지원의 이상과 그 문학』, 명문당, 2005. p. 262.
박지원의 『호질』의 일부분이다. 선비를 먹기를 권하자 범이 선비의 이론적 폐쇄성과 헛된 공명심등을 들어 역겨운 존재라며 거부하고 있다. 주자학은 그것의 긍정적인 기능을 넘어서 지나치게 사변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론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그것에만 집착하는 대부분의 사대부의 모습을 비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사대부들은 이론에만 빠져 결국에는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까지 연출하게 되었다. 그들은 사회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이론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 속에만 빠져 사회는 도외시하고 일신의 양명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런 양반에 대한 비판은 비단 양민층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같은 양반 계층에서 이루어진 비판은 한층 더 현실적이며 비판적이었다. 또한 비판에서만 그치지 않고 현실적인 대안을 내어놓기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실학자인 정약용과 박지원이다. 정약용의 글에서 양반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살펴 보기로 한다.
士라는 것은 어떤 사람인가. 사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수족을 놀리면서 남의 땅을 삼키고 남의 노동을 먹고 사는가? 대저 사가 놀며 먹기에 토지의 이익이 다 개척되지 않는다. 놀고서는 곡식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면 또한 전업하여 남쪽 밭고랑으로 들어갈 것이다. 사가 돌이켜 밭고랑으로 들어가면 토지의 이익이 개척되고 사가 돌이켜 남쪽 밭고랑으로 들어가면 풍속이 후해지고 사가 돌이켜 남쪽 밭고랑으로 들어가면 난민이 그칠 것이다. 반드시 돌이켜 남쪽 밭고랑으로 들어갈 수 없는 자는 장차 어찌 할 것인가? 돌이켜서 공장이나 사인이 되는 자도 있을 것이고, 아침에 나아가 밭 갈고 밤에 돌아와 고인의 책을 읽는 이도 있을 것이고 부유한 백성의 자제를 가르쳐서 생활을 구할 자도 있을 것이다. 실리를 강구하여 땅에 적합한 것을 분별하고 수리를 일으키며 기기를 제작하여 힘을 절약하기도 하고 원예와 과수목축 등을 가르쳐 농사를 도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자들은 그 공이 어찌 완력으로 힘쓰는 이들과 비할 것인가? 박무영,『정약용의 시와 사유방식』, 태학사, 2002. p. 63-64
이 글은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선비가 실질적인 관료의 역할을 할 수 없을 경우에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을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선비의 역할이 갖는 기타의 내용을 엿보게 한다. 그것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물성’을 충분히 실현시킴으로써 백성의 생활을 돕는 것이다. 또한 앞의 인용의 선비가 독서가 아닌 농사공업의 어느 직종으로 전업을 하더라도 선비가 갖는 지도자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정약용의 사상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은 성리학의 틀에 갇혀 하늘이 준 신분에 따라 그 역할만을 충실히 하는 것이 본분을 다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허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총체적인 사회 제도가 신분 위주가 아닌 능력 위주로 개편되기 시작하고, 서양의 과학, 학문 등이 들어오면서 틀에 박힌 성리학은 그 위기를 맞기 시작하였다.
1) 양반의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
조선 후기는 조선 사회의 근본적 변혁이 일어난 시기이다. 철저한 신분제 중심의 농업사회에서 능력 위주의 상업 경제 사회로 변화하면서 신분제도의 붕괴, 서민들의 자아 자각, 부농과 빈농의 소득 격차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거스르는 나라의 정책과 관리들의 부정 부패는 그 어느 시기보다 극심했다. 격화된 당파 싸움으로 이미 과거제도는 그 의미를 상실하였고 일부 벌열가에 줄을 대어 벼슬 자리를 얻는 것이 글 읽는 선비가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현실에 대한 문학 작품 하나를 살펴보기로 하자.
오천냥에 진사내고 오만냥에 급제냇다
진사급제 뿐일런가 십만냥에 현감내고
백만냥에 부사내니 현감부사 뿐일런가
부사부윤 내난법은 몇백만냥 결가하며
팔도감사 내난법은 천만냥을 의논할가
국정이 그러하니 백성되는 그 목숨은
도탄에 아니들가 사공수, 「한양오백년가」, 『한국고전문학대계』 제 7권, 민중서관, 1974. p. 508
사공수의 가사 작품 「한양오백년가」의 일부이다. 조선 후기 부분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관직을 사고 파는 관리들의 행태를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 시기는 어느 때보다 당쟁이 격화되어 사실상의 관리 등용제도가 마비되고 일부 권력자들의 손에 의해 벼슬자리가 농락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양반이 몰락했지만 수십대에 거쳐 권력을 잡아 온 일부 벌열가들의 위세는 여전했고 그들에게 줄을 대어 벼슬 자리에 오른 이들도 상당했다. 뇌물을 쓰거나 아첨을 해 벼슬 자리를 얻은 이들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을 리 만무하다. 그리하여 백성들에게 말도 안되는 세금을 걷거나 노역을 시킴으로써 원망을 사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박지원, 이세보, 정약용 등의 작품에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이세보의 문학작품에서 살펴본다.
19세기에 458수의 시조를 남긴 이세보는 사대부 시조의 전통을 완전히 혁신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우선 작품의 양이 누구보다도 많거니와 내용도 기녀들과 가까이 한 것을 노래한 애정시조도 있고 귀양살이의 쓰라림을 노래한 시조도 있는가 하면 삼정의 문란으로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괴로움과 관원들의 횡포를 대담하게 묘사한 점은 전에 볼 수 없던 경향이다.
각귀기가 여보니 반됴반미 황당다
두 셤이 열말되고 한 셤이 닷말이라
무샹헌 히색고 엄쟝O치 못신가
져 빅셩의 거동 보고 지고 싯고 드러와셔
한 셤 을 밧치랴면 두 셤 리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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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2.02
  • 저작시기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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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79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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