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실험의 목적 및 개요
2. 실험의 이론적 배경
3. 실험장치 및 실험절차
4. 실험결과
5. 오차해석
6. 토의 및 고찰 +(이론추가분)
2. 실험의 이론적 배경
3. 실험장치 및 실험절차
4. 실험결과
5. 오차해석
6. 토의 및 고찰 +(이론추가분)
본문내용
울이 없었다는 증거는 없으나 현실로 그것이 나타난 것은 이 시대이다.
그림 1.1 이집트 큐비트 그림 1.2 로마의 대저울
(튜린의 이집트 박물관 소장)
1.4 우리나라 도량형의 연혁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도량형기를 사용하였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도량형제도가 그것은 중국의 제도에서 전파되어 온 것이라 추측된다.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 이조시대를 거쳐 비교적 근세까지 우리나라의 도량형 제도는 중국에서 유래한 척관법을 사용하였으며 특히 이조 세종대완 시대에는 전제상정소를 두어 각종 자(尺)를 정비하는 한편 구리로 원기를 만들어 각 지방관서에 보내어 표준자로 이용케 하였으며 이 제도가 경국대전에 의해 법제화 되었다.
이조말 광무6년(1902)에는 궁내부(宮內府)에 평식원(平式院)을 설치하고 도량형 규격을 정비하는 한편 도량형기의 제조와 검정을 담당케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1964년 미터법에 의한 계량단위를 통일함으로써 본격적인 미터법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1.5 미터법의 창설
미터법은 1790년 프랑스의 탈레이랑이 새로운 단위의 설정을 제안한 것이 그 효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미터법 이전 프랑스의 도량형은 기타 유럽제국과 원류를 같이하는 로마인이 전한 것이었다. 미터법 정립 전까지 주로 사용된 길이 단위는 피에 드로아(Piedde roi)로서 약325mm의 길이를 갖는 것이었다. 그 기원은 아마도 이집트왕 다리우스가 정한 큐비트의 1/2에서 딴 것으로 찰스대제의 제정으로 시작된것이라 추측된다. 상기 단위 이외에도 여러가지 단위가 있었으며 특히 각주마다 각 도시마다 다른 값을 쓰고 또 같은 도시 내에서도 같은 호칭의 단위이면서 값이 다른 것이 사용되는 등 혼란을 겪었다. 비근한 예로 하나의 직업자군이 동업자끼리의 편의를 도모하고 동료와 비밀유지를 의하여 특별항 단위난 계량법을 쓰게 되고 결국 관습화하는 것은 비록 프랑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흔히 있는 일이다. 학자 간에는 물론, 일반대중에게도 느껴지게 되었고, 이때 탈레이랑의 혁신적인 제의안은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국민의회에서는 어느 나라에서도 채용할 수 있는 신단위계를 만들기로 하고 그 임무를 파리 과학학사원에 위임하여 당시의 지도적인 과학자(Borda, Lagrange, Laplace, Monge, Condoreet)들로 구성된 새로운 위원회를 조직하고 검토를 한후 보고서를 제출하여 국민의회로 부터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1)신단위계의 기초로 지구 자오선 길이의 1/4을 채용할 것.
(2)과학학사원의 보고서에 기록된 작업을 즉시 실행할 것과 덩컬크(Dunkirk)와 바셀로나(Barcelona) 간의 자오선의 측량을 서둘것.
과학학사원은 위 두가지의 지침에 따라 1792년 6월 측량작업의 준비를 완료하고 작업을 시작하였으나 정치적, 군사적 사정으로 6년에 걸친 노력 끝에 드디어 1798년 측량을 완료하였다. 1798년 11월 이 결과를 프랑스 정부에 보고하고 처음으로 신제도를 국제적으로 펼칠 계획으로 각국에 대표를 파견 회의를 소집하여 프랑스를 포함한 11개국이 참여하여 측정결과의 정확도를 검사한 후 미터를 확정하는 한편 증류수 1세제곱데시미터의 질량을 조사하고, 킬로그램을 산출하는 온도를 섭씨 4도를 채택하게 된다. 이상의 연구로 새로 확정된 미터원기와 킬로그램원기는 백금으로 만들어져 공화국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었고, 문서 보관소에 소장된 원기들은 보관소의 이름을 따서 각각 미터 데자르시브, 킬로그램 데자르시브라 불리게 되고, 이중 미터원기는 2개의 복제품이 만들어 지고 이외에 12개의 철제 단면 표준기가 만들어져 대표단을 파견한 나라로 보내어 졌다.
이렇게 통일된 미터법이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구 단위계의 습관 때문에 1837년 7월 법률로써 제정하여 3년간의 유예기간을 거쳐 1840년1월1일 이후 미터법의 단위계를 강제적으로 시행하기 이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미터법이 실제 각국의 관심을 끈 것은 19세기 후반이었고 여러 번의 회의 끝에 1872년 미터법 국제회의에서 국제 미터원기와 국제 킬로그램원기를 둘 것과 국제국을 설립할 것을 결의하여 1878년 파리 근교 세브르(Sevres)에 사무국이 설치되었고 백금과 이리듐 합금으로 미터원기와 킬로그램원기가 다수 만들어 졌다.
미터원기는 그 단면이 X형이며 길이가 102Cm인데 홈바닥에는 양끝에서 1Cm되는 곳에 가는선을 긋고 그 두선 사이가 1m가 되게 하였다. 이 미터원기들이 미터 데자르시이브와 비교하여 그중 No.6이 1889년 제1차 국제 도량형 총회에서 새로운 국제 원기로 선정 되었고 나머지는 각국에 분배되었다. 킬로그램원기는 직경 39mm, 높이 39mm 되는 실린더로 되어있다. 우리나라는 1874년 합금(Alliage de 1874)으로 1889년에 만든 No.10 미터기와, 1884년 존슨·매티에서 만들어진 No.39 킬로그램원기가 도입되어 현재 한국 표준 연구소 내 보관,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결성된 국제미터 원기는 그 후 세계 각국에서 실시한 미터원기와 광의 파장과의 비교 측정 결과 원기가 경년변화를 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1960년 제11차 도량형 총회에서 미터기원의 자리를 크립톤-86(86Kr)램프에서 나오는 등적색 광에게 그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빛은 그 파장의 일정함이 대단히 우수하여 크립톤-86의 등적색 파장의 그 정밀도가 2 ×10-8정도 이어서 미터원기 보다 훨씬 우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빛을 사용하여 길이를 측정할 때는 간섭효과를 측정하는데 이때 그 간섭 거리가 문제가 된다. 크림톤-86 램프의 경우는 간섭 길이가 800mm 정도여서 긴 거리 측정이 곤란하고 또한 스펙트럼선의 모양이 비대칭이어서 1960년부터 출현하게 된 레이저 빛 보다는 모든 면에서 떨어졌다. 레이저의 출현은 과학, 군사, 의료산업등 모든 분야의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으며 정밀측정 분야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또 자연상수인 빛의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하게 되었고 미터의 정의도 바뀌게 되었다.
즉 현대과학 기술로 가장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주파수와
그림 1.1 이집트 큐비트 그림 1.2 로마의 대저울
(튜린의 이집트 박물관 소장)
1.4 우리나라 도량형의 연혁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도량형기를 사용하였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도량형제도가 그것은 중국의 제도에서 전파되어 온 것이라 추측된다. 삼국시대를 지나 고려 이조시대를 거쳐 비교적 근세까지 우리나라의 도량형 제도는 중국에서 유래한 척관법을 사용하였으며 특히 이조 세종대완 시대에는 전제상정소를 두어 각종 자(尺)를 정비하는 한편 구리로 원기를 만들어 각 지방관서에 보내어 표준자로 이용케 하였으며 이 제도가 경국대전에 의해 법제화 되었다.
이조말 광무6년(1902)에는 궁내부(宮內府)에 평식원(平式院)을 설치하고 도량형 규격을 정비하는 한편 도량형기의 제조와 검정을 담당케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1964년 미터법에 의한 계량단위를 통일함으로써 본격적인 미터법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1.5 미터법의 창설
미터법은 1790년 프랑스의 탈레이랑이 새로운 단위의 설정을 제안한 것이 그 효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미터법 이전 프랑스의 도량형은 기타 유럽제국과 원류를 같이하는 로마인이 전한 것이었다. 미터법 정립 전까지 주로 사용된 길이 단위는 피에 드로아(Piedde roi)로서 약325mm의 길이를 갖는 것이었다. 그 기원은 아마도 이집트왕 다리우스가 정한 큐비트의 1/2에서 딴 것으로 찰스대제의 제정으로 시작된것이라 추측된다. 상기 단위 이외에도 여러가지 단위가 있었으며 특히 각주마다 각 도시마다 다른 값을 쓰고 또 같은 도시 내에서도 같은 호칭의 단위이면서 값이 다른 것이 사용되는 등 혼란을 겪었다. 비근한 예로 하나의 직업자군이 동업자끼리의 편의를 도모하고 동료와 비밀유지를 의하여 특별항 단위난 계량법을 쓰게 되고 결국 관습화하는 것은 비록 프랑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흔히 있는 일이다. 학자 간에는 물론, 일반대중에게도 느껴지게 되었고, 이때 탈레이랑의 혁신적인 제의안은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국민의회에서는 어느 나라에서도 채용할 수 있는 신단위계를 만들기로 하고 그 임무를 파리 과학학사원에 위임하여 당시의 지도적인 과학자(Borda, Lagrange, Laplace, Monge, Condoreet)들로 구성된 새로운 위원회를 조직하고 검토를 한후 보고서를 제출하여 국민의회로 부터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1)신단위계의 기초로 지구 자오선 길이의 1/4을 채용할 것.
(2)과학학사원의 보고서에 기록된 작업을 즉시 실행할 것과 덩컬크(Dunkirk)와 바셀로나(Barcelona) 간의 자오선의 측량을 서둘것.
과학학사원은 위 두가지의 지침에 따라 1792년 6월 측량작업의 준비를 완료하고 작업을 시작하였으나 정치적, 군사적 사정으로 6년에 걸친 노력 끝에 드디어 1798년 측량을 완료하였다. 1798년 11월 이 결과를 프랑스 정부에 보고하고 처음으로 신제도를 국제적으로 펼칠 계획으로 각국에 대표를 파견 회의를 소집하여 프랑스를 포함한 11개국이 참여하여 측정결과의 정확도를 검사한 후 미터를 확정하는 한편 증류수 1세제곱데시미터의 질량을 조사하고, 킬로그램을 산출하는 온도를 섭씨 4도를 채택하게 된다. 이상의 연구로 새로 확정된 미터원기와 킬로그램원기는 백금으로 만들어져 공화국 문서 보관소에 보관되었고, 문서 보관소에 소장된 원기들은 보관소의 이름을 따서 각각 미터 데자르시브, 킬로그램 데자르시브라 불리게 되고, 이중 미터원기는 2개의 복제품이 만들어 지고 이외에 12개의 철제 단면 표준기가 만들어져 대표단을 파견한 나라로 보내어 졌다.
이렇게 통일된 미터법이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구 단위계의 습관 때문에 1837년 7월 법률로써 제정하여 3년간의 유예기간을 거쳐 1840년1월1일 이후 미터법의 단위계를 강제적으로 시행하기 이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미터법이 실제 각국의 관심을 끈 것은 19세기 후반이었고 여러 번의 회의 끝에 1872년 미터법 국제회의에서 국제 미터원기와 국제 킬로그램원기를 둘 것과 국제국을 설립할 것을 결의하여 1878년 파리 근교 세브르(Sevres)에 사무국이 설치되었고 백금과 이리듐 합금으로 미터원기와 킬로그램원기가 다수 만들어 졌다.
미터원기는 그 단면이 X형이며 길이가 102Cm인데 홈바닥에는 양끝에서 1Cm되는 곳에 가는선을 긋고 그 두선 사이가 1m가 되게 하였다. 이 미터원기들이 미터 데자르시이브와 비교하여 그중 No.6이 1889년 제1차 국제 도량형 총회에서 새로운 국제 원기로 선정 되었고 나머지는 각국에 분배되었다. 킬로그램원기는 직경 39mm, 높이 39mm 되는 실린더로 되어있다. 우리나라는 1874년 합금(Alliage de 1874)으로 1889년에 만든 No.10 미터기와, 1884년 존슨·매티에서 만들어진 No.39 킬로그램원기가 도입되어 현재 한국 표준 연구소 내 보관,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결성된 국제미터 원기는 그 후 세계 각국에서 실시한 미터원기와 광의 파장과의 비교 측정 결과 원기가 경년변화를 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1960년 제11차 도량형 총회에서 미터기원의 자리를 크립톤-86(86Kr)램프에서 나오는 등적색 광에게 그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빛은 그 파장의 일정함이 대단히 우수하여 크립톤-86의 등적색 파장의 그 정밀도가 2 ×10-8정도 이어서 미터원기 보다 훨씬 우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빛을 사용하여 길이를 측정할 때는 간섭효과를 측정하는데 이때 그 간섭 거리가 문제가 된다. 크림톤-86 램프의 경우는 간섭 길이가 800mm 정도여서 긴 거리 측정이 곤란하고 또한 스펙트럼선의 모양이 비대칭이어서 1960년부터 출현하게 된 레이저 빛 보다는 모든 면에서 떨어졌다. 레이저의 출현은 과학, 군사, 의료산업등 모든 분야의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으며 정밀측정 분야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또 자연상수인 빛의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하게 되었고 미터의 정의도 바뀌게 되었다.
즉 현대과학 기술로 가장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주파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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