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원양성제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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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원양성제도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개화기의 교원 양성 제도

2. 한국 근대교육의 사적 이해

본문내용

개혁이 상호 교차하는 복잡한 와중에서 전개된 점을 고려하여야 한다. 또 국가 권력 담지 자 사이의 간극이 있었다. 당시 군주인 고종의 진보적 성향과 정부기구를 장악한 관료들의 그것은 일치하지 않았다. 정부가 추진한 신교육의 전개과정 분석에서 당시 조선 정부의 국가적 특질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별기군에서의 신식 군사훈련과 동 문학, 육영공원, 배재학당 위탁교육에서의 영어 어학연수는 당시 국내외 정세로 보면 가장 시급하고 또 적절한 교육개혁인 것이다. 이러한 신식 교육은 전통교육 틀 안에 편입될 수 있는 것이므로 구래 전통교육에 대한 대규모 교육개혁 없이 전개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정부의 교육개혁의 현장에서 갑오교육개혁이 등장된다.
근대교육사의 전개에서 주객을 바르게 관련 지워야 할 필요성은 개신교 선교사의 교육선교 사업의 분석에서도 마찬가지로 대두된다. 다 알듯이, 1885년 이후 이북장로교와 북 감리회 선교사들이 입국하고 그들에 의해 제중원과 같은 신식의 학교, 배재학당과 같은 사설 영어강습소, 이화학당과 같은 여자 기숙사, 惠貧院과 같은 고아원 (나중에 경신학교) 등이 세워진다.
그러나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국에 앞서 이루어진 다음 두 가지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항 전후 만주와 일본 등 기독교 전도 엄금 조치가 적용되지 않는 외국에서 몇몇 조선인은 스스로 기독교를 수용하기로 외 즉 선교사의 조선 전도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1883년 미국에 파송된 報聘사 사행은 미국 개신교 조선선교로 이어진다. 민영익과 감리회 교육설교 지도가 가우쳐 목사와의 遺遇는 감리교 선교로 이어진다. 가우쳐 목사와의 요청으로 한성에 입경한 맥클레이 목사는 김옥균의 알선에 힘입어 의료 및 교육분야 선교 사업에 대한 고종의 윤허를 얻게 되어 선교사 파송이 이루어진 것이다. 선교사 알랜은 갑신정변 중 자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하여 정부의 신임을 얻게 되어 장로교선교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미국 개신교 조선 선교회가 조직되기 전 북만주 牧丹과 奉川 지역에는 조선인이 참여하여 한글 성경 번역사업이 이루어 겼다. 압록 강변 백두산 계곡에 집단 거주한 조선인 중 일부는 문서판매인이 전달한 성경을 읽고 개신교를 수용하기로 결심한 다음 외국 선교단체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였다. 갑신정변 후 국경을 넘어 피신한 망명객 일부는 문서를 통해 개종한 다음 한성에까지 문서판매인을 파송하여 자력으로 교회"를 세워 만주에 와 있는 외국인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비슷한 상황이 일본에서도 이루어 겼다. 언더우드는 조선인이 일본에서 번역한 신약성경을 소지하고 입국하였다. 아펜젤러가 평양에 전도 여행을 할 당시 이미 세례를 만은 조선 기독교인을 만나 선교사 파송 요청을 받기도 하였다. 어느 宣敎史에도 외국인 선교사가 자국민이 번역한 성경을 가지고 선교 사업을 시작한 경우는 찾기 어렵다. 또 자국어로 번역된 분서를 읽고 개종하여 기독교 공동체를 스스로 만든 경우도 찾기 어렵다. 성서번역사업은 외국 문서선교단체가 주관하였으나 그 번역을 당당한 사람은 조선인이었다. 초기 성서번역 당시 한역 성서나 교리 문답 서를 대본으로 삼았다. 경서에 조예가 깊거나 최소한 漠 學에 익숙한 조선인의참여가 번역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였다.
보빙사 사행과 가우처 박사의 우연한 만남이 우발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조선 선교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 조선인들이 자발적인 기독교 수용에서 그 씨앗이 이미 뿌려졌기 때문이다.
조선과 서양의 만남의 역사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 朝鮮 西學이 성립된 후 신부 파송을 요청한 조선 천주교 自生의 역사는 비단 구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개신교에도 거의 통일하게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누가 왜 어떤 이유로 기독교를 수용하였는지는 앞으로 밝힐 과제이다. 개신교 선교는 물론 선교사들의 “유례없이 성공적”인 교육사업의 상당 부분은 조선인들의 자발적이며 주체적인 노력이 있었다. 자력으로 성장한 조선인개신교 지도자와 미국 선교사 사이에는 목회의 형식과 방법에서 상당한 견해차이가 있었다. 1907면 소위 “부흥”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선교사의 입지가 확고히 되기 전까지 조선인 지도자는 상당한 정도 지도력을 행사하였다. 주일학교나 주간학교 등과 같은 교육사업에서 그들의 노력이 두드러진다. 이 점 이만열 교수가 조선기독교 역사를“선교의 역사”로 기술하지 않고“민족교회의 역사”로 기술하려 기울인 선구적 노력은 개신교의 신식교육의 분석에 중요한 시사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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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2.02
  • 저작시기20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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