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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전쟁이 발발하여 더 이상 거론되지 못했다.
2. 동학 농민 운동
1. 농민 전쟁의 배경
문호개방 이전의 조선사회에서도 중세적 통치체제의 모순에 저항하는 민란을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다. 19세기 중엽의 임술민란에서와 같이 민란은 국지성과 분산성을 넘어서지 못했으면서도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갔다. 그러나 문호개방 전에는 대규모 농민전쟁으로 발전할 만큼 역사적 조건이 아직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에 언제나 민란으로만 그쳤다.
그 원인은 몇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우선 농민층의 정치사회적 의식수준 자체가 이 시기의 정치경제사회적 모순을 구조적이고 체제적인 모순으로 파악하는 단계에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탐관오리의 개인적 부정부패나 양반토호층의 부분적 토색질로만 파악하는 데 그쳤기 때문에, 그것의 일시적 제거만을 겨냥한 민란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 민란을 농민전쟁으로 확대하거나 혁명성을 불어넣을 만큼 정치 의식이나 지도력을 갖춘 정치적 지도층이 아직 형성되지 못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왕조 후기에 와서 실학자와 같이 어느정도 지배체제 밖에 위치한 지식인들이 일부 있었다 해도 어디까지나 체제 밖의 지식인에 한정되었을 뿐이었다. 피지배층의 편에 서서 왕조의 지배체제 자체에 적극적으로 저항할 만한 지식인층이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문호개방 이후에느 자본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조선왕조 통치체제의 모순이 심화되었고, 일부 지식인충과 전체 농민층의 정치의식사회의식은 급성장해갔다. 농민들은 외세의 침략 앞에 집권층이 뚜렷한 대책 없이 타협 굴복하는 것을 보았도, 자본주의 상품의 무제한적 수입과 곡물을 중심으로 하는 원자재의 대량수출 때문에 농촌의 재생산기반이 파괴되는 것을 직접 체험했다. 게다가 척사파의 반침략노선이나 개화파의 반봉건 노선은 농민층의 이해와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재향사족 중심 척사위정파의 반침략노선은 농민층의 노선과 일치했다. 그러나 척사위정파의 반외세 논리는 향촌사회에서 조선왕조적중세적 지배질서를 지키기 위한 외세배척론이었다. 갑오농민전쟁 당시 이들이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에 대항한 것도 비로 이 때문이었다. 개화파의 정책도 반봉건노선에서는 농민층과 입장을 같이한다고 해도 신분제 철폐 등에서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이들은 지주적 입장의 개혁을 추진하여 농민적 토지소유를 지향하는 농민과는 이해관계를 달리했다.
문호개방 이후 자본주의 침략으로 인한 농민경제의 타격, 외세에 대한 집권층의 타협과 굴복, 국제적 분쟁 및 제도개혁에 다른 정부재정의 곤란과 농민 부담의 과중, 지배층의 분열과 농민생활을 외면한 정쟁의 연속, 농촌지식인의 경제적 몰락과 그 정치의식 팽배와 그 정치사회의식의 성장, 그리고 자본제 상품의 침투와 봉건지배계급의 수탈로 몰락을 강요당하던 소상품생산자 및 소상인층의 농민층과의 연대 등이 갑오농민전쟁의 주된 배경 또는 원인이었다. 여기에 동학의 교세와 조직이 또 크게 뒷받침되었다.
실상 농민군 속에 동학교도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한다. 또 북접 중심 동학교단은 남접 중심 동학교단은 남접 중심 농민군 지도부의 봉기에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동학교단이 주도한 대중운동은 교조신원운동 단계에서 더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으며, 동학사상의 혁명성 여부도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동학교단이 내건 보국안민광제창생 등의 기치가 농민층의 의식성장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고 동학교단이 교세 확장을 위해 실시한 포접제가 농민군의 조직과 동원에 큰 몫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동학교단의 포접제는 교주 아래 몇십개소의 포(包)가 있었다. 그 포의 대접주 아래 또 수십명의 접주가 있어서 긴밀한 조직망을 형성하고 잇었다. 농민군 지도부는 스스로 동학교단에 가담하여 접주 혹은 포주가 되어 포접제를 통해 농민군을 조직 동원했고 이 대문에 봉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2.농민전쟁의 전개과정
동학교단 주도의 대규모 대중집회가 처음 열린 것은 삼례집회였다. 이 집회는 그 성격이 교조 최제우의 신원과 관리들의 동학교도에 대한 수탈 금지를 요구하는 데 한정된 것이었다. 전라감사가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금지 공문을 내린 것을 보고 교주의 명령에 따라 해산했다. 이후 교조신원을 위한 복합상소가 있었고, 삼례집회 때 내린 감사의 탄압금지 공문이 실효가 없음을 알고 다시 제2차 대중집회인 보은집회를 열었다.
보은집회를 전후하여 동학교단에 의해 유교윤리를 강조하고 탐관오리를 규탄하는 척사위정론적 내용의 방문들이 나붙는 한편, 기독교 교회당이나 서양 선교사가 경영하는 학교 등에 외세배척을 주장하는 방문이 붙었다. 보운 관아에 보낸 통고문에서도 ‘소파왜양’을 주장했고, 교조신원보다 농민을 위한 정치적 요구가 일부 부각되었다. 그러나 보은집회 역시 선무사 어윤중 편으로 보낸 왕의 윤음을 듣고 해산했다.
보은집회는 2만 명 이상의 농민이 모인 집회였다. 동학교단 포조직의 이용이 농민군 동원의 확실한 방법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는 점, 이 집회를 계기로 동학운동, 교조신원운동이 아닌 반외세반봉건 농민전쟁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점, 나아가서 집회와 해산을 거듭하는 동학 교단적 운동의 한계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이 집회의 의의가 있었다.
동학교단 주도로 보은집회가 열리고 있을 무렵 전라도 금구에서 교단 쪽과는 직접 연결되지 않은 집회가 약 1만 명이 모인 가운데 따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동학교단이 주동한 보은집회를 정치적 성격의 집회로 유도하려 했다. ‘금구취회’로 불린 이 집회의 지도자는 전봉준서장옥 등이었고 정부는 곧 이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교단이 주도한 동학운동은 보은집회로 일단 끝나고 금구집회를 주동한 세력을 중심으로 고부민란이 폭발했다. 이 민란을 기점으로 남접에 가담했던 농민 지도자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등이 주도하는 농민전쟁이 전개되었다.
‘금구취회’가 끝난 후 전봉준은 고부 농민 40여 명과 함께 군수 조병갑의 악정을 규탄하고 곧 20명의 이름으로 사발통문을 띄워 거사를 계획했다. 다시 고부 농민 60여 명과 함께 직접 전주감영으로 가서 고부 고을의 폐정에 대한 시정을 요구했으나
2. 동학 농민 운동
1. 농민 전쟁의 배경
문호개방 이전의 조선사회에서도 중세적 통치체제의 모순에 저항하는 민란을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다. 19세기 중엽의 임술민란에서와 같이 민란은 국지성과 분산성을 넘어서지 못했으면서도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갔다. 그러나 문호개방 전에는 대규모 농민전쟁으로 발전할 만큼 역사적 조건이 아직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에 언제나 민란으로만 그쳤다.
그 원인은 몇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우선 농민층의 정치사회적 의식수준 자체가 이 시기의 정치경제사회적 모순을 구조적이고 체제적인 모순으로 파악하는 단계에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탐관오리의 개인적 부정부패나 양반토호층의 부분적 토색질로만 파악하는 데 그쳤기 때문에, 그것의 일시적 제거만을 겨냥한 민란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 민란을 농민전쟁으로 확대하거나 혁명성을 불어넣을 만큼 정치 의식이나 지도력을 갖춘 정치적 지도층이 아직 형성되지 못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왕조 후기에 와서 실학자와 같이 어느정도 지배체제 밖에 위치한 지식인들이 일부 있었다 해도 어디까지나 체제 밖의 지식인에 한정되었을 뿐이었다. 피지배층의 편에 서서 왕조의 지배체제 자체에 적극적으로 저항할 만한 지식인층이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문호개방 이후에느 자본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조선왕조 통치체제의 모순이 심화되었고, 일부 지식인충과 전체 농민층의 정치의식사회의식은 급성장해갔다. 농민들은 외세의 침략 앞에 집권층이 뚜렷한 대책 없이 타협 굴복하는 것을 보았도, 자본주의 상품의 무제한적 수입과 곡물을 중심으로 하는 원자재의 대량수출 때문에 농촌의 재생산기반이 파괴되는 것을 직접 체험했다. 게다가 척사파의 반침략노선이나 개화파의 반봉건 노선은 농민층의 이해와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재향사족 중심 척사위정파의 반침략노선은 농민층의 노선과 일치했다. 그러나 척사위정파의 반외세 논리는 향촌사회에서 조선왕조적중세적 지배질서를 지키기 위한 외세배척론이었다. 갑오농민전쟁 당시 이들이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에 대항한 것도 비로 이 때문이었다. 개화파의 정책도 반봉건노선에서는 농민층과 입장을 같이한다고 해도 신분제 철폐 등에서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이들은 지주적 입장의 개혁을 추진하여 농민적 토지소유를 지향하는 농민과는 이해관계를 달리했다.
문호개방 이후 자본주의 침략으로 인한 농민경제의 타격, 외세에 대한 집권층의 타협과 굴복, 국제적 분쟁 및 제도개혁에 다른 정부재정의 곤란과 농민 부담의 과중, 지배층의 분열과 농민생활을 외면한 정쟁의 연속, 농촌지식인의 경제적 몰락과 그 정치의식 팽배와 그 정치사회의식의 성장, 그리고 자본제 상품의 침투와 봉건지배계급의 수탈로 몰락을 강요당하던 소상품생산자 및 소상인층의 농민층과의 연대 등이 갑오농민전쟁의 주된 배경 또는 원인이었다. 여기에 동학의 교세와 조직이 또 크게 뒷받침되었다.
실상 농민군 속에 동학교도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한다. 또 북접 중심 동학교단은 남접 중심 동학교단은 남접 중심 농민군 지도부의 봉기에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동학교단이 주도한 대중운동은 교조신원운동 단계에서 더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으며, 동학사상의 혁명성 여부도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동학교단이 내건 보국안민광제창생 등의 기치가 농민층의 의식성장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고 동학교단이 교세 확장을 위해 실시한 포접제가 농민군의 조직과 동원에 큰 몫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동학교단의 포접제는 교주 아래 몇십개소의 포(包)가 있었다. 그 포의 대접주 아래 또 수십명의 접주가 있어서 긴밀한 조직망을 형성하고 잇었다. 농민군 지도부는 스스로 동학교단에 가담하여 접주 혹은 포주가 되어 포접제를 통해 농민군을 조직 동원했고 이 대문에 봉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2.농민전쟁의 전개과정
동학교단 주도의 대규모 대중집회가 처음 열린 것은 삼례집회였다. 이 집회는 그 성격이 교조 최제우의 신원과 관리들의 동학교도에 대한 수탈 금지를 요구하는 데 한정된 것이었다. 전라감사가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금지 공문을 내린 것을 보고 교주의 명령에 따라 해산했다. 이후 교조신원을 위한 복합상소가 있었고, 삼례집회 때 내린 감사의 탄압금지 공문이 실효가 없음을 알고 다시 제2차 대중집회인 보은집회를 열었다.
보은집회를 전후하여 동학교단에 의해 유교윤리를 강조하고 탐관오리를 규탄하는 척사위정론적 내용의 방문들이 나붙는 한편, 기독교 교회당이나 서양 선교사가 경영하는 학교 등에 외세배척을 주장하는 방문이 붙었다. 보운 관아에 보낸 통고문에서도 ‘소파왜양’을 주장했고, 교조신원보다 농민을 위한 정치적 요구가 일부 부각되었다. 그러나 보은집회 역시 선무사 어윤중 편으로 보낸 왕의 윤음을 듣고 해산했다.
보은집회는 2만 명 이상의 농민이 모인 집회였다. 동학교단 포조직의 이용이 농민군 동원의 확실한 방법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는 점, 이 집회를 계기로 동학운동, 교조신원운동이 아닌 반외세반봉건 농민전쟁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점, 나아가서 집회와 해산을 거듭하는 동학 교단적 운동의 한계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이 집회의 의의가 있었다.
동학교단 주도로 보은집회가 열리고 있을 무렵 전라도 금구에서 교단 쪽과는 직접 연결되지 않은 집회가 약 1만 명이 모인 가운데 따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동학교단이 주동한 보은집회를 정치적 성격의 집회로 유도하려 했다. ‘금구취회’로 불린 이 집회의 지도자는 전봉준서장옥 등이었고 정부는 곧 이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교단이 주도한 동학운동은 보은집회로 일단 끝나고 금구집회를 주동한 세력을 중심으로 고부민란이 폭발했다. 이 민란을 기점으로 남접에 가담했던 농민 지도자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등이 주도하는 농민전쟁이 전개되었다.
‘금구취회’가 끝난 후 전봉준은 고부 농민 40여 명과 함께 군수 조병갑의 악정을 규탄하고 곧 20명의 이름으로 사발통문을 띄워 거사를 계획했다. 다시 고부 농민 60여 명과 함께 직접 전주감영으로 가서 고부 고을의 폐정에 대한 시정을 요구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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