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김구의 생애
백범 일지
김구선생의 암살사건
경교장
이승만의 생애
4.19혁명
이화장
백범 일지
김구선생의 암살사건
경교장
이승만의 생애
4.19혁명
이화장
본문내용
만 등과 대립하였다.
1917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협의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1919년 3 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漢城)임시정부와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책임자인 집정관 총재(執政官總裁)와 국무총리(國務總理)로 추대되자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설치하고 위원장이 되어 스스로 대통령으로 행세, 점차 카리스마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임시정부 내부의 무단파(武斷派)로부터 불신을 받아 1921년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불신임 결의가 있었다.
그 후 워싱턴군비축소회의를 비롯하여 미국정부 및 국제연맹 등과의 외교교섭을 통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나 기대한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 무렵 하와이와 워싱턴 등지의 재미교포사회에서는 그를 따르는 우남파(雩南派)와 안창호를 지지하는 도산파(島山派)의 대립양상이 노골화되어 해외에서의 독립운동노선에 분열이 나타났다.
193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후 1945년 광복이 되자 그 해 10월 귀국, 우익 민주진영의 최고지도자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 총재, 민주의원 의장 등을 지내며 좌익세력과 투쟁, 1946년 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 그 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의 대한(對韓)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 이어 국회의장에 피선되어,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 그 해 8월 15일 취임하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였으며, 철저한 배일(排日)정책으로 일본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견지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공산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세력이 우세한 국회에서 자신의 대통령재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自由黨)을 창당하고 계엄령을 선포, 반대파 국회의원을 감금하는 등 변칙적 방법을 동원하여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로 개정하고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
1953년 미국의 전쟁처리방법에 반대, 계속 휴전을 반대하다가 휴전성립 직전에 반공(反共)포로의 석방을 단행,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1954년 자신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종신대통령제 개헌안을 발의, 국회에서 1표 부족으로 부결되었는데, 사사오입(四捨五入)의 해석논리를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번복, 통과시킴으로써 1956년 대통령에 3선되었다. 1958년 12월 차기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하고 경제시책의 빈곤으로 인한 특정재벌에 대한 특혜 등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1960년 3월 15일 여당과 정부가 전국적 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 19 혁명으로 사임, 하와이에 망명해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장례는 고국에서 가족장으로 조촐히 집행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에 《독립정신》 《일본내막기》(영문) 등이 있다.
4.19혁명
정부수립 이후, 허다한 정치파동을 야기시키면서 영구집권(永久執權)을 꾀했던 이승만(李承晩)과 자유당정권(自由黨政權)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第二共和國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비합헌적(非合憲的)인 방법으로 헌정체제(憲政體制)의 변혁과 정권교체를 결과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혁명(革命)으로 규정하여 이를 4월혁명, 419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민주혁명 등으로 불리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義擧)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되었다.
이화장
안팎의 본관, 이승만 대통령이 조각(組閣)을 발표하였던 조각정(組閣亭), 이화장의 관리와 유족들의 거처인 생활관(1985 건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외에 1988년 건국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이승만 동상이 있다.
본디 조선 중기의 문신 신광한(申光漢)의 집터로 신대(申臺)라 하였는데, 8 15광복 직후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이 살았고 지금은 이승만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옛날에는 이곳 정문 앞에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으며, 뒤에 대군의 저택은 장생전(長生殿)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승만 대통령이 조각을 발표할 당시에는 그 건물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한다.
1917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협의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1919년 3 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漢城)임시정부와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책임자인 집정관 총재(執政官總裁)와 국무총리(國務總理)로 추대되자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설치하고 위원장이 되어 스스로 대통령으로 행세, 점차 카리스마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임시정부 내부의 무단파(武斷派)로부터 불신을 받아 1921년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불신임 결의가 있었다.
그 후 워싱턴군비축소회의를 비롯하여 미국정부 및 국제연맹 등과의 외교교섭을 통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나 기대한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 무렵 하와이와 워싱턴 등지의 재미교포사회에서는 그를 따르는 우남파(雩南派)와 안창호를 지지하는 도산파(島山派)의 대립양상이 노골화되어 해외에서의 독립운동노선에 분열이 나타났다.
193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후 1945년 광복이 되자 그 해 10월 귀국, 우익 민주진영의 최고지도자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 총재, 민주의원 의장 등을 지내며 좌익세력과 투쟁, 1946년 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 그 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의 대한(對韓)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 이어 국회의장에 피선되어,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 그 해 8월 15일 취임하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였으며, 철저한 배일(排日)정책으로 일본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견지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공산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세력이 우세한 국회에서 자신의 대통령재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自由黨)을 창당하고 계엄령을 선포, 반대파 국회의원을 감금하는 등 변칙적 방법을 동원하여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로 개정하고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
1953년 미국의 전쟁처리방법에 반대, 계속 휴전을 반대하다가 휴전성립 직전에 반공(反共)포로의 석방을 단행,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1954년 자신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종신대통령제 개헌안을 발의, 국회에서 1표 부족으로 부결되었는데, 사사오입(四捨五入)의 해석논리를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번복, 통과시킴으로써 1956년 대통령에 3선되었다. 1958년 12월 차기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하고 경제시책의 빈곤으로 인한 특정재벌에 대한 특혜 등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1960년 3월 15일 여당과 정부가 전국적 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 19 혁명으로 사임, 하와이에 망명해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장례는 고국에서 가족장으로 조촐히 집행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에 《독립정신》 《일본내막기》(영문) 등이 있다.
4.19혁명
정부수립 이후, 허다한 정치파동을 야기시키면서 영구집권(永久執權)을 꾀했던 이승만(李承晩)과 자유당정권(自由黨政權)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第二共和國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는 비합헌적(非合憲的)인 방법으로 헌정체제(憲政體制)의 변혁과 정권교체를 결과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혁명(革命)으로 규정하여 이를 4월혁명, 419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민주혁명 등으로 불리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이를 의거(義擧)로 규정하여 일반화되었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되었다.
이화장
안팎의 본관, 이승만 대통령이 조각(組閣)을 발표하였던 조각정(組閣亭), 이화장의 관리와 유족들의 거처인 생활관(1985 건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외에 1988년 건국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이승만 동상이 있다.
본디 조선 중기의 문신 신광한(申光漢)의 집터로 신대(申臺)라 하였는데, 8 15광복 직후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이 살았고 지금은 이승만기념관으로 보존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옛날에는 이곳 정문 앞에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으며, 뒤에 대군의 저택은 장생전(長生殿)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승만 대통령이 조각을 발표할 당시에는 그 건물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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