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신라기의 왕권과 진골귀족․육두품신분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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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통일 신라기의 왕권과 진골귀족․육두품신분에 대해 알아보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머리말]
1. 통일 신라기의 전제왕권의 배경
2. 귀족 ․ 육두품신분의 대두

[본 문]
1. 통일신라기의 왕권세력
2. 육두품신분의 역할
3. 골품제도
4. 귀족신분의 사치생활 (예시1,예시2)
5. 민중의 생활

[끝 말]
주제에 관한 나의 느낌 및 생각

본문내용

차려 먹었다. 하지만 가난한 일반 백성들은 온 식구들이 한데 모여 왁자지껄하게 식사를 하였을 거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물기가 많고 차지며 따뜻한 음식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처럼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기 힘들다. 그래서 숟가락젓가락을 사용하는 수저문화가 발달하였다.
반찬은 산, 강, 바다에 나는 채소, 생선, 해조류, 짐승의 고기 등이었는데 그 중 김치와 된장은 인간의 몸에 필수적인 염분을 공급받았다.(가장 중요한 반찬임) 채소를 벅을 수 없는 겨울철에 비타민C를 섭취하기 위해 소금으로 염장을 하고 마늘로 맛을 내었다.(고추는 조선 후기나 전래되었습니다. 그러니 삼국 시대의 김치는 백김치랑 비슷하다고 해야겠군요.) 된장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많이 나는 콩을 소금과 함께 발효한 음식으로 단백질 공급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된장뿐만 아니라 장 같은 발효식품을 아주 잘 만들었다.
요리는 주로 귀족들의 사치스런 음식으로 채웠는데 술, 안주, 반찬, 과일 등 거의 중국과 같았다. 이는 중국에 유행하던 많은 요리들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왔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의 가장 큰 근심은 굶주림으로, 곡식으론 여의치 않으면(세금 때문에 잡곡도 제대로 못먹습니다.) 나무껍질이나 풀뿌리, 나물, 도토리 등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배를 채웠다. 그래서 몸을 팔기도 하고 자식도 팔아서 목숨을 부지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심하면 사람을 잡아먹는 경우도 있었다.
주 : 신분제 있는 사화랑 마찬가지로 그때도 귀족집과 서민집이 있었다. 또한 골품제도 있어서 집 재료도 엄격하게 규제를 받았으며 대개 귀족집은 기와를 인 크고 넓은 집이 대부분이었고 기와를 이을 수 있는 것은 궁궐, 사원, 관청, 귀족집만 가능했다. 기와를 전문으로 다루는 와박사가 있었고 그 기술을 일본에 전해주기도 한 것으로 보아 그 화려함은 대단했을 것이다. 귀족집은 외양간, 마굿간, 부엌, 창고, 우물, 방앗간도 갖추고 있었다.(골품제 때문에 제한이 있긴 하지만 대개 이러했음)
그러나 일반 백성의 집은 이와 같을 수 없었고 그나마 초가집이라도 반듯하게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지방사회에서 행세깨나 하는 자들로 한정되었으며 대다수는 간단한 초가집이나 움집이었다. 더구나 지독히도 가난한 천민은 짚풀더미를 대충 둘러친 초라한 집에서 사는 것이 고작이어서 큰비라도 내리면 피해가 막심했다. 이처럼 불안정하게 생활하는 하층민이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상황에서 경주의 귀족들이 화려한 기와집을 짓고 왕과 함께 태평성대나 노래했다. 그러니 신라가 어찌 망하지 않으리. 안 망했다면 더 이상한 노릇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계절이 뚜렷하고 여름과 겨울이 길고 봄가을이 짧은 편이다. 특히 겨울철은 활동량이 많지 않은데도 여러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더욱더 길게 느껴진다. 삼국시대는 조선시대처럼 온돌도 없었으며 대신 온돌의 원시 형태라 할 수 있는 쪽구들만 일부 있었다. 방 한 '쪽'이나 일부 바닥에 흙으로 침상을 만든 뒤, 아궁이에 불을 때 연결된 통로를 따라 열기가 침상이 데워지면서 실내 기온도 올라가게 된다. ...그렇다 해도 방 전체에 구들이 깔린 후대의 온돌방에 비해 실내는 매우 썰렁했다. 오늘날의 실내 벽난로와 같은 원리로 난방을 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방안에다 부엌을 만들기도 했으나(요리를 하면서 그 열기로 실내 기온을 따뜻하게 하려고...) 기나긴 추운 겨울을 견디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이래저래 백성들만 고생이고 귀족들만 좋았다. 목숨을 하늘에 맡긴 채 생활할 수밖에 민중들의 생활이었다.
[끝말]
주제에 관한 나의 느낌 및 생각
중, 고등학교때 그리고 대학 강의시간을 통해 한국사를 접해보고는 있지만, 역사는 과거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많이 듣는 내용이지만 머릿속에 기억에 남은 것은 별로 없다. 그래서 나는 역사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지 않다. 내가 쓴 주제의 내용도 제목부분만 많이 낯이 익을 뿐 처음 접하는 것처럼 생소해서 부끄러운 생각이 컸다. 시대는 통일신라시대(신라중대~) 부분으로 정해, 왕권, 귀족, 6두품세력, 그리고 민중의 생활을 알아보았다. 통일 신라기 하면 신라의 삼국통일의 의의에 관한 긍정적, 부정적 이야기가 많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어 통일하였다. 그러나 이런 방법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고구려, 백제, 신라. 그들은 물론 서로 적이었다. 하지만 적이기 전에 한반도에서 태어난 같은 민족들이었다. 그런데도 외국의 힘을 빌어 민족을 없애는 자세는 그리 옳은 일은 아니다. 만약 삼국이 평화롭게 경계를 끊고 통일을 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서로가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리하면 서로의 문화를 합해 매우 독특하고 다양한 문화를 만들 것이고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통일을 하지 않았을까? 왜 굳이 피를 보면서 싸웠을까? 그것은 삼국의 나쁜 관계. 즉 적개심이 매우 깊기 때문이 아닐까? 언제나 툭하면 백성을 죽이고 용장을 죽이고, 왕을 죽이고, 그런 역사의 반복으로 그런 것이라 생각된다. 따지고 보면 신라도 그런 증오심 때문에 당과 손을 잡은 게 아닐까? 하지만 신라의 삼국통일도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라로 인해 삼국은 평화로워졌고, 전쟁이 자주 일어나지도 않게 되었다. 그리고 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백성들은 숯으로 밥을 지어먹고 대체로 넉넉하게 살 수 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을 좋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정한 시각보다는 긍정적으로 보도록 해야겠다. 신라의 입장이 되어 그들을 이해하는 자세도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신라의 골품제도, 합의제도 등 보다는, 민중의 생활에 관심 있었다. 물론 중대나 하대나 귀족중심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민중에 대한 기록이나 사료는 별로 없어서 아쉬웠다. 귀족의 무분별한 사치생활로 인해 고통을 받아왔던 민중들. 그런 민중들의 힘으로 신라가 지탱했었고,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 같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분리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남은 학기 강의를 통해 많은 역사 지식들을 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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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3.24
  • 저작시기2006.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00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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