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 관
2. 답사 코스
3. 답사내용
4. 답사후기
2. 답사 코스
3. 답사내용
4. 답사후기
본문내용
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가기까지 이름의 변화만큼이나 많은 민족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채 1992년 8월 15일에「서대문 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서대문구에서는 1995년부터 서대문 독립공원 사적지에 대한 성역화사업을 시작하였다. 조국독립을 위해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투옥되어 모진 고문과 탄압을 받고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우리 선열들의 자주독립정신을 일깨워 주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새롭게 단장하여 「서대문 형무소역사관(西大門刑務所歷史館)」으로 개관하였다.
정문을 들어서자 왼편으로는 지하 감옥이 보였고, 바로 전시관으로 이어졌다. 일제시대 전국에 있던 형무소들에 대한 소개와 일제 시대 독립 운동에 대한 소개가 대부분이었다. 독립 기념관에서 많이 본 듯한 밀랍 인형으로 만들어진 전시관도 볼 수 있었다. 구경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약간은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이어지는 전시관은 지하 전시관이었는데, 감옥의 형태와 고문당하는 독립 운동가의 모습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지하이기도 하고 사람도 없었고, 분위기도 음산해서 솔직히 떨렸다. 특히 음향효과로 사람의 목소리까지 나왔는데 깜짝 놀랐다.
전시실을 지나서 중앙사를 거쳐 옥사를 몇 군데 둘러보았다. 붉은 벽돌의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최근까지도 사용한 것을 증명이라고 하듯, 각 감방 문에는 총원 몇 명, 청소 상태, 등이 적힌 종이가 아직도 붙어 있었다.
눅눅한 나무 냄새가 나는 나병사를 둘러보았다. 전염병이나 나병에 걸린 수형자를 따로 격리했던 시설이었다. 굳게 철문으로 잠겨져 있었고, 주변에 잡초와 나무들만이 무성했다. 나병사 뒤로는 높게 서 있는 과거의 망루가 있었는데, 여러 옥사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을 듯 했다.
나병사를 나와서 사형장으로 향했다. 오른쪽으로 돌아 사형장 바로 옆의 안내문엔 과거 사형수들이 사형장으로 들어가기 직전 잠시 기대어 통곡을 했다는 '통곡의 미루나무' 가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지하 옥사를 가 보았는데, 유관순 여사가 갇혀 있었던 곳이라 한다. 출입이 통제 되어있어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4. 답사후기
근대로 접어드는 1876년 이전의 흥선대원군의 집권하여 개혁정책을 구상하고 실행하던 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은 한 시대를 호령하던 왕의 아버지의 거처로서 손색이 없었다. 경복궁이나 덕수궁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봐왔던 궁과는 다르게 살림살이들도 함께 복원되어 있어 보다 생동감있게 당시의 대원군과 그 가족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개항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몸살을 앓던 우리 민족의 비운을 말해주듯 덕수궁과 경복궁의 훼손은 무엇 보다도 가슴아팠다. 이외에도 창덕궁이나 경희궁, 창경궁 또한 일제에 의해 고의적인 훼손으로 인해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다행이도 요즘 들어 ‘역사바로세우기’나 ‘일제잔재청산’등의 운동으로 인해 미미하나마 우리 것을 복원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 또한 든다. 특히 조선총독부가 들어서 있던 자리에 다시금 복원된 흥례문의 모습은 더욱 빛을 발했다.
또한 서대문형무소를 보면서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저런 짓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의 우리 민족이 피정복민으로서 당해야 했던 아픔을 대변해 주는 듯 해서 가슴아팠다.
평소 역사공부를 하면서도 교과서를 통해서 볼 뿐 직접 유적을 찾아 다닐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 답사를 통해 굳이 먼 곳의 유적을 찾는 것 만이 답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주변의 것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찾아 본다면 우리 주변 가까운 곳에도 답사해볼 만한 곳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자주 그 앞을 지나면서도 무심코 지나쳐 버릴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 답사를 통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좀 더 우리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잊혀지고 있는 우리의 유산들을 지켜야 할 것 같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무관심은 너무도 부끄러운 현실이다.
프랑스 인들은 남의 나라 문화재를 조차도 애지중지하는 마당에 우리는 우리 것을 남에게 빼앗기고도 다시 찾아올 생각은 고사하고 그것이 어디 있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을 볼 때 다시 한번쯤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이번 답사를 통해 우리민족의 수난의 역사를 둘러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며 또한 한편으로는 관심을 가지고 우리 것을 보존하고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서대문구에서는 1995년부터 서대문 독립공원 사적지에 대한 성역화사업을 시작하였다. 조국독립을 위해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투옥되어 모진 고문과 탄압을 받고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우리 선열들의 자주독립정신을 일깨워 주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새롭게 단장하여 「서대문 형무소역사관(西大門刑務所歷史館)」으로 개관하였다.
정문을 들어서자 왼편으로는 지하 감옥이 보였고, 바로 전시관으로 이어졌다. 일제시대 전국에 있던 형무소들에 대한 소개와 일제 시대 독립 운동에 대한 소개가 대부분이었다. 독립 기념관에서 많이 본 듯한 밀랍 인형으로 만들어진 전시관도 볼 수 있었다. 구경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약간은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이어지는 전시관은 지하 전시관이었는데, 감옥의 형태와 고문당하는 독립 운동가의 모습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지하이기도 하고 사람도 없었고, 분위기도 음산해서 솔직히 떨렸다. 특히 음향효과로 사람의 목소리까지 나왔는데 깜짝 놀랐다.
전시실을 지나서 중앙사를 거쳐 옥사를 몇 군데 둘러보았다. 붉은 벽돌의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최근까지도 사용한 것을 증명이라고 하듯, 각 감방 문에는 총원 몇 명, 청소 상태, 등이 적힌 종이가 아직도 붙어 있었다.
눅눅한 나무 냄새가 나는 나병사를 둘러보았다. 전염병이나 나병에 걸린 수형자를 따로 격리했던 시설이었다. 굳게 철문으로 잠겨져 있었고, 주변에 잡초와 나무들만이 무성했다. 나병사 뒤로는 높게 서 있는 과거의 망루가 있었는데, 여러 옥사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을 듯 했다.
나병사를 나와서 사형장으로 향했다. 오른쪽으로 돌아 사형장 바로 옆의 안내문엔 과거 사형수들이 사형장으로 들어가기 직전 잠시 기대어 통곡을 했다는 '통곡의 미루나무' 가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지하 옥사를 가 보았는데, 유관순 여사가 갇혀 있었던 곳이라 한다. 출입이 통제 되어있어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4. 답사후기
근대로 접어드는 1876년 이전의 흥선대원군의 집권하여 개혁정책을 구상하고 실행하던 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은 한 시대를 호령하던 왕의 아버지의 거처로서 손색이 없었다. 경복궁이나 덕수궁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봐왔던 궁과는 다르게 살림살이들도 함께 복원되어 있어 보다 생동감있게 당시의 대원군과 그 가족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개항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몸살을 앓던 우리 민족의 비운을 말해주듯 덕수궁과 경복궁의 훼손은 무엇 보다도 가슴아팠다. 이외에도 창덕궁이나 경희궁, 창경궁 또한 일제에 의해 고의적인 훼손으로 인해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다행이도 요즘 들어 ‘역사바로세우기’나 ‘일제잔재청산’등의 운동으로 인해 미미하나마 우리 것을 복원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 또한 든다. 특히 조선총독부가 들어서 있던 자리에 다시금 복원된 흥례문의 모습은 더욱 빛을 발했다.
또한 서대문형무소를 보면서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저런 짓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의 우리 민족이 피정복민으로서 당해야 했던 아픔을 대변해 주는 듯 해서 가슴아팠다.
평소 역사공부를 하면서도 교과서를 통해서 볼 뿐 직접 유적을 찾아 다닐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 답사를 통해 굳이 먼 곳의 유적을 찾는 것 만이 답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주변의 것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찾아 본다면 우리 주변 가까운 곳에도 답사해볼 만한 곳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자주 그 앞을 지나면서도 무심코 지나쳐 버릴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 답사를 통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좀 더 우리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잊혀지고 있는 우리의 유산들을 지켜야 할 것 같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무관심은 너무도 부끄러운 현실이다.
프랑스 인들은 남의 나라 문화재를 조차도 애지중지하는 마당에 우리는 우리 것을 남에게 빼앗기고도 다시 찾아올 생각은 고사하고 그것이 어디 있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을 볼 때 다시 한번쯤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이번 답사를 통해 우리민족의 수난의 역사를 둘러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며 또한 한편으로는 관심을 가지고 우리 것을 보존하고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