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악은 죽음보다 발걸음이 빠르다-소크라테스의 재판
2.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예수의 재판
3.무덤도, 초상화도 없는 프랑스의 성녀-잔 다르크의 재판
4.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토머스 모어 재판
5.마녀의 엉덩이에는 점이 있다-마녀재판:화형당한 100만의 중세 여성의 운명
6.그래도 지구는 돈다-갈릴레오 갈릴레이 재판
7.나는 고발한다-드레퓌스 재판
8.나는 프랑스를 믿는다-비시정권의 수반, 필리페 페탱의 재판
9.인간에 대한 인간의 잔인한 전쟁-로젠버그 부부의 재판
10.외설인가 명작인가-D.H.로렌스와 <채털리 부인의 사랑>재판
2.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예수의 재판
3.무덤도, 초상화도 없는 프랑스의 성녀-잔 다르크의 재판
4.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토머스 모어 재판
5.마녀의 엉덩이에는 점이 있다-마녀재판:화형당한 100만의 중세 여성의 운명
6.그래도 지구는 돈다-갈릴레오 갈릴레이 재판
7.나는 고발한다-드레퓌스 재판
8.나는 프랑스를 믿는다-비시정권의 수반, 필리페 페탱의 재판
9.인간에 대한 인간의 잔인한 전쟁-로젠버그 부부의 재판
10.외설인가 명작인가-D.H.로렌스와 <채털리 부인의 사랑>재판
본문내용
들은 이러한 상황을 악용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 9월 초순 ,FBI, 에드거 후버 국장에게 원자 폭탄의 기밀이 외국으로 유출되었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온다. FBI는 소련에서 있었던 원폭실험 사실을 확인하고 소련의 핵폭탄 실험 성공은 누군가의 간첩 행위 때문에 가능했다고 몰아간다.
로젠버그 부부는 에설 동생의 거짓 증언으로 스파이망의 대부가 되어버렸다. 뚜렷한 증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FBI는 그들을 검거한다.
이로써 미국 역사상 최초의 원폭간첩에 관한 재판이 시작된 것이다. 이 길고 고통스런 재판 과정에서 로젠버그 부부를 영웅으로 만든 숨은 영웅은 엠마누엘 블로호 변호사였다. 그는 선임료도 못받으면서 누구나 꺼리는 일에 나섰다. 모든 것을 소진한 그는 로젠버그 부부가 사형을 당한 한달 후 쉰 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블로흐는 이 사건을 통하여 변호사의 고귀한 상징이 되었고 고전적 변호사의 역할을 수행한 빛나는 인물이 되었다.
에설은 막내 동생인 데이비드를 어릴 때부터 돌보아왔고 그가 청년이 되었을 때는 좌익운동에 관여하도록 격려했고 어른이 되었을 때는 친구처럼 지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거침없이 누이와 매부에게 불리한 증언을 쏟아냈다. 로젠버그 부부는 자본주의보다 러시아 사회주의를 더 선호하였으며 자신이 로스앨러모스에서 간첩행위를 하도록 자신의 처에게 요구하였다는 사실을 증언하였다. 그는 자신이 살길은 누이와 매부의 간첩 사실을 정부측을 위해 진술해 주는 길밖에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흐른 후에 그린글래스의 스케치와 증언은 상식 이하라고 과학자들은 단정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원폭기밀을 전달받지 않아도 될 정도의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상대라는 게 그후의 연구결과를 증명되었다.
죽음을 앞두고 줄리어스는 자신의 전기를 쓰기 시작하였고, 에설은 버나드 쇼의 “성녀 잔 다르크”를 읽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이 사건을 바라보면서 순교자로서의 삶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로벤버그 부부의 구명운동이 일어났다. 로젠버그 부부의 처형에 반대하느 대중적 항의가 전세계를 울리기 시작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형집행은 연기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줄리어스와 에설은 공동 서명한 편지에서 두 아이들에게 그들의 부모가 무죄였음을 언제나 기억해 줄 것은 부탁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전기의자에서 처형당하였다.
1993년 8월 5일부터 11일까지 뉴욕에서 열린 미국 변호사협회 연례 총회장에서 로젠버그 부부에 대한 모의 법정이 열렸다. 열띤 논쟁이 끝나고 배심원들은 그들이 무죄라고 판결하였다. 비록 모의재판이었을망정 로젠버그 부부는 자신들이 예언했던 대로 역사상 무죄를 선고받고 명예를 회복했다.
10. 외설인가 명작인가-D.H.로렌스와 <채털리 부인의 사랑>재판
1928년 7월 이탈리아 피렌체의 한 출판사에서 어렵게 한 권의 책이 나왔다.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그것이다. 당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외설물로 낙인되어 출판이 금지되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국민작가로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면 로렌스는 완전히 외설작가 정도로 인식되었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당시까지는 ‘금지된 행동을 금지된 정밀함으로, 그리고 그것을 금지된 언어로 묘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불우한 환경에서 자신의 진정한 애정욕구를 잠재우고 있던 여성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남성과 만남으로써 진정한 사랑의 각성에 이르게 된다는 스토리는 참으로 진부할 정도로 낭만적이고 구태의연할 뿐이다.
재판에서의 열띤 변론에도 불구하고 배포금지 결정은 해제되지 않았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여러 나라, 여러 사회에서 끝없이 수난 당했다. 그러나 출판 금지와 검열에도 불구하고 해적판의 숫자는 늘어갔다.
역사를 보면 압수당하고 불살라진 책은 비단 음란문서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인간이 문자로 무엇인가 표현한 이래 수많은 나라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불살라졌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폭넓게 받아들여진 미국에서조차 외설물에 대한 규제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비롯하여 “율리시스”, “북회귀선” 같은 명작들이 계속 외설의 도마 위에 올라야 했던 것이다. 이 사회가 영원히 도덕적인 이상향이 될 수 없다면 출구를 내 주는 것이 사회 전체의 건강성을 위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인영화관을 설치하자는 주장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1949년 9월 초순 ,FBI, 에드거 후버 국장에게 원자 폭탄의 기밀이 외국으로 유출되었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온다. FBI는 소련에서 있었던 원폭실험 사실을 확인하고 소련의 핵폭탄 실험 성공은 누군가의 간첩 행위 때문에 가능했다고 몰아간다.
로젠버그 부부는 에설 동생의 거짓 증언으로 스파이망의 대부가 되어버렸다. 뚜렷한 증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FBI는 그들을 검거한다.
이로써 미국 역사상 최초의 원폭간첩에 관한 재판이 시작된 것이다. 이 길고 고통스런 재판 과정에서 로젠버그 부부를 영웅으로 만든 숨은 영웅은 엠마누엘 블로호 변호사였다. 그는 선임료도 못받으면서 누구나 꺼리는 일에 나섰다. 모든 것을 소진한 그는 로젠버그 부부가 사형을 당한 한달 후 쉰 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블로흐는 이 사건을 통하여 변호사의 고귀한 상징이 되었고 고전적 변호사의 역할을 수행한 빛나는 인물이 되었다.
에설은 막내 동생인 데이비드를 어릴 때부터 돌보아왔고 그가 청년이 되었을 때는 좌익운동에 관여하도록 격려했고 어른이 되었을 때는 친구처럼 지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거침없이 누이와 매부에게 불리한 증언을 쏟아냈다. 로젠버그 부부는 자본주의보다 러시아 사회주의를 더 선호하였으며 자신이 로스앨러모스에서 간첩행위를 하도록 자신의 처에게 요구하였다는 사실을 증언하였다. 그는 자신이 살길은 누이와 매부의 간첩 사실을 정부측을 위해 진술해 주는 길밖에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흐른 후에 그린글래스의 스케치와 증언은 상식 이하라고 과학자들은 단정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원폭기밀을 전달받지 않아도 될 정도의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상대라는 게 그후의 연구결과를 증명되었다.
죽음을 앞두고 줄리어스는 자신의 전기를 쓰기 시작하였고, 에설은 버나드 쇼의 “성녀 잔 다르크”를 읽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이 사건을 바라보면서 순교자로서의 삶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로벤버그 부부의 구명운동이 일어났다. 로젠버그 부부의 처형에 반대하느 대중적 항의가 전세계를 울리기 시작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형집행은 연기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줄리어스와 에설은 공동 서명한 편지에서 두 아이들에게 그들의 부모가 무죄였음을 언제나 기억해 줄 것은 부탁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전기의자에서 처형당하였다.
1993년 8월 5일부터 11일까지 뉴욕에서 열린 미국 변호사협회 연례 총회장에서 로젠버그 부부에 대한 모의 법정이 열렸다. 열띤 논쟁이 끝나고 배심원들은 그들이 무죄라고 판결하였다. 비록 모의재판이었을망정 로젠버그 부부는 자신들이 예언했던 대로 역사상 무죄를 선고받고 명예를 회복했다.
10. 외설인가 명작인가-D.H.로렌스와 <채털리 부인의 사랑>재판
1928년 7월 이탈리아 피렌체의 한 출판사에서 어렵게 한 권의 책이 나왔다.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그것이다. 당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외설물로 낙인되어 출판이 금지되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국민작가로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면 로렌스는 완전히 외설작가 정도로 인식되었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당시까지는 ‘금지된 행동을 금지된 정밀함으로, 그리고 그것을 금지된 언어로 묘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불우한 환경에서 자신의 진정한 애정욕구를 잠재우고 있던 여성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남성과 만남으로써 진정한 사랑의 각성에 이르게 된다는 스토리는 참으로 진부할 정도로 낭만적이고 구태의연할 뿐이다.
재판에서의 열띤 변론에도 불구하고 배포금지 결정은 해제되지 않았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여러 나라, 여러 사회에서 끝없이 수난 당했다. 그러나 출판 금지와 검열에도 불구하고 해적판의 숫자는 늘어갔다.
역사를 보면 압수당하고 불살라진 책은 비단 음란문서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인간이 문자로 무엇인가 표현한 이래 수많은 나라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불살라졌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폭넓게 받아들여진 미국에서조차 외설물에 대한 규제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비롯하여 “율리시스”, “북회귀선” 같은 명작들이 계속 외설의 도마 위에 올라야 했던 것이다. 이 사회가 영원히 도덕적인 이상향이 될 수 없다면 출구를 내 주는 것이 사회 전체의 건강성을 위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성인영화관을 설치하자는 주장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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