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성밟기
진흥왕과 선운사전설
밤내골 달래의 효심 전설
검당마을과 염정설화
1.고창 신재효 고택(高敞申在孝古宅)
2.동리 신재효(桐里 申在孝, 1812~1884)
3.도산리 지석묘(道山里支石墓)
4. 고창 상갑리 지석묘군(高敞上甲里支石墓群)
진흥왕과 선운사전설
밤내골 달래의 효심 전설
검당마을과 염정설화
1.고창 신재효 고택(高敞申在孝古宅)
2.동리 신재효(桐里 申在孝, 1812~1884)
3.도산리 지석묘(道山里支石墓)
4. 고창 상갑리 지석묘군(高敞上甲里支石墓群)
본문내용
고도 불리는 그는 조선 후기의 판소리 이론가이자 개작자이자 후원자이다. 본관은 평산, 호는 동리이다. 중인으로 태어나 35세 이후에 이방이 되었다가 호장, 정3품 통정대부, 절충장군, 가선대부를 걸치고 호조참판과 동지중추부사를 겸하였다. 부친이 고창에서 관약방을 하여 재산을 모았고 그 재산을 물려받아 흉년이 들었을 때 서민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으며 신분을 넘어서 폭넓은 인맥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근대 말기 판소리 정립에 큰 업적을 남겼다. 직선적이고 고졸한 성음을 갖추면서 박자가 빨라 너름새를 할 여유가 없는 동편제와 유연하고 화려한 성음을 갖추고 박자가 느려 너름새가 쉽게 이루어지는 서편제의 장점을 조화시켜 판소리의 듣는 측면에 덧붙여 보는 측면을 강조하였다.「춘향가」를 남창과 동창으로 구분하여 판소리의 다양화를 시도하였으며,「광대가」를 지어 판소리의 이론을 수립하여 ‘인물사설득음너름세’ 4대 법례를 마련하였다.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벌가」「적벽가」「변강쇠가」의 6마당의 사설을 개작하여 체계적으로 구성하였다. 상층의 수식적인 어구를 사용하여 하층민들의 현실인식이 약화되기도 했으나 서민의 진실을 대변하고 억압된 민중의 불만을 판소리를 통해 승화시켰으며 아전으로서의 비판의식과 사실적인 남녀관계의 모습을 그리기도 하였다. 실제로「변강쇠가」는 그 내용이 음탕하여 잘 불리지 않다가 지금은 가락이 잊혀지고 다섯 마당만 전해지고 있다.
신재효는 사설 외에 30여 편의 단가 혹은 ‘허두가’라고 하는 노래를 지었다.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재산 모으는 방법을 노래한「치산가」, 서양의 침입을 걱정하는「십보가」「
그는 근대 말기 판소리 정립에 큰 업적을 남겼다. 직선적이고 고졸한 성음을 갖추면서 박자가 빨라 너름새를 할 여유가 없는 동편제와 유연하고 화려한 성음을 갖추고 박자가 느려 너름새가 쉽게 이루어지는 서편제의 장점을 조화시켜 판소리의 듣는 측면에 덧붙여 보는 측면을 강조하였다.「춘향가」를 남창과 동창으로 구분하여 판소리의 다양화를 시도하였으며,「광대가」를 지어 판소리의 이론을 수립하여 ‘인물사설득음너름세’ 4대 법례를 마련하였다.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벌가」「적벽가」「변강쇠가」의 6마당의 사설을 개작하여 체계적으로 구성하였다. 상층의 수식적인 어구를 사용하여 하층민들의 현실인식이 약화되기도 했으나 서민의 진실을 대변하고 억압된 민중의 불만을 판소리를 통해 승화시켰으며 아전으로서의 비판의식과 사실적인 남녀관계의 모습을 그리기도 하였다. 실제로「변강쇠가」는 그 내용이 음탕하여 잘 불리지 않다가 지금은 가락이 잊혀지고 다섯 마당만 전해지고 있다.
신재효는 사설 외에 30여 편의 단가 혹은 ‘허두가’라고 하는 노래를 지었다.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재산 모으는 방법을 노래한「치산가」, 서양의 침입을 걱정하는「십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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