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사란?
2. 사의 발달
1) 만당 이전의 사
보살만,억강남 본문, 해설 수록
2) 만당, 오대의 사와 시인들
경루자,보살만,몽강남 등등,.
2. 사의 발달
1) 만당 이전의 사
보살만,억강남 본문, 해설 수록
2) 만당, 오대의 사와 시인들
경루자,보살만,몽강남 등등,.
본문내용
. 그러나 왕실이 지나치게 사치에 빠져 975년 3대 38년으로 송(宋)나라에게 멸망되었다.
의 이욱(李煜) 및 풍연사(馮延巳)의 <사>가 뛰어났다. 풍연사(903-960)는 연사(延嗣)하고도 썼고, 자가 정중(正中), 광릉(廣陵, 江蘇省 江都縣 동북쪽) 사람이다. 남당의 재상까지 지냈으나 놀고 술 마시기 좋아하며, 청신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규정(閨情)과 님그리움 등을 노래하였다. 송초에 진세수(陳世修)가 그의 <사집>으로 119수의 작품을 모아 『양춘집(陽春集)』을 편찬했으나, 거기에는 온정균위장이욱구양수 등의 작품도 섞여 있어, 진정한 그의 작품은 100수가 되지 못한다고 한다. 그의 <사>는 <화간풍>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특히 위장의 <사>의 풍격과 비슷한 느낌을 주면서도, 위장보다는 표현에 변화와 함축이 많다. 그리고<사>에 실린 정이 여리거나 불평스럽지만 않고 규모가 커서 북송 사풍의 길잡이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채상자(采桑子)
花前失却遊春侶, 獨自尋芳,
滿目悲, 縱有笙歌亦斷腸.
林間戱蝶簾間燕, 各自雙雙,
忍更思量, 綠樹靑苔半夕陽.
꽃 앞에 봄 놀이하던 짝 잃고
홀로 꽃 찾아 나서니,
눈에 보이는 것마다 서러움 안겨주어
비록 풍악 있다 하더라도 애간장 그대로 끊이네.
숲 사이에 노니는 나비, 발 사이로 보이는 제비,
모두가 쌍쌍이니
어쩔 수 없이 그리움 더하는데,
푸른 나무 파란 이끼엔 석양이 걸쳐오네.
㉡ 이욱(937-978)은 자가 중광(重光)이었고, 961년에 즉위하였던 남당의 마지막 임금 후주(後主)이다. 북송에 송나라가 강성해지고 있던 때였지만, 그는 문학과 서화와 음악을 즐기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975년 송나라가 쳐들어오자 저항도 못하고 수도 금릉(金陵)을 함락 당하였다, 후주는 적이 쳐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송나라 군대에게 잡혀가 여생을 유폐속에 보내었다. 그의 <사>에는 작자의 호화로웠던 생활고 함께 만년의 비참한 유폐생활이 대조를 이루며 그의 전후기 생활의 커다란 변화로 인해 사에 있어서도 독특한 특징이 나타난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사는 모두 46수로, 전기 사는 궁정의 환락을 묘사하고 있는데, 마치 화간파의 사와 같으나 풍격이 비교적 소박할 따름이다. 그러나 후기의 사는 생활 환경이 전기의 궁정 생활로부터 갑자기 고통스럽고 절박한 포로의 생활을 경험하게 됨에 따라, 당시의 고통과 비극을 비롯한 옛 제왕 생활의 추억을 묘사하고 있다. 이수웅 『역사에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중국문학사 2001 p193
, 다정다감한 그의 강정이 솔직하고 선명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문장과 여운을 느끼게 하는 성조(聲調)와 깊고 곡절 많은 서정은 북송 <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아버지인 중주(中主) 이경(李璟, 916-961) 이경(李璟, 916-961) 이승(李昇)의 장자로 남당 보대(保大) 원년에 제위에 올라 중주(中主)라고 하였으나, 정치적인 역량 부족으로 국가 정세가 날로 쇠약해 갔다. 그러나 문예의 수양은 뛰어나, 비록 전해오는 작품은 4수에 불과하지만 그의 여리고 슬픈 사의 풍격은 잘 나타나 있다, 그 중에서도「탄파완계사(破浣溪紗)」2수를 걸작으로 꼽고 있다. 이수웅 『역사에 따라 배우는 중국 문학사』다락원 2001 p192
도 남당을 대표할 만한 <사>의 작가여서, 이들의 작품은 『남당이주사(南唐二主詞)』에 함께 수록되어 있다.
우미인(虞美人)
春花秋月時了? 往事知多少?
小樓昨又東風, 故國不堪回首明月中.
彫欄玉應猶在, 只是朱顔改.
問君能有幾多愁? 恰似一江春水向東流.
봄 꽃 가을 달 언제고 끝이 있는가?
지난 일들 얼마나 그리운가?
작은 누각엔 간 밤 또 봄바람 불어왔으니
고국 쪽으로는 밝은 달 아래 차마 머리도 돌릴 수 없구나!
조각한 난간 옥 섬돌 아직 그대로이련만
젊었던 얼굴만이 변했네,
그대에게 묻노니 얼마나 많은 시름 안고 있는가?
마치 한 강의 봄물이 동쪽으로 흐르고 잇는 듯하네.
ⅲ. 결론
당대 시의 발전과 함께 민간에 유행하였던 <사>는 문인들에게까지 사랑 받아 문학의 한 종류로 정착되었다. 문인들의 <사>는 당 말에 어지러운 시국에 대한 한탄과 지식인의 책임을 노래하기보다는 대체적으로 연정을 노래하였다. 정형화된 시에서 조금 벗어나 음악적 요소를 더욱 가미하여 개인적인 내용을 자유롭게 노래한 것이 <사>라고 보여진다. 이러한 <사>가 민간에서 유행하자 문인들이 이러한 자유로운 형식의 <사>를 지었고 이것은 어지러운 시국을 백성과 함께 하고자 함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 같다.
의 이욱(李煜) 및 풍연사(馮延巳)의 <사>가 뛰어났다. 풍연사(903-960)는 연사(延嗣)하고도 썼고, 자가 정중(正中), 광릉(廣陵, 江蘇省 江都縣 동북쪽) 사람이다. 남당의 재상까지 지냈으나 놀고 술 마시기 좋아하며, 청신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규정(閨情)과 님그리움 등을 노래하였다. 송초에 진세수(陳世修)가 그의 <사집>으로 119수의 작품을 모아 『양춘집(陽春集)』을 편찬했으나, 거기에는 온정균위장이욱구양수 등의 작품도 섞여 있어, 진정한 그의 작품은 100수가 되지 못한다고 한다. 그의 <사>는 <화간풍>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특히 위장의 <사>의 풍격과 비슷한 느낌을 주면서도, 위장보다는 표현에 변화와 함축이 많다. 그리고<사>에 실린 정이 여리거나 불평스럽지만 않고 규모가 커서 북송 사풍의 길잡이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채상자(采桑子)
花前失却遊春侶, 獨自尋芳,
滿目悲, 縱有笙歌亦斷腸.
林間戱蝶簾間燕, 各自雙雙,
忍更思量, 綠樹靑苔半夕陽.
꽃 앞에 봄 놀이하던 짝 잃고
홀로 꽃 찾아 나서니,
눈에 보이는 것마다 서러움 안겨주어
비록 풍악 있다 하더라도 애간장 그대로 끊이네.
숲 사이에 노니는 나비, 발 사이로 보이는 제비,
모두가 쌍쌍이니
어쩔 수 없이 그리움 더하는데,
푸른 나무 파란 이끼엔 석양이 걸쳐오네.
㉡ 이욱(937-978)은 자가 중광(重光)이었고, 961년에 즉위하였던 남당의 마지막 임금 후주(後主)이다. 북송에 송나라가 강성해지고 있던 때였지만, 그는 문학과 서화와 음악을 즐기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975년 송나라가 쳐들어오자 저항도 못하고 수도 금릉(金陵)을 함락 당하였다, 후주는 적이 쳐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송나라 군대에게 잡혀가 여생을 유폐속에 보내었다. 그의 <사>에는 작자의 호화로웠던 생활고 함께 만년의 비참한 유폐생활이 대조를 이루며 그의 전후기 생활의 커다란 변화로 인해 사에 있어서도 독특한 특징이 나타난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사는 모두 46수로, 전기 사는 궁정의 환락을 묘사하고 있는데, 마치 화간파의 사와 같으나 풍격이 비교적 소박할 따름이다. 그러나 후기의 사는 생활 환경이 전기의 궁정 생활로부터 갑자기 고통스럽고 절박한 포로의 생활을 경험하게 됨에 따라, 당시의 고통과 비극을 비롯한 옛 제왕 생활의 추억을 묘사하고 있다. 이수웅 『역사에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중국문학사 2001 p193
, 다정다감한 그의 강정이 솔직하고 선명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문장과 여운을 느끼게 하는 성조(聲調)와 깊고 곡절 많은 서정은 북송 <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아버지인 중주(中主) 이경(李璟, 916-961) 이경(李璟, 916-961) 이승(李昇)의 장자로 남당 보대(保大) 원년에 제위에 올라 중주(中主)라고 하였으나, 정치적인 역량 부족으로 국가 정세가 날로 쇠약해 갔다. 그러나 문예의 수양은 뛰어나, 비록 전해오는 작품은 4수에 불과하지만 그의 여리고 슬픈 사의 풍격은 잘 나타나 있다, 그 중에서도「탄파완계사(破浣溪紗)」2수를 걸작으로 꼽고 있다. 이수웅 『역사에 따라 배우는 중국 문학사』다락원 2001 p192
도 남당을 대표할 만한 <사>의 작가여서, 이들의 작품은 『남당이주사(南唐二主詞)』에 함께 수록되어 있다.
우미인(虞美人)
春花秋月時了? 往事知多少?
小樓昨又東風, 故國不堪回首明月中.
彫欄玉應猶在, 只是朱顔改.
問君能有幾多愁? 恰似一江春水向東流.
봄 꽃 가을 달 언제고 끝이 있는가?
지난 일들 얼마나 그리운가?
작은 누각엔 간 밤 또 봄바람 불어왔으니
고국 쪽으로는 밝은 달 아래 차마 머리도 돌릴 수 없구나!
조각한 난간 옥 섬돌 아직 그대로이련만
젊었던 얼굴만이 변했네,
그대에게 묻노니 얼마나 많은 시름 안고 있는가?
마치 한 강의 봄물이 동쪽으로 흐르고 잇는 듯하네.
ⅲ. 결론
당대 시의 발전과 함께 민간에 유행하였던 <사>는 문인들에게까지 사랑 받아 문학의 한 종류로 정착되었다. 문인들의 <사>는 당 말에 어지러운 시국에 대한 한탄과 지식인의 책임을 노래하기보다는 대체적으로 연정을 노래하였다. 정형화된 시에서 조금 벗어나 음악적 요소를 더욱 가미하여 개인적인 내용을 자유롭게 노래한 것이 <사>라고 보여진다. 이러한 <사>가 민간에서 유행하자 문인들이 이러한 자유로운 형식의 <사>를 지었고 이것은 어지러운 시국을 백성과 함께 하고자 함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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