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역시 자기네들이 누구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국제 신인도라는 명분 아래 은행법의 취지까지 왜곡하면서 외환은행을 해외 투기 자본인 론스타에게 넘긴 사건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것.
넷째, 노동 측 역시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식이 높지 못하다. 물론 노동조합이란 조직은 기본적으로 조합원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곳이지, 사회적 책임을 지는 곳이 아니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럼 그런식으로 말하면 기업도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이지, 사회적 책임을 지기 위한 조직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노동운동이 자본 측에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를 많이 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노동조합 측도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이처럼 노동자와 정부와 자본은 각각 최소한의 수준으로나마 사회를 통합시켜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만큼 그 책임의 달성을 위해서도 합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사회적 타협이라고 생각한다. 노,사, 정 모두가 공공영역에 책임을 져야하며, 남에게 책임을 물으려면 권리도 인정해 줘야 한다. 예컨데 ‘정부가 이러저러한 사회적 책임을 져야하고, 사회적 분배를 효율적으로 추진할 의무도 가지고 있다.’고 말하려면 정부가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리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 기업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물으려면 사회적 권리도 인정해줘야 하는 것이다. 이 사회적 권리라는 게 바로 경영권이다.
하루아침에 그런 제도를 만들기는 힘들지만, 노, 사, 정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기 집단의 입장뿐 아니라 국민 경제 차원에서 넓게 보면서 타협하고자 하는 마인드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회적 타협의 틀은 노,사,정이 아니라 ‘노,사,정 플러스’가 되어야 한다. 물론 노,사,정이 주축이 되어야겠지만, 여기에는 농민이나 중소 상인도 포함되는 형식이 필요할 것이다. 사민주의의 정신을 철저히 따라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복지국가를 이뤘다는 호평과 더불어 세금이 소득의 50%를 넘고 국가의 지나친 배려에 국민들이 ‘복지병’에 시달려 무기력하다는 악평을 듣는 나라. 대담자들, 특히 정승일 교수가 스웨덴과 핀란드의 과거와 현재에서 발견한 것은 ‘사회적 대타협’이다. 1930년대 이 나라들의 기업과 노조는 지루하고 험난한 협상과정을 통해 노조가 파업을 자제하는 대신 기업은 소득세를 많이 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대타협을 이뤄냈다. 국가는 여기서 파생되는 고용불안을 적극적 노동정책, 즉 상시적인 직업훈련으로 잉여인력을 다른 산업에 재배치하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이런 타협의 역사를 기반으로 두 나라는 신자유주의 여파에도 꿋꿋이 경제적 강국의 위상을 평화롭게 지켜내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한국도 기존의 갈등적 노사관계를 벗고 민주국가-기업-노동자가 ‘비시장적으로’ 상생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에 느낌은 다소 딱딱하게 들리는 경제 이야기였지만, 정확하게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경제 문외한인 나로써는 “이 책이 딱히 어떻다.”라고 이야기 할 수도 없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바는 매우 단순하구나.. 라고 느껴지기까지도 시간이 많이 걸렸고, 이 책이 쉽다 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정말 이해가 안 갔다..
이 책은 나에게 “너 경제 공부 좀 해야겠다”라는 생각과 전체 문맥이 잡히지 않으니, 읽은 책을 또다시 여러차례 뒤적뒤적 거리면서 레포트를 쓰면서도 개념 정리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 힘든 경험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신문에서 가장 헷깔리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칼럼이다..
이 사람말 들으면 이 사람이 옳은 것 같기도 하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저 사람 말이 옳은 것 같기도 한, 서로 다른 입장의 글을 보면 누가 옳은지 누가 틀린지도 잘 구별 못하는 내가 감히 이 책을 판단하기가 힘들다..
우리 경제의 대한 방향을 바로 잡는 일.
어쩌면 우리가 원하고 원하는 일이다. 우리나라가 아직 더 경제적 성장의 여지가 있고 또 그러한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까지 정부와 기업에 의해 수업이 반복되어 온 슬로건이고 철학인데 이러한 흐름을 별다른 비판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시장경제의 속성들을 그대로 전수받을 가능성과 다름없다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경제를 바로 직시하고 우리 후손들에게 좋은 경제적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서 내가 타인과 더불어 공존해야 한다는 마음의 열림이 필요한 때 인 것이다.
어느 계급, 어느 계층을 떠나 이러한 전체적 인식과 열린 마음만이 비로소 우리 경제의 문제점을 해결할 사회적 대타협을 이루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대안 없는 비판은 쓰레기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이 책은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었다는 것과 복잡하고 답답한 한국 경제에 대해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공하였으며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려온다.
그들의 지향은 복잡하고 어려운 수식이 난무하는 것이 아니였다.
“아무튼 한국이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게 좋은 것 아니냐”는 매우 단순하고 깨끗한 주장이었다.
저자는 이야기한다. 문제는 양심이 아니라 인식이라고...
역사와 사회 경제와 정치에 대한 냉혹한 인식과 지각이 오히려 중요한 것이며, 그러한 맥락에서 문제는 변절이 아니라 아이러니, 그것도 지독한 논리적 역사적 아이러니라는 것. 그리고 이런 아이러니에 빠져 있는 것이 비단 장하준 정승일 두 사람뿐이 아니라, 개혁 세력과 진보 세력 전체 그리고 보수 세력 전체가 해당이 된다고.. 또한 이런 아이러니를 양산한 데에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와 환상이 자리하고 있기에..
우리는 이제 빼앗겼던 권리를 되찾아 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고, 대화하고 각자가 자기 자신이 아는 것이 정말 진리인지를 되물어야 한다. 재벌도, 노동자도, 사회단체도, 정치인도..
이론은 이론일 뿐이다. 만든 사람의 머리에서 떠났을 때에 이미 그 이론은 부패의 과정을 겪는다. 중요한 것은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고민하며 신중히 행동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항상 자신이 아는 것이 정말 진리인지를 되물었다.
쾌도난마 한국경제.. 한국경제가 회복되는 그 날을 한국 사람으로써 간절히 바랄뿐이다.
넷째, 노동 측 역시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식이 높지 못하다. 물론 노동조합이란 조직은 기본적으로 조합원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곳이지, 사회적 책임을 지는 곳이 아니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럼 그런식으로 말하면 기업도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이지, 사회적 책임을 지기 위한 조직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노동운동이 자본 측에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를 많이 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노동조합 측도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이처럼 노동자와 정부와 자본은 각각 최소한의 수준으로나마 사회를 통합시켜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만큼 그 책임의 달성을 위해서도 합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사회적 타협이라고 생각한다. 노,사, 정 모두가 공공영역에 책임을 져야하며, 남에게 책임을 물으려면 권리도 인정해 줘야 한다. 예컨데 ‘정부가 이러저러한 사회적 책임을 져야하고, 사회적 분배를 효율적으로 추진할 의무도 가지고 있다.’고 말하려면 정부가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리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 기업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물으려면 사회적 권리도 인정해줘야 하는 것이다. 이 사회적 권리라는 게 바로 경영권이다.
하루아침에 그런 제도를 만들기는 힘들지만, 노, 사, 정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기 집단의 입장뿐 아니라 국민 경제 차원에서 넓게 보면서 타협하고자 하는 마인드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회적 타협의 틀은 노,사,정이 아니라 ‘노,사,정 플러스’가 되어야 한다. 물론 노,사,정이 주축이 되어야겠지만, 여기에는 농민이나 중소 상인도 포함되는 형식이 필요할 것이다. 사민주의의 정신을 철저히 따라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복지국가를 이뤘다는 호평과 더불어 세금이 소득의 50%를 넘고 국가의 지나친 배려에 국민들이 ‘복지병’에 시달려 무기력하다는 악평을 듣는 나라. 대담자들, 특히 정승일 교수가 스웨덴과 핀란드의 과거와 현재에서 발견한 것은 ‘사회적 대타협’이다. 1930년대 이 나라들의 기업과 노조는 지루하고 험난한 협상과정을 통해 노조가 파업을 자제하는 대신 기업은 소득세를 많이 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대타협을 이뤄냈다. 국가는 여기서 파생되는 고용불안을 적극적 노동정책, 즉 상시적인 직업훈련으로 잉여인력을 다른 산업에 재배치하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이런 타협의 역사를 기반으로 두 나라는 신자유주의 여파에도 꿋꿋이 경제적 강국의 위상을 평화롭게 지켜내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한국도 기존의 갈등적 노사관계를 벗고 민주국가-기업-노동자가 ‘비시장적으로’ 상생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에 느낌은 다소 딱딱하게 들리는 경제 이야기였지만, 정확하게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경제 문외한인 나로써는 “이 책이 딱히 어떻다.”라고 이야기 할 수도 없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바는 매우 단순하구나.. 라고 느껴지기까지도 시간이 많이 걸렸고, 이 책이 쉽다 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정말 이해가 안 갔다..
이 책은 나에게 “너 경제 공부 좀 해야겠다”라는 생각과 전체 문맥이 잡히지 않으니, 읽은 책을 또다시 여러차례 뒤적뒤적 거리면서 레포트를 쓰면서도 개념 정리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린 힘든 경험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신문에서 가장 헷깔리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칼럼이다..
이 사람말 들으면 이 사람이 옳은 것 같기도 하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저 사람 말이 옳은 것 같기도 한, 서로 다른 입장의 글을 보면 누가 옳은지 누가 틀린지도 잘 구별 못하는 내가 감히 이 책을 판단하기가 힘들다..
우리 경제의 대한 방향을 바로 잡는 일.
어쩌면 우리가 원하고 원하는 일이다. 우리나라가 아직 더 경제적 성장의 여지가 있고 또 그러한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까지 정부와 기업에 의해 수업이 반복되어 온 슬로건이고 철학인데 이러한 흐름을 별다른 비판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시장경제의 속성들을 그대로 전수받을 가능성과 다름없다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경제를 바로 직시하고 우리 후손들에게 좋은 경제적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서 내가 타인과 더불어 공존해야 한다는 마음의 열림이 필요한 때 인 것이다.
어느 계급, 어느 계층을 떠나 이러한 전체적 인식과 열린 마음만이 비로소 우리 경제의 문제점을 해결할 사회적 대타협을 이루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대안 없는 비판은 쓰레기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이 책은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었다는 것과 복잡하고 답답한 한국 경제에 대해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공하였으며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려온다.
그들의 지향은 복잡하고 어려운 수식이 난무하는 것이 아니였다.
“아무튼 한국이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게 좋은 것 아니냐”는 매우 단순하고 깨끗한 주장이었다.
저자는 이야기한다. 문제는 양심이 아니라 인식이라고...
역사와 사회 경제와 정치에 대한 냉혹한 인식과 지각이 오히려 중요한 것이며, 그러한 맥락에서 문제는 변절이 아니라 아이러니, 그것도 지독한 논리적 역사적 아이러니라는 것. 그리고 이런 아이러니에 빠져 있는 것이 비단 장하준 정승일 두 사람뿐이 아니라, 개혁 세력과 진보 세력 전체 그리고 보수 세력 전체가 해당이 된다고.. 또한 이런 아이러니를 양산한 데에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와 환상이 자리하고 있기에..
우리는 이제 빼앗겼던 권리를 되찾아 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고, 대화하고 각자가 자기 자신이 아는 것이 정말 진리인지를 되물어야 한다. 재벌도, 노동자도, 사회단체도, 정치인도..
이론은 이론일 뿐이다. 만든 사람의 머리에서 떠났을 때에 이미 그 이론은 부패의 과정을 겪는다. 중요한 것은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고민하며 신중히 행동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항상 자신이 아는 것이 정말 진리인지를 되물었다.
쾌도난마 한국경제.. 한국경제가 회복되는 그 날을 한국 사람으로써 간절히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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