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머리말
2. 의병사상의 원류
1)전통사적 배경
2)위정척사운동
3)갑오농민전쟁
3. 의병전쟁사의 시기 구분문제
4. 전기의병의 전개
5.중기의병의 전개
6. 후기의병의 전개
7.의병에서 독립군으로(전환기 의병)
8. 의병전쟁의 역사적 의의
2. 의병사상의 원류
1)전통사적 배경
2)위정척사운동
3)갑오농민전쟁
3. 의병전쟁사의 시기 구분문제
4. 전기의병의 전개
5.중기의병의 전개
6. 후기의병의 전개
7.의병에서 독립군으로(전환기 의병)
8. 의병전쟁의 역사적 의의
본문내용
돌석의 의병 등 서민의병이 크게 부각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의병전쟁은 민족사회의 저변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리하여 후기의병으로 발전하여 대중적 의병운동으로 변모한 것이다.
의병전쟁은 일제의 침략이 심화됨에 따라 단계적으로 그 강도를 더해 갔다. 1905년의 을사조약 늑결과, 이어 1907년의 광무황제 강제 퇴위 및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을 거치면서 대일전면전의 양상으로 격화되어 간 것이다. 일제는 1907년 6월의 헤이그밀사의거를 계기로 이또 히로부미의 주도하에 대한식민지화 방침을 확정하고, 이를 실현코자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해산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결국 한국민의 강력한 저항을 가져온 전기가 되었다.
특히 군대해산은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급격히 확산고조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서울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로 비롯된 군인들의 저항의식은 고조되었고 해산을 거부한 채 그대로 의병으로 전환됨으로써 의병전쟁에 강력한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해산군인들이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편성하거나 기존의 부대로 흡수됨으로써 이후 의병은 무기와 전술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와 각지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의병은 신식총포로 무장한 일제군경에 비해 화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에 있었다. 일부 의병은 일제로부터 노획한 소총 등의 근대식 총기를 소지하기도 했지만, 대개의 경우 재래식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화력이 부족한 의병은 일반적으로 게릴라전을 벌이며 이를 극복했다. 즉 일제 군경을 산간 험지로 유인한 뒤 유리한 지형지세를 이용, 기습공격을 가한 뒤 신속히 철수하는 것이 의병의 전형적인 전법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후기로 갈수록 기동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단위 부대의 성원수가 수백, 수십명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10여명에 불과한 부대도 많았다. 또 홍범도, 차도선이 주축이 된 관북지방의 산포수의병부대나 호남지방의 전해산, 심남일의병 등의 예에서 보듯이 대규모 부대의 경우에는 여러 소부대로 나뉘어 유기적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의병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던 1908년 전후에는 전국 방방곡곡에 의병이 활동하지 않은 곳이 없었을 정도였다. 국내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두만강, 압록강 대안의 간도와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사회에서도 의병부대가 편성되어 국내진공작전을 벌여 일제 군경을 상대로 치열한 항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안중근도 한 부대를 거느리고 함북 회령까지 진격했으며, 1909년 10월 26일 이또 히로부미 처단한 하얼빈의거 역시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결행해 올린 전과였다.
항일전의 궁극적인 목표는 일제 구축에 있었고, 의병은 일제 구축을 위해 서울을 공략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1907년 말에는 서울 공략을 위해 저명한 의병장을 주축으로 전국의병이 연합한 13도창의군 1만여명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 군세를 떨쳤다. 그 가운데 왕산 허위가 거느리는 별동대는 서울의 인후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역부족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처럼 의병전쟁이 격화일로를 치닫게 되자, 일제는 대한식민지화를 단행하기 위한 整地작업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의병 탄압작전을 벌였다. 그 결과 의병은 1909년 전후를 고비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어 그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고 말았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의병이 이때 순국 혹은 투옥되었다. 전국 가운데서도 가장 치열한 항일전을 벌였던 호남의병은 일제의 초토화전략인 ‘남한대토벌작전’으로 말미암아 5백여명이 전사하고 2천여명이 체포되는 엄청난 희생을 치루게 되었다. 또한 경상충청강원도 일대에서 항일전을 선도하던 이강년과 민긍호, 경기도 일대 의병의 지도자였던 허위 등도 일제 군경의 마수에 희생됨으로써 이 지역 의병의 항일전에 일대 타격을 가져오고 말았다.
생존한 의병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장기지속적인 항일전을 구상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기항전으로 전력이 고갈되고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의병은 국내항전을 포기하고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근거지 이동을 단행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국외로 망명한 의병들은 현지 한인사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항일세력을 규합하는 등 활발한 항일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게 됨으로써 이후 국외 독립운동의 연원을 형성하게 된다. 1920년대 들어 활발하게 펼쳐지는 독립군의 항일전도 결국 국치 전후 망명한 의병계열이 근간을 이루었던 것이다. 봉오동, 청산리대첩의 주역인 홍범도가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의병은 스스로 ‘후세에 할 말을 남기기 위해’ 전장에 투신한다고 하였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이자 승패를 떠나 적 구축에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의리’가 있기 때문에 전장에 뛰어든다는 것이다. 박은식이 ‘나라의 정수’(國粹)라 의병을 일컬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의병전쟁을 단순한 승패나 전과로 논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의병전쟁에 참여한 연인원은 수십만명에 이른다. 의병이 봉기하던 초기에는 학덕을 겸비한 양반 유생을 중심으로 규합되었으나, 항전이 격화됨에 따라 1907년 이후에는 일반 농민, 상인, 퇴역 군인이나 관리 등 다양한 신분 계층이 민족의 성전에 동참했다. 또, 소수의 부일매국노를 제외한다면, 비록 직접 참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물심양면으로 성전을 후원하는 ‘준의병’으로 전국민이 경도되어 있었다. 곧 의병전쟁은 우리 민족의 총력이 경주된 국민전쟁이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1.조동걸, 《한말의병전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2.김상기 외,〈항일의병전쟁〉,《한국사》43, 국사편찬위원회, 1999
3.김창순 외,《한구독립전쟁사》, 삼광출판사, 1989
4.강만길, 《고쳐쓴 한국근대사》, 창작과 비평사, 2001
5.신용하, 〈한말의병전쟁의 기점에 대한 새 제안〉,《한국독립운동사의 재조명》, 한국독립 운동사연구소, 1989
6.이상찬.〈1896년 의병운동 통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역사비평》45, 역사문제연구소, 1998
7.박성수, 《이야기독립운동사》, 교문사, 1996
의병전쟁은 일제의 침략이 심화됨에 따라 단계적으로 그 강도를 더해 갔다. 1905년의 을사조약 늑결과, 이어 1907년의 광무황제 강제 퇴위 및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을 거치면서 대일전면전의 양상으로 격화되어 간 것이다. 일제는 1907년 6월의 헤이그밀사의거를 계기로 이또 히로부미의 주도하에 대한식민지화 방침을 확정하고, 이를 실현코자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해산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결국 한국민의 강력한 저항을 가져온 전기가 되었다.
특히 군대해산은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급격히 확산고조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서울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로 비롯된 군인들의 저항의식은 고조되었고 해산을 거부한 채 그대로 의병으로 전환됨으로써 의병전쟁에 강력한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해산군인들이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편성하거나 기존의 부대로 흡수됨으로써 이후 의병은 무기와 전술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와 각지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의병은 신식총포로 무장한 일제군경에 비해 화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에 있었다. 일부 의병은 일제로부터 노획한 소총 등의 근대식 총기를 소지하기도 했지만, 대개의 경우 재래식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화력이 부족한 의병은 일반적으로 게릴라전을 벌이며 이를 극복했다. 즉 일제 군경을 산간 험지로 유인한 뒤 유리한 지형지세를 이용, 기습공격을 가한 뒤 신속히 철수하는 것이 의병의 전형적인 전법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후기로 갈수록 기동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단위 부대의 성원수가 수백, 수십명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10여명에 불과한 부대도 많았다. 또 홍범도, 차도선이 주축이 된 관북지방의 산포수의병부대나 호남지방의 전해산, 심남일의병 등의 예에서 보듯이 대규모 부대의 경우에는 여러 소부대로 나뉘어 유기적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의병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던 1908년 전후에는 전국 방방곡곡에 의병이 활동하지 않은 곳이 없었을 정도였다. 국내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두만강, 압록강 대안의 간도와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사회에서도 의병부대가 편성되어 국내진공작전을 벌여 일제 군경을 상대로 치열한 항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안중근도 한 부대를 거느리고 함북 회령까지 진격했으며, 1909년 10월 26일 이또 히로부미 처단한 하얼빈의거 역시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결행해 올린 전과였다.
항일전의 궁극적인 목표는 일제 구축에 있었고, 의병은 일제 구축을 위해 서울을 공략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1907년 말에는 서울 공략을 위해 저명한 의병장을 주축으로 전국의병이 연합한 13도창의군 1만여명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 군세를 떨쳤다. 그 가운데 왕산 허위가 거느리는 별동대는 서울의 인후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역부족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처럼 의병전쟁이 격화일로를 치닫게 되자, 일제는 대한식민지화를 단행하기 위한 整地작업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의병 탄압작전을 벌였다. 그 결과 의병은 1909년 전후를 고비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어 그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고 말았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의병이 이때 순국 혹은 투옥되었다. 전국 가운데서도 가장 치열한 항일전을 벌였던 호남의병은 일제의 초토화전략인 ‘남한대토벌작전’으로 말미암아 5백여명이 전사하고 2천여명이 체포되는 엄청난 희생을 치루게 되었다. 또한 경상충청강원도 일대에서 항일전을 선도하던 이강년과 민긍호, 경기도 일대 의병의 지도자였던 허위 등도 일제 군경의 마수에 희생됨으로써 이 지역 의병의 항일전에 일대 타격을 가져오고 말았다.
생존한 의병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장기지속적인 항일전을 구상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기항전으로 전력이 고갈되고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의병은 국내항전을 포기하고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근거지 이동을 단행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국외로 망명한 의병들은 현지 한인사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항일세력을 규합하는 등 활발한 항일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게 됨으로써 이후 국외 독립운동의 연원을 형성하게 된다. 1920년대 들어 활발하게 펼쳐지는 독립군의 항일전도 결국 국치 전후 망명한 의병계열이 근간을 이루었던 것이다. 봉오동, 청산리대첩의 주역인 홍범도가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의병은 스스로 ‘후세에 할 말을 남기기 위해’ 전장에 투신한다고 하였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이자 승패를 떠나 적 구축에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의리’가 있기 때문에 전장에 뛰어든다는 것이다. 박은식이 ‘나라의 정수’(國粹)라 의병을 일컬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의병전쟁을 단순한 승패나 전과로 논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의병전쟁에 참여한 연인원은 수십만명에 이른다. 의병이 봉기하던 초기에는 학덕을 겸비한 양반 유생을 중심으로 규합되었으나, 항전이 격화됨에 따라 1907년 이후에는 일반 농민, 상인, 퇴역 군인이나 관리 등 다양한 신분 계층이 민족의 성전에 동참했다. 또, 소수의 부일매국노를 제외한다면, 비록 직접 참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물심양면으로 성전을 후원하는 ‘준의병’으로 전국민이 경도되어 있었다. 곧 의병전쟁은 우리 민족의 총력이 경주된 국민전쟁이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1.조동걸, 《한말의병전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2.김상기 외,〈항일의병전쟁〉,《한국사》43, 국사편찬위원회, 1999
3.김창순 외,《한구독립전쟁사》, 삼광출판사, 1989
4.강만길, 《고쳐쓴 한국근대사》, 창작과 비평사, 2001
5.신용하, 〈한말의병전쟁의 기점에 대한 새 제안〉,《한국독립운동사의 재조명》, 한국독립 운동사연구소, 1989
6.이상찬.〈1896년 의병운동 통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역사비평》45, 역사문제연구소, 1998
7.박성수, 《이야기독립운동사》, 교문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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